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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소리로 만나 소리로 이어지지

[공연 에세이] 제1132회 더하우스콘서트

by 유진

1. 어쩌면 우리는

20250924153834_buthlzwv.jpg ⓒ 유진

당신은 청록색에 가까운 녹색 옷이 있으신가? 우리 집에는 한 벌 있다. 아니, 있었다고 해야겠다. 지금은 반쯤 내 탓으로 강제로 이별한 상태다.


그렇다면 채도 높은 색상의 옷은? 핫핑크 반팔이라든가, 빨간색, 노란색 같은 옷들 말이다. 내 친구들은 대체로 그런 쨍한 색감을 즐겨 입지 않는다. 오히려 올블랙 캐주얼이나 청바지를 선호했지 눈에 확 띄는 옷은 거의 없었다. 단체로 색을 맞춰 입자 하면 매번 검은색이나 흰색으로 몰렸으니 더 말해 무엇하랴.


그런 와중에 내 옷장에는 유독 색깔 있는 옷들이 많다. 이 취향은 어디서 비롯됐을까? 아마도 내게서 청록색 옷을 빼앗아 가신 우리 어머니에서 기원한 것이리라. 특별히 선호해서 산 것도 아닌데, 옷걸이에 걸린 옷들을 바라보고 있자니 무지개 하나쯤은 그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사실 순전히 그녀 탓만은 아니다. 옷장에 옷이 걸려 있다는 건 결국 내가 알게 모르게 눈길을 주다 직접 골라낸 것이 아니던가. 그래서 우리 모녀의 옷장은 옷 개수는 적을지 몰라도, 색감만큼은 유난히 다채로웠다.


그렇다면 시간이 흘러 이 옷들이 헤지면 어디로 갈까? 어디긴, 바―로 방구석 행이지. 어느 날은 청록색, 또 다른 날은 딸기처럼 붉은 빨강, 또 어떤 날은 무난한 흰 티가 잠옷이 된다. 나는 주로 파자마나 흰 티만 입었기에, 이런 무지개의 향연은 자연스레 어머니 차지가 되었다.


그런데 이게 문제였다. 이 집안의 딸내미는 쓸데없는 장난기가 많아 종종 ‘과일 놀이’를 했다. 별 건 아니고 하는 사람은 재미있지만, 당하는 이는 열 받는 장난이다. 어머니가 여러 색 옷을 청록색 상·하의와 함께 입으실 때마다, 나는 머릿속에 스친 과일 이름을 그대로 내뱉곤 했다.


“오늘은 수박이다. 오늘은 포도네. 아, 가지인가?”


이만큼이나 놀리다 보면, 때로는 비극적 결말로 이어졌다. 잠깐 외출한 사이, 혹은 깜빡 잊은 사이에 ‘열매 담당’ 색 옷들을 버렸다는 통보를 받았다. (나 때문에) 입이 방정이지. 애꿎은 옷들이 버려졌다. (물론 이미 낡은 옷이긴 했지만.)


돌아보면, 요즘은 이런 ‘과일 장난’을 하지 않은 지 꽤 오래됐다. 집에 머무는 시간이 줄어든 탓도 있고, 단순히 옷을 두고 놀리기엔 그보다 신경 써야 할 일이 많아졌다. 이제는 옷자락을 보고 장난칠 여유조차 내 머릿속 어딘가에서 한계에 다다른 듯하다.


추측해보시라. 내가 그렇게 집요하게 바라보는 것은 무엇일까. 이제 굳이 입 아프게 설명할 것도 없다. 뻔하다. 옷자락 너머의 사람이겠지. 바로 우리의 클래식 연주자들. 무대 위에 선 그 사람들이겠다.


무엇을 보고 그들로부터 ‘색’을 판별하냐고? 화려한 드레스 자락? 럭셔리한 수트 차림? 멋지게 세팅된 헤어스타일?


보통은 내가 그런 것들을 어느 정도 눈에 담을 거라 생각하겠지만, 아쉽게도 나는 물질적인 것에는 안목이 낮다. 아무리 빛깔 좋고 이름난 브랜드의 옷이라도 내게는 그저 무대의상일 뿐이다. 다만 반짝이는 보석이라도 하나 있으면, “어우, 예쁘다!” 하며 눈길이 가긴 하겠다.


우리가 보는 영상 속 연주자들은 대체로 어떤 모습인가? 화려한 무대, 우아한 인사, 뭔가 있어 보이는 장신구들로 가득하지 않은가. 하지만 나는 그런 호화로운 공연장에 매번 갈 만큼 넉넉한 지갑을 가진 어른도 아니고, 외국 내한 연주자의 황홀한 무대나 거대한 오케스트라에 특별히 마음이 끌리는 것도 아니다.


내 클래식 세상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소박하다. 그러나 당신이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빛으로 가득하고, 내밀하며, 소중한 네모 공간이다.


그 안에서 펼쳐지는 건 단순하다. 내 눈앞의 연주자들이 홀로, 혹은 몇몇이 모여 내가 비추는 조명을 받는다. 그 빛의 출발지는 어디일까? 내 두 눈이겠다. 조명 스위치는 보통 이렇게 켜진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혹은 “오늘도 만나서 반갑습니다.” (딸칵!)


다만 나도 사람인지라, 공연 전 하루를 다 소진하고 나면 피곤함에 전원 버튼을 누르는 걸 깜빡할 때가 있다. 그럴 땐 어찌 알았는지, 눈앞의 연주가들이 내 스위치를 번쩍 켜버린다. 무엇으로? 그들의 활과 손가락 아래, 지문에서 피어나는 것들로.


어라라, 내 전등을 켜주신 당신은 누구실까? 나는 내 초점을 붙잡은 것이 무엇인지 확인하고 싶어했다. 사실 여유 시간은 충분하다. 클래식은 각 악장이 대중가요보다 훨씬 길지 않던가. 5분 내외의 곡이 되려 더 드물다.

좋아하는 것을 오래 보고, 반복해 되돌아보는 일은 내겐 큰 기쁨이지만, 한 곡에 길게 집중해야 한다는 이 지점이 누군가에겐 큰 장벽이자 걸림돌이 될 수도 있음을 알고 있다. 요즘은 뭐든 빠르지 않은가.


생각해보면, 이런 곡 하나 둘만 가지고 누군가를 무엇에 빗대어 단정하기엔 여전히 섣불러 보일 수도 있겠다. 저 사람이 어떤 마음을 지녔는지, 자기도 모르게 품어낸 색을 내 시야에 담으려면 30분은 족히, 몇 번의 관찰까지는 필요하지 않겠는가.


그럼에도 내가 때마다 관찰하기를 포기하지 않는 것은 ‘과일 놀이’하던 버릇을 못 버린 탓이겠다. 마음에 들었다 하면 어떻게든 노란 조명빛 아래에 놓아두려 하니, 나만큼 욕심 많은 관객도 드물 것이다.


다만, 필요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도 든다. 다른 장르에 비해 유독 나같이 냅다 리뷰를 적어내려가는 사람도 몇 없지 않은가. (적어도 내 시선에선) 전공자가 아닌 내가 읽어도 볼만한 글이 필요했다.


나는 아직도 악장 옆에 적힌 표기들? 검색해 보기 전엔 무슨 뜻인지 하나도 모른다. 그냥, 무턱대고 현장에 찾아가서 저 사람이 얼마나 유명한지, 어떤 상을 탔는지는 하나도 안중에 두지 않은 채 일단 ‘손전등’ 하나를 켜 둔다. 딸칵. “당신은 누구십니까?”


나를 회초리가 아니라 작은 손전등이라 스스로 칭하고 나니, 아뿔싸! 볼 것들이 훨씬 많아졌다. 표정, 미소, 시선, 동작, 그리고 무엇보다 소리.


내가 어쩌다 이런 습관을 지니게 되었을까. 아마 현악 4중주를 즐겨 듣기 시작한 때부터였을 것이다.


현악 4중주? 솔직히 말해 클래식 종사자나 애호가에게는 ‘실내악’, ‘현악 4중주’, ‘피아노 트리오’, ‘이중주’ 같은 단어들이 익숙하겠지만, 일반 대중에게는 여전히 낯설고 어렵게 다가온다. 나 역시 클래식에 관심이 없던 시절엔 무료 공연이나 오케스트라 무대에 가서도 무엇을 봐야 하고, 어떻게 감상해야 할지 한참 헤맸다.


그럼에도 단언할 수 있는 건, 이 낯선 세계 안에도 우리가 ‘집중’할 만한 재미들이 분명 존재한다는 것이다. 다만 그걸 건져내려면, 클래식은 어쩌면 ‘운명적인 순간’을 조금 더 필요로 하는지도 모르겠다.


어떤 운명을 타고나야 할까? 아마도 타고난 취향, 선호하는 결에 딱 맞는 연주와 마주치는 순간일 것이다. 내 귀를 집중시키는 연주자를 만나야만 한다. 그래야 클래식과 더 빨리 친구가 되어, 이 세계에 더욱 깊이 빠져들 수 있다. 누구에게나 그런 경험은 있지 않은가. 나도 모르게 시선이 머물고, 마음이 들뜨는 순간. 그런 순간을 주는 사람을 만날 수 있다면, 그야말로 ‘운명’일 것이다.


그렇다면 취향에 맞는 연주자를 어떻게 찾느냐고? 유감스럽게도 단순히 음원 청취만으로는 쉽지 않다. 아무리 대가의 녹음이라도, 내 취향에 맞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차라리 유튜브에서 연주 장면을 직접 보는 편이 훨씬 낫다.


하지만 우리의 굳건한 정통파, 클래식은 꼭 실물로 봐야만 그 진가를 드러낸다. 공연장에 직접 들어가 현악의 흐름, 피아노의 두드림, 관악의 공명감을 온몸으로 받아내야 비로소 내 취향이 분명해질 수 있다. 나 역시 유튜브로 시작해, 7월의 줄라이 페스티벌을 거쳐 여기까지 오지 않았던가. 그래서 나는 늘 운이 좋은 케이스라 여긴다.

20250924153944_aykdurmz.jpg ⓒ 유진


7월, 공연을 본격적으로 다니고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내가 가장 좋아하고 자주 언급하는 공연장이 하나 있다. 바로 더하우스콘서트다. 왜 이곳을 좋아하냐고? 관객이 가장 많은 것을 누릴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내가 마음속으로만 품었던 바람, “아, 가끔은 누워서 듣고 싶다!”는 소망의 절반쯤을 이곳에서 이뤘다. 마룻바닥에 앉아 공연을 볼 수 있다니, 엉덩이는 무척 아프지만 이 얼마나 귀한 경험인가.


좋아하는 연주자를 가까이서 보고, 공연이 끝난 뒤에는 대화도 나눌 수 있으며, 심지어 간식까지 내어준다. 이러니 내가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올해는 내가 가장 화두로 삼던 현대 음악을 주제로 다뤄주어, 한여름을 더욱 다채롭게 보낼 수 있었다. 공연이 끝날 때마다 후기를 남길 수 있었던 것도 아마 이 무대 덕분이었으리라. 내 인생 최초이자 최고의 현악 4중주팀, 이든을 통해 슈만을 만난 것도 바로 여기였다. 그날을 기점으로 참 많은 일이 이어졌다.

언젠가부터 나는 무언가를 계속 알고 싶어 했다. 무엇일까? 바로 ‘저 사람’과 ‘이 사람’의 차이였다. 분명 같은 카테고리에 묶이는 악기들, 언뜻 보기엔 다 똑같다. 그런데도 왜, 너와 저 사람은 소리와 표현이 이렇게 다른 걸까.


왜 어떤 이는 내게 졸음을 주고, 또 다른 이는 마음 깊숙이 파고드는 걸까. 언론에서 그렇게 유명하다던 연주자인데, 왜 내가 만난 이들만큼은 공명되지 않는 걸까. 끝없이 이어진 물음을 좇다 보니, 결국 결론은 하나였다. ‘사람’이 악기를 통해 드러난다는 것.


답은 모두 ‘결’ 안에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소리에는 분명 결이 있었다. 그 사실을 깨닫고 나니 이 세계가 한층 단순해졌다. 어렵고 졸리게 느껴지는 곡들은 내 취향이 아니거나, 오늘의 합이 덜 맞았거나, 전공자들에게도 까다로운 곡이거나, 애초부터 의도적으로 어렵게 쓰인 작품일 수 있겠구나. 그렇게 스스로 해답을 내릴 수 있었다.


단번에 알게 된 건 아니었다. 처음엔 막연히만 느끼다가, 공연이 끝난 뒤 와인파티나 로비에서 연주자들과 짧게 나눈 대화, 혹은 인터넷 후기를 통해 비슷한 어려움을 확인하면서 조금씩 확신을 얻었다. 나는 비전공자이지만, 내 직감이 완전히 빗나간 건 아니구나 하고 살짝 안도했다.


그날도 그랬다. 무대가 다 끝나고, 22일의 와인파티에서 나는 내가 좋아하는 소리선에게 물음을 던졌다.


“연주가들이 보기엔 제 말들이 어때요? 너무 허황하진 않나요?”


나는 늘 궁금했다. 클래식 리뷰나 평론은 보통 전문 평론가들의 몫 아닌가. 그런데 내 글은 오직 내 안의 시선의 긴 나열일 뿐이었다. 혹시 너무 말도 안 되는 이야기로 보이지 않을까. 음악이 삶인 그들에게 내 발자국은 어떻게 보일지가 늘 궁금하면서도 걱정이 되었다.


그런데, 그 먹구름이 몰려오기도 전에 대답이 돌아왔다.


“(고개를 도리도리, 단호한 톤으로) 듣는 사람이, 들은 그대로가. 그게 맞죠.”


...그게 맞단다. (나는 잠시 멈췄다.) 그래, 맞네. 맞다고 한다! 속으로 외쳤다. “아싸.” 이토록 담백한 답 덕분에 모든 게 단순해졌다. 지금처럼, 그냥 이렇게 하면 되는 거구나.


게다가 오늘, 이 글을 다듬고 있는 24일. 더하우스콘서트에서 메일이 도착했다. 10월의 소식과 함께 내 시선을 붙잡은 한 줄이 있었다.


“하콘의 해석은 내가 아닌 관객의 몫이다.”


뭐야, 내 몫이구나. 공연은 공식적으로는 끝났지만, 제1132회 하우스콘서트는 내게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언제부턴가 나는 아무도 시키지 않은 일을 곧잘 하곤 했다. 이 세계를 사랑하게 되면서, 금방 잊히는 소리에 가녀린 연민을 느끼던 순간부터, 나도 모르게 방 안이나 카페 구석에서 바통을 이어받기 시작한 것이다.


왜 쓰는가? 그냥 예뻐서. 고단한 하루 끝에 무심히 내려놓은 몇 단어가 누군가에겐 또 다른 1악장이 될 수 있다는 걸 몇 번이고 경험하다 보니, 알게 모르게 ‘써야만 한다’는 책임감 위에 서게 되었다. 아무와도 약속하지 않았는데—아트인사이트 대표님 빼고—할 수 있고, 기억할 수 있는데 쓰지 않는다면, '그게 최선이냐'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묻게 되었다. (가혹하도다.)

20250924154018_cbcpnkhs.jpg ⓒ 유진

그러니 내가 좋아하는 소리와 궁금했던 소리가 어우러진 22일을 기록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더군다나 이날의 무대는 바이올리니스트 정주은, 첼리스트 이유빈, 피아니스트 이미연이 함께 꾸린 트리오 공연이었다.


이 조합은 2025년 줄라이 페스티벌에서 쇼스타코비치 피아노 트리오 1번을 함께 연주하며 처음 결성되었고, 좋은 무대를 보여준 덕에 하콘 측에서 곧바로 하반기 일정을 제안해 오늘의 무대가 성사되었다고 한다.


덕분에 나 역시 귀한 기회를 얻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팀, 이든 콰르텟의 바이올리니스트 정주은. 늘 어떤 소리를 지니고 계실지 궁금했던 첼리스트 이유빈. 그리고 내게 첫 모차르트 피아노 트리오를 들려줄 피아니스트 이미연까지. 가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게다가 나는 늘 내가 궁금한 사람들로 글을 쓰고 싶어 하니, 이래저래 더할 나위 없는 기회였다.

20250924154443_mtpiusnq.jpg ⓒ 유진

더하우스콘서트 강선애 대표님의 인사로 시작된 22일의 무대. 이제, 그날의 레퍼토리를 살펴보자. (대표님, 팬이에옹)


모차르트의 피아노 삼중주 C장조 K.548은 교향곡 39·40·41번과 같은 시기에 쓰였으며, 세 악기가 대등하게 대화하듯 어우러지는 구성이 특징이다. 그리그의 「Andante con moto」 EG 116은 피아노 삼중주를 구상했으나 첫 악장만 남은 미완성 작품으로, 하나의 주제를 다양한 방식으로 전개한다. 브람스의 피아노 삼중주 1번 B장조 Op.8은 20대에 작곡했다가 30여 년 뒤 개정해, 초기의 장황한 구성을 줄이고 전체를 간결하고 치밀하게 다듬은 작품이다.


자, 이제 당신도 돌아오지 않는 2025년 9월 22일의 하콘을 함께 거닐어 보자. 나를 위해, 그리고 당신을 위해. 그날의 연주는 이렇게 남겨져 있다.



2. 2025.09.22. 20:00 ~ : 모차르트, 그리그, 브람스


모차르트 – 피아노 삼중주 C장조, K.548

20250924154056_pymvvmnv.jpg ⓒ 유진


I. Allegro — 빠르고 활기차게


본격적으로 음을 드러내기 전, 연주자들은 소리보다 먼저 움직인다. 합을 맞추는 신호를 들어보라. 아주 짧은 숨이 휙 스치고, 이어 깊은 들이쉼과 함께 모차르트가 시작된다.


처음을 몇 번이나 되돌아갔는지 모른다. 같은 지점에서 시작하는데 바이올린은 중간 지대에, 첼로는 바로 그 아래에 자리한다. 이윽고 피아노의 ‘땃땃땃땃’을 들어보라. 이미연 피아니스트의 건반은 물방울 모양처럼 맑다. 바른 자세가 느껴진다.


아, 내가 좋아하는 새초롬한 바이올린 소리가 기지개를 켜고 첼로의 고동이 깊게 파고든다. 피아노 건반은 이 곡이 모차르트의 것임을 드러낸다. 미묘하게 베토벤처럼 생글거리는 듯하지만, 계열 자체가 달라 더 신기하다. 건반 소리는 발레리나의 발끝처럼 단정하다. 이유빈 첼리스트가 한 번씩 획을 그을 때마다 그림자가 깊게 패이고, 높은 음과 만나니 정신이 번쩍 든다.


악보가 넘어간다. 한 번의 눈맞춤 이후 소리가 조금 더 길게 이어진다. 피아노 트리오지만, 개별 악기를 따라가는 습관을 들이면 이만큼 바쁠 수가 없다. 아, 스멀스멀, 오늘 첼로의 색이 감지되기 시작한다. 어쩜 이렇게 진하게 긋고 지나가는가. 정주은 바이올리니스트는 쿨톤의 연노랑색임을 기억하시라. 손쉽고 우아하지만, 가볍게 띄워올릴 줄 아는 소리다.


소리를 둥글게 띄우기보다, 내 손뼘보다 조금 더 길게 이어진 길을 따라가다 보면 이 악장이 끝난다.


II. Andante cantabile — 노래하듯 느리게


노래하는 분위기를 첫 숨에 담아낸다. 그런 지시가 있었으려나? 내가 채점자라면 이 숨에 100점을 주었으리라. 원래도 가라앉은 분위기는 아니었지만, 나긋한 공기가 형성되니 움츠러 있던 어깨가 펴지고 긴장감이 풀린다. 잊지 말자. 나른히 내려놓는 길이다. 피아노가 선명도를 챙겨줄 테니 현악기의 옅은 바람결을 따라가면 된다. 그러다 보면 뒷편의 첼로가 길게 노래한다.


아, 보인다. 새카만 검은색이다. 샛노랑 별 옆에 있으니 더 짙게 드러난다. 악기 종류도, 사용하는 현도 다르지만 어쩜 이렇게 연주자마다 다른 소리가 날까. 감정을 다루는 방식도 그렇다. 오늘의 연주자들은 관객에게 자신들의 여분을 충분히 나누어주고 있다.


어디서 느낄 수 있느냐고? 첼로와 바이올린이 파트를 나눠 가지며 길을 열어주지 않는가. 들뜬 마음은 바이올린에, 가라앉은 시선은 첼로에 기대면 된다.


피아노가 나지막하게 거니는 순간, 바이올린과 첼로가 동시에 기다란 숨을 내뱉는다. 그 시점의 소리선을 살펴보라. 모양이 매번 다르다. 바로 그 지점에서 관객의 몰입도가 확 높아진다.


생각을 비우고 오늘은 그냥 이대로 따라가자. 그 순간, 첼로가 또다시 새카맣게 마룻바닥을 물들인다.


피아노 트리오 무대를 감상한다는 건 3층 높이의 아파트에서 노래하는 세 명의 가수를 바라보는 기분이다. 층별로 이렇게 개성 있게 긴 그림을 그리는데, 어떻게 눈을 뗄 수 있겠는가.


바이올린은 날카로운 순풍을 불러오고, 첼로는 잊고 있던 밤하늘의 기색을, 피아노는 별의 빛을 들고 곁을 지킨다.


III. Allegro — 빠르고 경쾌하게


별을 높이 띄워낼 시간이다. 피아노가 높게 떠올릴까? 그 길은 누가 깔아줄까? 정주은이다. 그 길목을 감싸줄 이는 누구일까? 이유빈이겠다. 결국 다 별무리를 그리기 위함이리라. 생각해보니 그날, 오후 8시의 하늘엔 별이 보이지 않았는데, 그 올망졸망한 것들이 어디로 갔나 했더니 이 사람들이 훔쳐와 여기 수놓고 있었다! (이런, 욕심쟁이가 여기에도 계셨네)


아, 시원하다. 제 역할을 다해낸 높은 음이 꺄륵대며 기쁜 춤을 춘다. 듣기 좋은 20분 40초다. 현악기가, 저 활이 웃는다니까. 소리에 생동감을 태워올릴 줄 아는 사람들이다. 왜 처음에 두 번의 숨을 불어넣었나 했더니, 이 길목에 다 담겨 있었다. 그래서였구나.



그리그 – 피아노 삼중주 C단조를 위한 「Andante con moto」, EG 116

20250924154117_egmnygtl.jpg ⓒ 유진


I. Andante con moto — 느리지만 움직임을 가지고


장중하지도, 그렇다고 무게를 깔지도 않으면서 분위기를 서서히 타오르게 한다. 피아노가 작게 내리막길을 거니는 듯 어려운 춤을 추면, 두 현악기가 어두운 발자취를 그려낸다. 그러다 보라빛의 형태로 위로 조금씩 치솟아 중간 지대를 점령하려 하다가 금세 물러난다.


두 번의 두드림이 몇 차례 반복된다. 마냥 기다리는 재미가 있다. 오, 갑자기 속도감 있게 밀어붙이려다 또 뒤로 빠진다니? (뭐야) 긴 장막 사이를 살짝 오가며 장난치는 재즈 가수의 몸짓 같다.


피아노는 어쩌면 이렇게 또렷하고 다정할까. 26:54, 그런 흐름을 따라 다른 악기들도 부드럽게 뒤따라온다. 이 곡이 미완성으로 끝났으니, 사실은 분위기를 형성하는 제1악장이 아니었겠나. 모차르트와는 또 다른 파동선으로 분위기를 세워간다. 순수한 노란빛보다는 자줏빛 선율을, 청록의 기운을 더해내는 28:34다. 감정선이 진하게 찍혀드는 활의 움직임이 겹겹이 쌓인다.


어쩜 이렇게 새초롬한 바이올린일까. 꼭 필요한 만큼만 내려앉는 이 소리는 도대체 어디로 닿으려나. 29:52, 피아노가 맑게 노래하는 순간을 들어보라. 높은 소리를 내는 바이올린의 시선은 아래로 향하고, 깊은 숨을 깔아내는 첼로의 시선은 저 멀리 위로 향한다.


소리와 시선이 엇갈리며 묘한 균형을 만든다. 결국 트리오란 세 사람이 하나가 되어 그리그를 내려놓는 것이리라. 누구는 실선이 되고, 누구는 그림자가 되고, 또 다른 이는 풍경이 되어 그림이 완성된다.


길지 않은 흐름 속에 짧은 순간들을 쌓아가는 이 곡은 꽤 매력적이다. 예습할 때는 무엇을 들어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는데, 31:45를 들어보라. 차갑게 떨리며 전해지는 소리가 음원으로는 전달되지 못한 선명함을 품고 있다. 이에 질세라 32:05, 첼로가 마룻바닥을 타고 분명하게 다가선다.


이후엔 어떤가. 피아노의 가녀린 숨결에 이어 현악기가 호흡을 나눠 가지다가, 곧 다음을 기대하게 만드는 분위기 속으로 사라진다. 어쩌겠나. 이 곡은 미완성인걸? (으하하)


브람스 – 피아노 삼중주 1번 B장조, Op.8

20250924154218_ralgmacl.jpg ⓒ 유진


I. Allegro con brio — 생기 있게 빠르게


바이올린이 잠시 기다리는 사이, 피아노의 첫음에 맞춰 첼로가 소리를 내려놓는다. 아, 바로 이것을 들으러 왔구나. 서서히 피로가 녹는다. 오늘 왜 이 공연에 왔던가. 이유빈 첼리스트는 어떤 소리를, 어떤 색을 지니고 있을까. 그 궁금증에 답을 얻고 싶었던 게 아니던가.


모차르트와 그리그를 지나 36:26에 이른 지금, 나는 반쯤은 확신한다. 또 다른 까만 밤이 여기 있다. 내 기억 속 칠흑을 그려낸 연주자는 누가 있었던가. 피아노의 김도현 연주가가 마지막이었다. 어쩌면 저렇게 다정하게 땅을 밟아가는데, 소리는 맑고 새카맣게 날까.


이유빈이 소리를 낮게 두드릴 때마다 시선은 바이올린으로 향하기도, 때로는 관객과 천장 사이 어딘가를 응시하기도 한다. 그 눈망울을 보자니 익숙한 문장들이 떠올랐다. 연극 삼매경에 빠져 배우들을 응시하며 한참 생각에 잠겼던 순간들이었다.


배우는 늘 앞을 응시한다. 그 끝은 어디에 닿아 있을까. 새까만 허공일까, 누군가의 얼굴일까. 그들은 눈을 깜빡이지 않는다. 대사, 시선, 표정. 그리고 무엇보다—강렬한 빛을 내는 유성이 왼쪽 눈동자에 박혀 있다.


이 첼리스트의 유성은 어디에 있었을까. 우연히도 왼쪽 눈동자 아랫편에 작게 반짝이고 있었다. 어찌나 빛나던지, 저 시선 끝엔 무엇이 있을까.


긴 상념에 빠지지 않도록 39:18, 바이올린이 여태껏 내지 않던 지직임을 데려온다. 분위기가 치솟을 듯 달려가다가 다시 높은 음에 여유를 주고, 피아노의 마음이 나직하게 되돌아온다. 첼로도 그 곁을 여전히 지켜낸다. 처음의 무게를 덜어내고 마룻바닥 위로 소리를 띄운다. 바이올린은 조금 더 서정적으로 그 사이를 메운다. 아—다정하다. 아, 분명하다. 아—시원하다.


다시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아, 바로 이것을 들으러 왔구나. 피로가 서서히 녹는다. 초가을, 매섭지 않은 바람 같은 소리들이 좋다. 시원함은 바이올린이, 가을의 기색은 첼로가, 별빛은 피아노가 그려주니 내 마음 한켠을 내주지 않을 수 없다. 익숙한 회오리가 아스라히 돌아오는 43:00. 깊게 파고드는 선을 따라가지 않을 수 없다. 바이올린은 다시 지직임을 데려다 놓는다.


치닫는 소리들이 있다. 이럴 땐 가만히 귀를 맡기고 기다리면 된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소리가 알아서 감정을 태운다. 몇 겹의 마음들이 쌓였던가. 서사적 흐름을 완성해야 하지 않겠는가. 내게 클래식, 적어도 이 1악장은 규율이 섞이지 않은 자유다.


무엇을 그려낼지, 어떤 도구를 쓸지, 어떤 의미를 품을지 누구에게도 규정받지 않는다. 46:55, 치정과 밀집과 진심이 응축된 순간이다. 47:23, 아주 낮은 발걸음으로 오른쪽 길로 서서히 향하는 소리에 주목하라. 멀지 않은 곳에서 다시 내려와 마음을 뒤숭숭하게 흔든다.


또다시 바이올린이 지직인다. 익숙한 멜로디가 눈앞에 보란 듯 놓인다. 48:40, 나를 약하게 만드는 소리다. 그 선에 드리워진 다정하지 않은 음색이 부드러운 위로를 내려놓을 때, 눈가가 무겁다. 저 봐라. 한껏 휘두르더니 50:00, 마무리는 이리도 깔끔하다. (아—행복해)


II. Scherzo: Allegro molto — 스케르초: 매우 빠르고 활발하게


이제는 좀 조근조근 흥얼거릴 시간 같다. 이럴 땐 그냥 따라가면 된다. 마냥 기다릴 순 없다. 흥을 타올리다 이내 떨어져 나가는데, 제자리에 머물겠다고?


이 악장에서도 다정함은 여전히 머문다—생각하게 되는 52:22다. 제목이 스케르초라고 매 순간 숨가쁘게 뛰는 건 아니다. 강약을 조절해 자리를 내어주는 설계, 브람스 아니던가.


52:58도 좋다. 바이올린은 첼로와 비올라 언저리에 다가가고, 첼로는 손을 내어 웅덩이를 그려낸다. 피아노가 없었다면 보이지 않았을 안갯길도 드러난다. 53:34, 자잘하게 빛선을 내는 바이올린을 지켜보라.


나의 첫 브람스 피아노 트리오에서 이런 개성 있는 목소리를 만날 수 있어 기쁘다. 세 사람이 다시 제목처럼 소리를 모아간다. 음색이 달라서 듣는 재미가 크다.


III. Adagio — 느리고 엄숙하게


도닥도닥—피아노가 건반을 살포시 두드리는 순간들이 있다. 이제는 조금 물러서 가라앉을 때다. 59:21, 내가 좋아하는 표현이 드러난다. 실낱같은 것들이 뭐가 그리 좋다고, 여기까지 끌려왔나 싶다. 그런데 이만큼 포근히 눕혀주고 길을 깔아주니, 그냥 지나치는 것도 예의가 아니지 않은가.


첼로가 긴 숨을 내쉰다. 예전에는 이런 선율 속에서 무엇을 들어야 할지 몰랐는데, 이제는 매 순간 녹아든 사람의 손길이 보인다. 결국 악기를 품은 건 연주자가 아닌가. 그 위에서 무엇을 내려놓아야 할지 스스로 힘을 주고 펼쳐내야 한다. 오늘의 연주자는 무심하지도, 마냥 다정하지도 않게, 새카만 선율 속에 은은한 빛가루를 흩뿌려 넣었다.


세 명의 3악장은 울먹이지도, 애달프지도 않다. 위로를 강하게 건네지도 않고, 안아주지도 않지만 그저 앞에 있음으로 안식이 된다. 1:02:19, 높이 날던 소리가 1:02:29 낮게 머무니 귀가 저절로 기울여진다. 1:04:06, 떨리는 소리가 들리는가. 1:04:54, 그어지는 마음이 보이는가.


IV. Finale: Allegro — 피날레: 빠르게


그 마음을 곧장 이어받는 마지막 악장이다. 순간적 몰입을 이끌어내는 힘이 참 좋다. 큰 그림을 그리다가도 이내 멀리 가 있으니, 지나온 악장들이 모여들어 조급하지 않게 발걸음을 맞춘다. 마음이 가장 편안해진다.

그냥, 가만히. 구경만 하면 된다. 속 편하게. 이만큼 알아서 펼쳐 보이니 보는 재미가 있다. 그 순간을 즐기다 보면, 높이 치켜든 팔들과 함께 곡의 끝을 맞이한다.


앙코르. 프리츠 크라이슬러 – 쿠쿨레인에게의 작별(Londonderry Ai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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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어?, 아…(힝).” 왜 나는 이 기다란 소리에 세 번이나 숨을 들이마셨을까. 첫 번째 ‘아’는, 어 이 곡은? 두 번째 ‘어’는, 어… 들어본 적 있는데. 이어진 기다란 ‘아’는, 내가 무척 좋아했고 가장 안정이 필요했을 때 곁에 두었던 곡임을—첼로의 흐름을 바이올린이 이어받을 무렵 깨닫고 말았다. 그 순간, 나는 또 묘한 감정에 휩싸였다. 아니, 꼭 이렇다니까.


당신은 ‘Danny Boy’라는 곡을 아는가? 나는 주로 리베라 합창단 버전으로 많이 들었다. 이 곡을 들으면 이래저래 생각이 많아졌다가도, 마지막엔 마음이 조금은 차분히 가라앉곤 했다. 그런데 오늘 이렇게 공연장에서 갑자기 재회할 줄은 몰랐다. 너무 반가우면서도 당황스러웠다. 과거와 현재가 이렇게 '운명'처럼 이어지니까... 나도 모르게 말 한마디를 내뱉고 말았다.


“아융, 진짜 너무 감사하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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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이렇게 이어지지 - 밤 9시가 지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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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9시 반이 넘어가던 시점, 공연이 끝이 났다.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오늘 찍은 사진들을 되짚어 보며 가방을 챙기지... 않았다! 왜냐고? 하콘의 묘미, 와인 파티가 있지 않은가.


이 파티는 당신이 생각하는 멋들어진 ‘와인 한 잔’이라기보다, 오늘의 연주자들이 마룻바닥에 다시 등장해 사인도 받고, 잠깐 인사도 나누며 동행과 여유를 가질 수 있는 ‘공간’을 내어주는 시간에 가깝다.


나도 처음 하콘에 왔을 때는 극내향인으로서 ‘와인 파티’라는 단어 자체에 겁먹어 도망치기 바빴다. 그런데 낯가림보다 ‘저 연주자에게 칭찬해! 사인 받아!’ 하는 마음이 먼저 앞서면서, 내향성이 잠시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더군다나 오늘은 칭찬거리를 왼쪽 주머니에, 사인 받을 편지지를 오른쪽 주머니에 넣어두지 않았던가. 건네드릴 꽃다발은 지금 열심히 적고 있으니(진짜 지금), 나는 얌전히 오늘의 주역들을 기다렸다.


기다리는 틈에 하콘의 김보연 사진작가님과 짧게 대화를 나누며 오늘의 사진을 살짝 보여드렸는데 어머, 칭찬을 받았다. (맞다, 이건 자랑이다) “오, 느낌 있는데요?” 그냥 해주신 말이었을지라도 흐흐, 기분이 좋았다.


연주자가 빠르게 움직일 때의 역동적인 순간을 어떻게 담는지도 여쭤봤는데, 셔터 속도를 느리게 조절하면 된다는 꿀팁까지 알려주셨다. (그럴 카메라는 없지만…)


사실 오늘 옆자리에는 어린 숙녀분이 앉아 계셨다. 공연 전 얌전히 좌석에 앉아 계시길래 몇 마디를 나눴는데, 알고 보니 첼리스트 김정아 선생님이셨다. 클래식에 무지하고, 편협하게 늘 보던 것만 보던 내가 못 알아본 게 원통스러워, 그분의 명성을 알려주신 분께 괜히 하소연했다. “아니 그런 건 좀 빨리 알려주세요 (ㅠㅠ 으헝헝).”


김정아 선생님, 인사 나눌 수 있어 기뻤습니다…


사람 얘기가 나오니, 오늘의 관객석 장면도 떠오른다. 아마 브람스 1악장 때였을까. 꽉 찬 마룻바닥 위로 누구는 연주자를 부드럽게 응시했고, 누구는 바닥을 내려다보며 소리에 집중했다. 저 끝자리에서 몰입하던 아이도, 잘 안 보인다며 고개를 갸웃거리던 사람도 아직 기억난다. 시원한 계절, 개운한 온도 속에서 포근한 담요 하나 덮고 함께 모여 있었으니,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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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하콘에는 귀여운 포인트가 잔뜩 늘어나 있었다. 스태프분이 폴라로이드를 들고 와 “한 장 찍어드릴까요?” 하고 묻기도 하고, 방명록 작성도 권유해주셔서 심심할 틈이 없었다.


반가운 얼굴도 많았다. 나의 최애는 물론이고, 이든의 가족분들과도 인사를 나눴다. 잠깐 사이에 궁금했던 안부를 여쭙고, 이곳이 아니면 들을 수 없었을 소식도 전해 들었다. 왜 그 곡을 택하셨는지, 다음 연주와 향후 일정도 여쭤봤다. 정말— 하콘이 아니면 어디서 이런 기회를 누리겠는가. 이 공간을 사랑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이제 조명을 다시 연주자들에게로 돌려볼까. 반갑게 이야기를 나누며, 마음속에 쌓여 있던 단어들을 막, 여러 번 건넸다. 왜냐? 칭찬은 아끼는 게 아니니까. 내가 느낀 ‘색감’을 말로 전하고, 기쁨이 되었던 악장을 언급하면 이리도 기뻐해주시니 마음을 담아 소리를 듣지 않을 수 없다.


하콘 블로그에서 본 말이 떠오른다. “현재와 과거 사이에 끊임없이 이루어지는 해석의 교환이 필요하다.” 당장 과거가 되어버린 연주를 지금의 내가 해석해 전하는 것이니, 나도 잘하고 있는 거겠지? (흐흐)


전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말주변이 부족해 같은 말만 반복하는 느낌 아는가? 이럴 땐 중요한 키워드 위주로 전하면 좋다. 이를테면, 밤하늘 같으시다… 소리가 어쩜 그렇게 새카마세요… 빛이 나요… 내가 좋아하는 소리예요… 어쩜 그렇게 새초롬하세요… (진짜 거의 생귤탱귤 같아, 이건 말 못했다).


결국 유빈님께는 같은 말을 두 번이나 했다. “어쩜 그렇게 소리가 새카맣고, 밤하늘 같으세요.” 그리고 당신의 눈에 빛이 나는 걸 본인은 아시냐고, 그 말만은 잊지 않고 전할 수 있어 다행이었다.


말에 귀기울이며 내 손끝 하나를 꼭 집어 쥔 그 손과 눈길을 기억한다. 어찌나 동글동글하게 바라보시던지. 무대 위 프로는 어디 가고, 그렇게 날 보시면 다음에 또 올 수밖에 없잖아요?


거기다 내가 부탁드린 사인지는 꼭 이렇게 고심한 답변을 적어주신다.


“난 이제 유진님한테 뭘 써드리려 하면 고민돼…(positive)”


뭘 하든 밖에다 내려놓으니 곤란하시죠? (호호) 그래도 어쩌겠나. 나는 자랑을 해야겠다! 아— 나 사인 받았다!

20250924154329_dwdwyhhq.jpg ⓒ 유진

팬이라면 사인을 받은 뒤 뭘 해야겠는가. 사진을 찍어야지. 가장 인생샷을 많이 찍어드린 분께 부탁드리려다, 결국 함께 기념사진을 찍는 것으로 합의했다. (사진은 내가 찍는 것으로) 주인공들에게 두 손 모아 반짝반짝 빛을 건네드리고 나니 오늘의 하콘은 끝까지 웃음으로 가득했다.


이러니 욕심이 생겨 작은 부탁을 또 드렸다.


“저희 손 사진 찍어요!”


다정한 그들은 과연, 어떻게 응해주셨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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짠! (최애 왈: 무슨 팀 같은데요)


4. 다시 이곳에서

20250924155041_nilezusp.jpg ⓒ 유진

늦은 밤, 혜화역으로 향하기 전, 우리는 곧 찾아올 다음을 눈과 마음으로 기약했다. 공연 하나가 끝났는데 또 다른 기대가 차곡차곡 피어난다.


무슨 글을 쓰게 될까? 다음엔 어떤 공연일까. 어떤 레퍼토리일까. 갈 수 있을까? 예술가의 집을 나오기 직전까지, 재미난 말도 많이 전해들었다.


“어떻게 글을 (양손을 위아래로 촥 늘이며) 그렇게 쓰세요?”

“정독하고 있어요.”

“그게 맞죠.”


그 말을 되새기며 크라이슬러의 Londonderry Air를 음원 사이트로 찾아 들었다. 상냥한 하콘 스탭분들은 유튜브로 앵콜 곡 제목까지 빠르게 알려주셔서, 공연의 끝을 곧장 되새길 수 있었다. (짱!)


이 곡이 연주자들에겐 그저 앵콜곡이었겠지만, 내겐 잊었던 안식과 지난 날의 아련한 추억이었다. 내가 무언가를 좋아하는 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 믿으며 그 본질을 찾으려 했을 뿐인데, 운명처럼 내 안의 무언가와 맞닿는 선물을 받을 때면 마음이 묘해진다.


더군다나 요즘의 나는 글을 쓰고 있지 않은가. 평소라면 하지 않았을 기다란 생각들로 문장이 이어졌다.


내 글이 당신의 또 다른 오늘이 될 수 있을까? 그럴 수 있다면 더없이 기쁠 텐데. 가장 밑바탕부터 내밀한 이해를 받는 기분을, 당신도 느낄 수 있을까?


이런 문장을 나열하고, 기대하지 않았던 선물을 나누고, 우연이 인연이 되어 당신의 어제가 내겐 오늘이 되고 있으니, 우리는 지금 꽤 낭만적인 삶을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너는 나의 기대였는데, 나도 너의 기대가 될 수 있구나. 홀로 글을 쓰기 시작한 일이 퍽 기뻐졌다. 결국 우리는 소리로 만나, 소리로 이어졌구나.


오늘의 기대로 앞으로를 채워나간다. 이 어리숙하고 유치해 보이는 시선 안에서 미처 전하지 못한 한 마디를 나눠본다. 뭘까?


그냥, 이대로 웃으면서, 곧 봐요.

그거지 뭐! (웃음)


2025.09.25.

함안으로 향하는 기차 안에서 이 글을 내려놓으며

유진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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