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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눈썹달 Nov 28. 2020

탕비실을 통한 내적 갈등

회사 탕비실 관리 어떻게 하시나요?

탕비실 관리가 시급했다.

작지만 60여 명이 드나들며 함께 쓰는 공간인데, 코로나로 내부 취식이 늘면서 많이들 무책임하게 사용하고 있었다. 냉장고 안에는 주인을 알 수 없는 음식과 음료들이 방치되고 있었고 전자레인지 내부는 찌들었으며 싱크대 배수구 내부는 물때가 많았다... 미화 담당 직원분이 따로 계시지만 그분은 하루 두 번 사무실, 화장실, 출입구, 복도 등 기본 공간 관리만 해도 일이 많았다. 물론 탕비실도 쓰레기 비우고 바닥 닦고 싱크대 한번 닦는 정도는 매일 해주시지만, 매일 사용되는 냉장고, 전자레인지, 정수기, 싱크대 배수구 등 손길이 닿지 못하는 곳곳의 청결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 


새로 오신 팀장님께서 탕비실 관리가 전혀 안 되는 것 같다고 말씀하셨다. 어딜 가나 위생이 중시되고 있는 시국이니, 싫었지만 차장 직급으로 층에서 '언니'격인 내가 나설 수밖에 없었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일이라서 나라도, 우리 팀이라도 다시 앞장서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두를 위해 관리가 필요하니 협조해달라는 요청을 나무랄 사람은 없겠지.




관리 일정과 관리 항목을 마련하여 같은 층 팀장님들과 그 아래 직급에까지 보낼 이메일을 작성했다. 방식은 탕비실 관리인원을 팀별로 2명씩 두고, 각 팀이 한 달씩 돌아가며 관리하는 것을 안으로 했다. 


그런데 메일을 쓰면서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관리인원 팀별 2명.

이 2명에 남직원을 포함하는 팀이 있을까.

이 2명에 대리나 과장 직급을 포함하는 팀이 있을까.


없을 것 같았다.  

각 팀의 막내들 몫이 될 게 뻔해 보였다. 이 관리가 모든 사람이 달려들 일은 아니었지만, 이미 팀 내에서 허드렛일, 뒤치다꺼리를 전담하고 있을 막내들(대부분 여자)에게 이 일마저 얹어주게 될 것 같아 맘이 쓰였다. 

메일에 관리인원을 남녀 각각 1명으로 구성해달라고 쓸까..? 중간관리자를 포함해달라고 할까..?

이 또한 주제넘은 요청 같다. 각 팀의 관리인원을 누구로 정할지는 그 팀 사정에 맞게 알아서 할 터였다. 괜히 기본 취지까지 거부감 들게 하지 말자는 생각에 다른 의견은 더하지 않고 팀별 관리인원이 정해지면 알려달라 마무리하여 메일을 보냈다.


별다른 반응도... 별다른 이견도 없었다. 우리는 지금 그런데에 신경 쓸 시간이 없다는 듯이. 그리고 6개 팀 중 2개 팀에서 막내 여직원들로 구성하여 회신을 주었다. 4개 팀은 아직까지 회신이 없는 상태. 순서가 다가올 때까지도 연락을 주지 않으면 내가 리마인드 하는 수밖에...




팀별로 돌아가며 관리하자는 의견을 내면서 우리 팀 순서를 나중에 둘 수 없었기에, 첫 달 관리를 우리 팀으로 두었고 데일리 관리는 틈틈이 나 혼자 했다. 10분이면 되는 일이어서 혼자로도 충분했고, 실무가 많은 하위 직급들보다 내가 잠깐씩 시간 내는 게 편했다. 하지만 월 단위로 1번씩 해야 하는 냉장고(2대) 청소를 혼자서 할 수는 없었다. 더구나 그간 관리되지 않은 냉장고를 정리하는 일은 내용물을 싹 비우고 내부와 외부까지 닦아내야 했기 때문에 도움의 손길이 필요했다. 


참 모순되게도... 관리 안을 마련하고 앞장서면서 막내들에게 미안해지기도 하고 걱정스럽기도 했는데 나 역시 막상 과장, 대리, 주임들에게 같이 하자는 말을 선뜻 내밀지 못했다. 실무 영역에서 하루 내내 열심인 그들에게 또 다른 스트레스를 안기는 것만 같았다. 냉장고 청소를 퇴근 시간 이후에 할 수도 없는 일인데, 업무 시간 중에 짬을 내라고 하기에도 여의치 않아 보였다. 쉽게 말해 눈치가 보였던 것이다. 결국 비겁하게 나도 그들 대신 우리 팀 막내에게 같이 하자고 말하고야 말았다.


집에서 냉장고 청소, 전자레인지 청소 한번 해본 적 없는 막내는 나를 도와 냉장고 속에서 나온 썩은 음식물을 버리고, 내부 선반을 씻어 닦아내고 베이킹소다를 이용해 전자레인지 내부까지 청소했다. 집에서도 하지 않았던 한 단계 깊은 살림을 강제 체험했다.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속으론 불평과 욕을 쏟아내며 했을지 모른다.


청소하는 동안 몇몇의 직원들이 탕비실에 다녀갔고, 수고 많으십니다... 뭐가 많네요... 그냥 가기 멋쩍은 듯한 류의 말을 했다. 두 분의 팀장님도 왔다가 많이 남았어? 수고들이 많네. 했지만, 들고 나는 사람들 중 '저도 좀 도울까요?' 하는 사람은 없었다.  


이런 게 사회생활인 거다, 그러면서 배우는 거다, 라는 말은 하고 싶지 않다. 누군가 그런 말을 한다면 화가 날 것 같다. 개구리는 올챙이 적을 모르고, 사실 그런 말을 쉽게 하는 사람들은 그런 일을 하지 않았던 사람들이 더 많다. 어쩌면 이것은 탕비실을 잘 사용하고 정리를 잘해야겠다는 걸 배우는 현장이 아니라, 오히려 사람들의 무책임한 모습 그리고 탕비실이라는 공간이 아직도 얼마나 차별적인 요소를 품고 있는 곳인지 배우게 되는 현장일 수 있겠다는 생각에 마음이 무겁다.



앞으로 나는 다른 팀 관리직원이 정리하는 일도 계속 같이 하기로 마음먹었다. 내가 탕비실 이용할 때 한 번씩 주변 정리하고, 큰 손이 드는 냉장고 정리는 나도 도울 것이다. 각자 사용한 흔적만이라도 그때그때 잘 정리해 주면 누군가의 바쁜 시간을 쏟게 하지 않아도 된다. 내가 얼마나 더 이곳에 있을지 알 수 없지만 있는 동안은 나부터 솔선수범하며 분위기를 만들어가기로 다짐...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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