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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일희 Feb 18. 2020

도시락 싸기, 아름다운 모성일까?

아이들에게 방학이 놀거나 쉬는 기간이 아니게 된 지 오래다. 방학은 학원에 다니며 학업 레벨을 올릴 절호의 시즌이기에, 아이들은 온종일 학원에 짱 박혀 있다. 지인 T의 아들 또한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종일 학원에 있다 보니 끼니가 문제였던지, 저녁이면 도시락을 싸들고 가 먹이고 온다는 얘기를 들었다.


새벽부터 일어나 도시락 다섯 개를 싸야 했던 엄마의 고충을 어려서부터 듣고 자란 지라, 나는 도시락을 경유해 전해지는 미담성 모성이 달갑지 않다. “사 먹으라고 하지 그걸 매일 도시락을 싸들고 다녀요?”하는 말에 T는, “한 끼면 몰라도 어떻게 두 끼를 사먹으라고 그래요. 그건 너무하잖아요.” 글쎄, 뭐가 너무한 걸까.

    

T는 아들 사랑이 지극하다. 사랑하는 아들에게 어떻게 매식을 두 끼나 시키냐는 그의 말은, 얼핏 듣기에 참으로 아름답게 느껴진다. 특히 남성이 이런 얘기를 듣는다면 더욱 그럴 것이다. 한국 남성들 대부분은 묘하게도, 자신의 엄마에 대한 일정 정도의 연민들을 가슴에 재워두고 있는 듯하다. 여성들이 차별받고 억압받고 살아왔다는 것에는 동의하지 않지만, 자신의 엄마의 일화를 전할 때에는 눈시울을 붉히는 경우를 종종 봤다. 기이하다. 엄마는 여성인데... 여성과 모성은 어떻게 분리되는 걸까.    


‘도시락 모성 수행’이라는 내 의견에 빈정상한 T는, 자신의 도시락 셔틀은 누구의 강요도 아니며, 어차피 저녁은 하는 것이고 그 저녁을 도시락으로 가져다주었을 뿐인데, 그게 무슨 사회적으로 요구되는 모성이냐고 반발했다.



물론 그랬을 수도 있다. 하지만 어차피 식구들 먹이려 저녁을 하는 것과 갓 지은 저녁을 가까운 거리에 있지도 않은 학원으로 나르는 것이 같은 일일까? 그는 도시락을 가져다주면 아이가 어찌나 잘 먹는지 기쁘기 그지없고, 차 안에서 도시락을 먹이는 행위가 재미있기까지 하다며 웃었다.

     

물론 아이는 참 좋았을 것 같다. 엄마가 지극한 정성으로 싸 온 도시락을 먹는 일은 행복한 일일 것이다. 어쩌면 이 아이는 이때의 도시락을 평생 잊지 못하고, 엄마의 도시락을 지극한 모성으로 각인할 것이다. 이 경험과 기억은 먼 훗날, 자신의 엄마를 떠올릴 때 흐뭇한 미소를 번지게 하거나 눈시울을 붉히게 할지도 모른다. 우리 엄마가 나를 이정도로 사랑했다고 믿게 할 테니 말이다.


하지만 이 선량한 믿음은 자칫 이런 미래를 만들지도 모른다. 자기 아내에게 (아내는 엄마가 아니라 배우자임에도 불구하고) 이와 비슷한 형태의 지극한 헌신적 사랑을 기대하거나 비교할 수 있고, 혹은 자신의 자식에게 베푸는 아내의 사랑이 자신의 엄마가 수행한 모성에 비해 하찮다고 느껴 비난하거나, 그와 비슷한 정도의 모성을 수행하기를 기대하거나 요구할 수도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아들은 자신이 받은 엄마로부터의 사랑의 형태가 제대로 된 모성이라고 오해하고 맹신하며 모성의 원형으로 내면화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고정관념이니 잠재의식이니 하는 게 별건가. 살며 스며든 관념과 쌓아 온 경험을 켜켜이 내장시키며 만사의 척도로 삼게 되는 것이지 않은가. 그래서 경험은 사람을 성장하게도 하지만, 그 안에 갇히게도 한다.

    

T의 도시락은 미래로 달려가기 전에 현재에 영향을 미칠 지도 모른다. T의 아들이 엄마가 정성껏 싸온 도시락을 먹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 어떤 아이를 생각해 보자. 어떤 아이는 도시락 싸오는 걸 구리다고 생각할 것이다. 어떤 아이는 조금 부러울지 모른다. 부럽다가 그만, 자신의 엄마는 그 시간에 TV나 보고 있거나 쇼핑이나 하고 있는 ‘맘충’이라 오해할지 모른다. 어떤 아이는 엄마표 도시락은커녕 편의점에서 도시락 사먹을 돈이라도 여유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엄마가 없는 어떤 아이는 자신에겐 왜 이런 엄마가 허락되지 않는 것일까 공연히 슬퍼질지도 모른다. 또 어떤 아이는 아예 학원을 다닐 수 없는 형편이기에, T의 도시락이 다른 나라의 이야기로 느껴질지 모른다. 또 어떤 아이는... 신자유주의의 파고 아래 심각하게 진행되는 돌봄의 양극화로 위기에 처한 아이들이 어디 한 둘인가. 차 안에서 살짝 먹인 도시락을 누가 알겠느냐고 말하는 T, 귀엽다.  

   

T는 도시락 셔틀이 사회적으로 요구된 모성이 아니라고 박박 우겼지만, 자신도 모르는 사이, 유구하게 이어져온 모성 이데올로기가 그녀로 하여금 도시락을 싸게 했을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좋아서 한 일이라는 게 가만 들여다보면 그 근저에는, 그래야 미담의 주인공으로 대접받고 칭송받으며 착한 여자로 무난히 살 수 있고, 이럴 경우 개인적 사회적 보상도 함께 따라오기 마련이기에,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며 ‘내가 좋아서 한 선택’이라 믿으며 살아가지 않던가.


T의 남편의 입장을 생각해보면 더 명확해진다. 아버지라면, 아이가 매식을 하는 게 안타깝다고 도시락을 쌀 생각은 하지 않을 것이다. 대신 아내가 아들에게 기꺼이 도시락 배달을 하도록 종용할지는 모르지만. 가시적인 억압을 발견하는 게 뭐가 어렵겠는가. 눈에 보이지 않는 억압을 알아채기가 어려운 거지. 물론 나는 T를 비난할 생각은 없다. 다만 다른 모성에 대한 다른 상상력과 실천이 아쉬울 뿐이다.  

   


T는 다감하고 사려 깊은 사람이다. 그는 집에서 아이들 과외 교습을 하며 전업주부 역할까지 충실히 해내는 사람이다. 그러느라 늘 분주하다. 사실 이런 경우가 더 애매하다. 직장맘 못지않게 일과 가사라는 이중고에 시달리지만, 딱히 직장맘으로 분류되지는 않기에(풀타임이 아니면 부업을 남는 시간 활용하기 정도로 취급하지 않던가), 전업주부를 완벽히 수행해야 한다는 압박을 더 느끼며, ‘시간빈곤자’로 살아간다. 그렇다면 이런 날, 아이가 학원에 가 있어 밥을 챙기지 않아도 되는 이런 날, 내 시간을 즐길 절호의 기회라 삼고 ‘아싸’ 하며, 바빠서 미뤄두었던 자신을 돌보면 얼마나 좋을까.   

  

한두 달 매식한다고 건강한 아이가 갑자기 탈이 나지는 않는다. 끼니를 매식으로라고 떼울 수 있는 게 다행인 아이도, 결식을 아예 밥 먹듯이 하는 아이도 적지 않다. 이런 아이들도 큰 병나지 않으면서 그럭저럭 살아간다. 돌봄의 위기에 있는 아이들에 비하면, T의 아이는 그야말로 호강인 셈이다. 나도 T의 아이를 봐서 알지만, 매우 건강하다. 아들을 지극히 사랑해서라면 할 말은 없다. 하지만 여성을 옭아맸던 모성이 모두 사랑이라는 이름하에 수행되었던 역사  임을, 나의 지극한 돌봄 수행이 다른 이에게 결핍감을 안길 수 있는 시대적 불평등의 재생산일 수 있음을, 고려해보았으면 좋겠다.  

  

꽤 인기를 끌었던 [동백꽃 필 무렵]의 한 장면. 학교 운동회 날, 대부분의 아이들은 엄마에게 이끌려 미리 자리 잡아 펼쳐 논 돗자리에 앉아, 엄마가 정성껏 싸온 도시락을 저마다 펼쳐 놓고 하하 호호 점심을 즐기고 있지만, 엄마가 없는 동백과 향미는 고작 호일에 싸인 천 원짜리 김밥을 부끄럽게 펼치고 먹는다. 다른 아이들에겐 즐거운 운동회 날이 향미와 동백에겐 더없이 슬픈 날이다. 동백과 향미에게 도시락은 ‘눈물’과 같은 말일 것이다. ‘눈물’젖은 도시락을 먹던 향미와 동백은 지금 다 사라지고 없는가.  



그깟 도시락가지고 왜 죽자고 덤비느냐고 하겠지만, 사실 도시락의 모성 수행에 관해 진지하게 생각해보게 된 계기는 딸 때문이었다. 몇 해 전 해외에서 학업을 시작하게 된 딸애가 어느 날, 학교에서 급식을 하지 않는다고 신기하다고 전해왔다. 그래서 학교 아이들 모두 도시락을 싸가지고 다닌다는 것이었다. 도시락이라야 대부분 샌드위치 한쪽을 싸가지고들 오는데, 중요한 것은, 그 샌드위치에 어느 누구도 엄마 손을 빌리는 아이가 없다는 것이었다. 놀라웠다. 그러다 곰곰 생각해보니, 이게 정말 놀랄 일인가 싶었다.  

   

딸애는 운이 좋아 홈스테이 아주머니가 샌드위치를 점심으로 싸 주기로 했지만, 다른 홈에 머무르는 아이들은 제각각 직접 점심을 싸가지고 온다는 것이었다. 점심 도시락이 무슨 깨달음을 주었던지 딸애가 이런 말을 했다.


“여기 와서 보니 한국 아이들이 진짜 엄마를 많이 부려먹는 거 같아. 여기 애들은 세탁이며 청소며 다 지들이 알아서 하는 건 물론이고, 엄마 직장 다니는 애들은 저녁도 지들이 알아서 해먹더라고. 한국 엄마들 가사노동 진짜 쩌는 거 같아. 고등학생만 되도 부모 도움 덜 받겠다고 파트타임 하는 애들도 많고. 생각해보니 엄마한테 미안하더라.” 엄마 곁을 떠나봐야 철드는 거 맞는 거죠?    


딸애의 참회는 기특했지만 실은 나도 좀 놀랐다. 서양 사람들이야 아침 식사도 간단히 씨리얼 정도로 끝내니까 챙겨주고 말 것도 없을 테지만, 도시락까지 지들이 알아서 싸간다니, 한국 같으면 어림도 없을 일 아닌가. 물론 식생활의 차이는 있겠지만, 서양 엄마들이 먹는 것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데 반해, 한국 엄마들은 먹는 일에 집착하는 것 같다. 전쟁과 가난을 겪으며 먹는 게 최고의 이슈였던 때에서 벌써 반세기를 훌쩍 지나왔는데 왜 이럴까? 왜 여전히 가족의 먹거리를 챙기는 게 엄마의 가장 큰 미덕이 되고 있는 걸까.    

 


먹는 자체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도 옛 얘기다. 이제는 어떤 음식을 얼마나 폼 나게 별나게 먹느냐가 관건인 시대다. ‘먹방’의 대유행, 각종 유투버들의 요리 대전 및 전시를 보며, 주부들은 별별 퓨전 요리를 다 밥상으로 끌어들이느라 여념이 없는 듯하다. 요리가 엄마의 주요 스펙이 된 모양새다. 옛날 같으면야 한식 하나로 승부를 걸 수 있었지만, 요즘 그랬다간 시대에 뒤떨어진 구닥다리 되기 십상이다.


엄마들 단톡방에 자랑인지 전시인지 모를 밥상 요리 사진이 올라오는 걸 보면 입이 떡 벌어진다. 중식인지, 일식인지, 이태리식인지, 국적도 모를 음식의 향연이 경쟁적으로 펼쳐지니 말이다. 그렇게까지 먹지 않아도 아이들은 이미 충분한 영양을 아니 오히려 과하게 섭취하고 있는 데 말이다. 배고프던 시대를 훌쩍 지나 과영양의 시대에 와 있는데도 왜, 한국 엄마들은 여전히 먹는 것에 이렇게 열을 올리는 것일까. T의 도시락은 이와 무관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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