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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rape Jun 24. 2022

비 올 때 생각나는 음식은?

얼큰만두전골

비가 오거나 흐린 날씨가 되면 꼭 생각나는 음식이 있다. 바로 국물과 면 요리다. 여름인데도 불구하고 뜨끈하게 몸을 데우고 싶어진다. 나의 요리 세포는 꼭 시간이 많고 느긋할 때가 아닌, 바쁘고 조급한 순간에 깨어난다. 이날도 퇴근 후에 잠시 쉬고 운동을 가야 했는데, 그 사이 해놓고 가고 싶을만큼 만두전골 레시피가 눈에 띄었다. 왜 그랬던 걸까.


냉동만두와 다른 재료들은 얼추 있어서, 버섯만 몇 가지 더 사가기로 했다. 회사 근처 시장을 구경하며 봤던 버섯들이 떠올랐다. 팽이버섯 세 묶음과 느타리버섯 한 팩. 출근할 때 꼬깃꼬깃 챙겨온 천 원짜리 두 장을 내밀었다. 그렇게 시장 바이브를 느끼며 빗 속 점심 산책을 마무리했다.


박스지에 쓴 가격표가 무심히 꽂혀있는 재래시장 바이브


집에 도착해서 폭우에 홀딱 젖은 슬랙스 바지를 손빨래한 후, 세탁기로 탈수 버튼을 눌렀다. 시간은 대략 30분 정도. 운동 가기 전 내게 남은 시간도 비슷했다.


알배추 몇 장을 씻은 다음 사선으로 큼직히 썰었다. 이렇게 하면 줄기와 잎이 골고루 남아 있어 먹을 때 맛이 더 좋아진다고 한다. 애호박도 손가락 두 개 너비로 자르고, 양파는 채썰고, 파와 고추는 어슷썰기해준다. 시장에서 사온 버섯들도 씻어두고, 찌개용 두부도 썰어두었다. 그리고 냄비에 재료들을 쌓기 시작했다. 바닥에 알배추와 채썬 양파를 깔아둔 다음 애호박, 버섯, 두부 등을 반으로 나누어 빙 둘러주었다.


양념장은 고춧가루, 양조간장, 다진마늘, 멸치액젓, 미림, 소금, 후추를 섞어서 만든다. 마음이 급한 와중 재료를 손질하면서도 속으로 생각했다. 조금이라도 숙성되게 양념장을 먼저 만들어둘걸. 어디서 본 건 있어가지고. 재료들을 담은 냄비 가운데에 냉동만두들을 넉넉히 둔 다음, 한 켠에 양념장도 얹었다. 그리고 미리 끓여놓은 멸치다시마 육수를 부었다. 요리를 하면서 조금씩 늘어나는 것은 우선순위 감각이다. 어떤 과정이 시간이 좀 더 걸리는 부분인지 알고, 그것을 먼저 챙긴다. 내 인생의 과업들도 그렇게 해나갈 수 있으면 좋으련만!


자칭 밀키트 마냥 세팅을 마친 다음, 엄마를 불렀다. 이제 양념장이 자연스레 풀어지고 만두가 익을 정도가 되도록 끓이다가, 마지막에 팽이버섯을 올리고 좀 더 끓이면 된다고 알려주었다. 그렇게 나는 운동을 하러 떠났다. (이렇게 쓰고 보니 운동에도 진심이었나보다.)


약 한 시간 후. 운동을 마치고 나와보니 딱 1인분 정도 냄비에 남아 있었다. 처음 해보는 요리를, 그것도 다 마무리짓지 못한 채 떠나서 맛도 아직 보지 못했다. 나름 정리하면서 요리한다고 했지만, 어지르고 나온 흔적들도 있었다. 하지만 가족들 모두 맛있게 먹어주었고, 나도 감탄하며 먹었다. 다음에 다같이 끓이면서 함께 먹으면 더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나의 요리는 늘 레시피를 겨우겨우 따라가는 모양새지만, 그렇게 레시피와 비슷한 결과물이 나올 때면 나름 뿌듯하다. 맛도 평타를 친다면 말할 것도 없다. 먹고 싶은 요리를 직접 해먹는 것만큼, 부지런히 나 자신을 사랑해주는 활동도 없는 것 같다. 냉파(냉장고 파먹기)를 하는 것도 덤이랄까! 이렇게 요리를 할 수 있는 환경이 주어진 것도 얼마나 감사한가. 음, 비가 오고 흐린 날씨여서 더 감성적이 되었나보다.


보글보글, 얼큰만두전골 끓이기 비포 앤 애프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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