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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슈베르트를 내게 알려주세요

[공연 에세이] 2025 서울국제음악제 ‘German Dance’

by 유진

1. 배움의 기회는 불현듯 찾아오기 마련


아트인사이트 에디터 활동을 마무리하고, 이제 ‘컬쳐리스트’라는 이름으로 글을 쓰기로 약속한 바로 그 전날, 10월 31일. 나는 생애 처음으로 31일의 밤을 밖에서 보내고 있었다.


무엇을 했더라? — 당연히 공연을 봤다. (당당) 그 주 화요일, 나만의 두 번째 클래식 교습소에서 ‘서울국제음악제’ 공연을 보러 오지 않겠냐는 제안을 받았던 것이다.


예술의전당 음악당 안, 리사이틀홀 바로 맞은편에는 ‘예전레코드’라는 음반 가게가 있다. 그곳에서는 종종 “공연을 보러 오지 않겠냐”고 물어봐 주시곤 했다. 그럼 나는 뭐라 답했겠나? “땅연하죠!!” (기쁨 지수 100%)


31일의 공연을 지나온 지금, 나는 한 가지 사실을 단호히 확신할 수 있게 되었다. 그들이 제안하는 공연에는 필시 이유가 있다.


가끔 그런 류의 공연이 있지 않은가. 내 클래식 세계에 거대한 첨언을 남기고, 배울 점이 지나치게 많은 순간들을 선사해주는 공연. 이전에 초대해주셨던 김응수와 카메라타 솔의 ‘겹의 미학’, 그리고 가이스터 듀오의 무대도 그러했는데, 이번 서울국제음악제 'German Dance'도 마찬가지였다. 나보다 훨씬 성숙한 사람들이 안내해주는, 즐겁고 유익한 클래식 세계가 너—무나 다채로웠다.


보기 전에는 ‘도대체 무슨 재미가 있으려나?’ 싶다가도, 공연 1부가 끝나기도 전에 느낌이 온다. 아… 너무 감사한데?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공연을 보고 나면, 끊임없이 문장을 굴릴 수밖에 없는 연주들이 한가득 펼쳐진다.


무엇보다 서울국제음악제는 클래식을 좋아하며 알음알음 들어보았던 연주자들이 한가득이지 않던가. 마냥 기대감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사실 공연이 시작되기 전, 무엇보다 감탄했던 점이 하나 있다. 아니— 내가 겪었던 음악제 중, 가장 관객에게 친절한 음악제였다! 거대한 황갈색 벽에는 곡명은 물론, 각 악장의 제목까지 악장 진행에 맞춰 안내해준다. 일반 관객이 헷갈릴 틈이 없었다. (말도 안 돼!)


프로그램북은 관객의 편의를 고려해 핸드폰보다 작은 책자 형태로 비치되어 있었고, 모바일로 프로그램 노트를 볼 수 있도록 노션(Notion) 링크까지 제공됐다. 드디어, 일반 관객을 가장 염두에 둔 축제를 만났다!


무대의 퀄리티는 이미 파인다이닝인데, 친절도는 거의 백화점 서비스급이다. 이 정도면 다과만 안 챙겨줬지, 거의 다 떠먹여준 셈이다. 그래, 클래식계 사람들만의 축제가 아니라 일반 대중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얻으려면 이 정도 성의는 보여야 한다. 그 정성에 나는 크게 감동했다. (따흑!)


2. 인정하자. 클래식은 번거롭다.


그럼에도 클래식은 여전히 큰 장벽이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 31일의 레퍼토리만 봐도 그렇다. 현악 4중주도 낯설어 죽겠는 일반 관객들에게 대뜸 베토벤의 6중주, 멘델스존의 8중주, 슈베르트의 5중주라니. 클래식 애호가라면 친숙할지 모르겠지만, 나는 티켓 제안을 받고서야 그 곡들의 존재를 알았고, 당일 아침이 되어서야 세 곡을 예습하기 시작했다. 공연장에 들어가기 직전, 마지막으로 슈베르트 5중주의 마지막 악장을 듣고 있었으니, 말 다 했다.


미리 듣는다고 뭐 달라지는 게 있냐고? 없다. 들어도 뭘 듣고 있는 건지 모를 때가 많다. 협주곡이나 기승전결이 뚜렷한 소나타는 듣다 보면 이상하게 외워지는 구석이 있는데, 이렇게 냅다 던져지는(?) 몇 중주 곡들은, 특히 내 세계에서 아직 낯선 작곡가들이면 더 어렵고, 귀에 잘 안 익는다.


그 사실을 애써 무시하며, 그냥 듣는 것이다! 흐릿한 안갯속을 헤매더라도, 어딘가에서 무언가가 그어져 나가고 있다고 어림짐작하며, 딴짓을 하며 듣는다. 안 들린다고 해서 연주자들에게 모든 설득을 바랄 수도 없는 노릇 아니던가.


공연을 다니며 깨달은 한 가지가 있다. 그날의 레퍼토리를 단 한 번이라도 귀에 노출하고 가는 것과, 아예 무지한 상태로 가는 건 하늘과 땅 차이라는 것이다.


그 차이가 언제, 어떻게 나타나는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관람 경험이 쌓이면서 확신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냥… 뭔지도 모르면서 계속 들었다. 가끔은 꾸벅꾸벅 졸아가며, 반숙란을 냠냠 까먹으면서. 막연해도 은연중에는 믿음이 있었다. 그들이라면 나를 설득해줄 거라고. 그 세 작곡가가 나와 친구가 될 수 있도록 도와줄 거라고.


이번 공연은 특히 베토벤, 멘델스존, 슈베르트의 앙상블을 듣는 내내 궁금한 것들이 자꾸 쌓여갔다. 배울 점이 많았던 공연이 아니었던가. 그래서 이번 기회에 그 물음표들을 추억해볼 겸, 죽— 나열해봐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무엇을, 그들에게 묻고 또 물었던가?


3. (나한테만) 첫 서울국제음악제 – 도대체 여기서 어떻게 춤을 추니?


베토벤: 육중주 내림마장조 Op. 71


I. Adagio — Allegro — 느리게 — 빠르게


구름을 만드는 일인가? 관악기는 뭉게뭉게, 몽게몽게, 뭉글뭉글인가? 꽤 개성이 강하구나. 선생님들, 뭔가 소리를 모락모락 피워내는 게 관악인가요? 음색이 또렷해도 따뜻해도, 위로 또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볼록하게 긋는 선을 와이파이처럼 그어 나가는 게 관악일까요? 바순이 참 포근한 악기구나. 빡빡하게 흐름을 만드는 건 아니지만, 꽤 꼭꼭 구역을 채워나가 주니까 마음이 편안하고 든든하다.


맨 왼쪽 끝에 앉은 연주자의 손 안 움직임을 가까이서 볼 수 있어서 좋았다. 숨을 맞춰가는 타이밍도 포착할 수 있었지. 실제로 ‘호흡을 맞추는’ 장면은 여러 번 봤지만, 진짜로 ‘호흡을 함께 나누는’ 순간을 바로 눈앞에서 본 건 처음이었다.


높은 곳에 위치해 소리의 포인트가 되어주고, 중간에서는 두구두구 귀여운 발재간을 보여주며, 나긋한 안갯길을 그려냈다. 코랄빛 하늘도 있고, 바람도 불어오고, 춤추는 사람도 그곳에 있었다. 관악은 원래 부드러운 마음만 같은 걸까나.


II. Adagio — 느리게


맛있는 브런치를 한아름 먹고 나서 배를 통통 두드리는 사람이 여기 있다. 노곤노곤한 기색이 가득한 귀여운 것들도 이 곳에 있다. 바순일까나. 시원한 바람이 아니라 하얗고 몽실하고 기다란 구름인 것이다. 몽글몽글. 나랑나랑. 이렇게도 한 발자국. 저렇게도 한 발자국. 클래식의 선율을 이용해 듣기만 해도 미소가 따라오는 동요를 듣고 있는 기분이다. 마음을 콩콩콩콩 두드려주는 때도 있네. 소리가 뾰족하지 않고 동그랗게, 웅얼웅얼 울려 퍼져줘서 좋다. 사그라들 때도 보드라워.


III. Minuet. Quasi Allegretto — Trio — 미뉴에트(알레그레토에 가깝게) — 트리오


장난기를 머금어 줘서 좋다니까 저 호른은! 기색도 씩씩하다! 나만의 엉뚱한 난쟁이 아저씨들이 바로 저들이다! 저들이 쿵쿵쿵 바닥을 포근한 신발로 두들겨주니까, 높은 두 가지의 음들이 더 무지개를 묘사함에 거침이 없다. 칙칙폭폭 장난감 기차의 재미난 엔진 소리 같기도 해! 솜뭉치들의 팡팡퐁퐁 소리인 것이다!


IV. Rondo. Allegro — 론도(주제 반복) — 빠르게


조금 더 속력을 올려볼까? 세 가지의 것들이 겹겹이 예쁜 것들을 서로 열심히 위로 또 위로, 옆으로 또 옆으로 피워낸다. 경쟁이 어디 있는가? 신나게 뚱땅뚱땅 앞으로 나가기도 바빠 죽겠는데! 쟤가 윗자리를 채워놓아야 함은 분명하고, 자잘하게 빛가루를 바닥에 뿌리기에도 시간이 모자라다! 베토벤의 관악 육중주는 이런 느낌이구나. 이리저리 곧은 기색이 왔다 갔다 하니까 재미나네?


멘델스존: 현악 팔중주 내림마장조 Op. 20


저 대각선 앞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다. 그게 시작점이었다.


틀림없이 저 무대 위로 무언가가 펼쳐지고 있는데, 이걸 어떤 단어로 표현해야 할지 감이 잘 오지 않는다. 호흡일까, 흐름일까, 압박일까, 순간일까, 아니면 광경 혹은 현상일까.


좋은 연주란, 연주자들이 호흡을 맞추기 이전부터 이미 존재해왔던 것들에 거울 하나를 들이밀어, 그것을 관객의 눈앞으로 비춰내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I. Allegro moderato ma con fuoco — 절제된 빠르기, 그러나 불꽃처럼


방금까진 없던 것들이 탄생하기 시작한다. 그 생경한 기운이 내 안면 위로 드리워진다. 뭔가 ‘합이 대단히 잘 맞는다’는 말로는 도저히 다 설명할 수 없는 순간이다. 너무… 너무… 너무…


널찍하면서도 융통성이 있는 앙상블이라니. 관객보다 훨씬 거대한 흐름을 쟁취해내는 방법은 대체 무엇일까. 내 시간보다 훨씬 오래 살아온 소리가, 거기 있었다.


여덟 명이 함께 연주하고 있는데, 왜 한 사람 같을까? 어떻게 이만큼 다정할 수 있나? 멘델스존이 원래 이런 작곡가였던가? 첼로는 거대한 둥글거림을 품은 악기였던가. 말문이 막혔다. 저 앞에서 대단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데, 이걸 어떻게 붙잡을 수 있을까. 그들이 그려내는 그림은 선명도가 과할 정도로 분명했고, 각 선의 채도가 너무 높아서 아득했다.


바이올린 한 대와 함께하는 그림자가 이만큼 강력한데 은은하다고? 마이크를 악기별로 숨겨둔 게 아닐까 싶었다. 음향이 이렇게까지 좋은 공간이었어? 이 홀을 이만큼이나 활용할 수 있구나. 나는 지금 옆방에 콘서트홀에 온 줄 알았다. 오케스트라 아니야? 8명 맞아? 8명이서 웅장해질 수 있는 거에요? 사람보다 소리가 엄청 거대하다.


근데 그들의 표정을 보면 그냥— 익숙하게, 기본 디폴트인 것 마냥 자기 할 일 하시느라 집중하고 계신다. 백나영 첼리스트께서 순간마다 웃어주시지 않았으면 낭떠러지에 떨어질 뻔했다. 뭐가 다른 거지? 뭐 때문에 시선이 빼앗기는 거지? 합이 잘 맞는다 수준이 아닌데. 멘델스존의 후예들인가? 소리가 막 관중석에 쏟아져. 세 열로… 서사적인데 낭만적이고 진취적이고... 잠이 번쩍 깼다.


폭풍만 같다. 엄청나게 거센데, 그렇다고 휩쓸릴 정도는 아니다. 황홀하고 장중하다. 교수님들의 워크숍에 단단히 잘못 들어온 걸까. 내가 지금 뭘 듣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듣고 있는 건 맞는가? 자꾸만 무언가를 보게 된다.

초점은 연주자에게 맞춰졌다가 허공을 응시했다가, 맨 앞열 관객에게 머물렀다가 악기에도 닿았다가, 끝끝내 다시 원점으로 돌아온다. 치밀고, 솟구치고, 터지기 직전까지 이른다. 이게 겨우 1악장이라고?


지금 공연을 끝내도 충분할 것 같다. 너무 — 너무 — 사랑이 충만해. 귓청이 뜨거운데 능숙하게 다뤄내서 그 능숙한 발걸음이 나를 작게 만들어. 내가 작아져. 흐르는 길목 자체에 사람이 없고, 노래만 있어. 인간미는 기운으로만 어려 있고, 소리가 앞으로 나아감에 있어선 개별 존재가 하나도 안 느껴져. 8명이 있긴 한 건가.


사람이 만들고 있는 건 분명한데—

이거, 아무도 없는 거 아니면 오케스트라 공연 아니야?


II. Andante — 느리게, 부드럽게


어떻게 하면 이렇게 하나가 될 수 있어요? 바람 한결이에요? 왜 온난한 기운으로 소리가 전달되는 거죠? 왜 저 악기와 이 악기 사이의 여백이 느껴지지 않아요? 왜 악장을 시작하였는데도 그 시작점이 느껴지지 않게 자연스럽게 나타날 수 있어요? 갑자기 강해지는데도 왜 부담스럽지 않아요?


타이밍이 왜 이렇게 잘 맞아요? 그 타이밍이란 게 정확히 들어맞으면 이런 소리가 나는 거에요? 마음이 이상해! 실크 옷자락을 이리저리 손바닥으로 쓸어보는 기분이에요. 비브라토를 적절히 생략했나요? 왜 다들 파들거리지도 않고 담백해요? 엄청 감정적인데 왜 냉정하게 잘해요? 첼로의 두드림이 왜 거대해요?


중얼거리는 사람이 한 명도 없어요. 같이 흐느끼고 같이 파도를 타고 같이 노래를 불러요. 어떻게 춤을 춰요? 다들 누구세요? 무슨 그림을 그리고 계세요? 소리만 들려서 잘 상상이 안 돼요. 갑자기 확 뒤로 물러나면서 농익어졌다가 왜 이만큼 가까이 왔을 땐 솜사탕만 같아요?


하나가 노래하면 금세 두 번째가 뒤따라오고, 세 번째가 또 연결되고, 지나치게 듣기 좋은 꼬리물기식 표현들이 이어지는데 당황스럽다. 이 홀 안에서 이정도까지 황홀해도 되는 건가요?


딱 손가락 하나씩 접었다가 다시 펴는 그 속도만큼의 것들이 세차게 밀려온다. 근데 왜 부담스럽지가 않은 거에요? 첼로 소리는 오늘따라 내가 아는 것보다 확장되었나요? 누르는 방법이 달라요? 왜 울기 싫은데 이 안으로 파고드는 것들이 있어요? 서서히 쌓아오는 마음들은 뭔가요?


아까의 그 열 손가락보다 낮은 자리에서 왜 자꾸만 피어올랐다가 제멋대로 내려가버려요? 능숙한 디바가 혼자— 무대 위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는 것만 같아요. 8명인데 왜 홀로 행하는 것만 같아요? 외로운 사람이 있고, 그를 지켜보는 소리들이 이만큼 가득해요? 뒷그림자가 이만큼 광활해도 되는 건가요?


여긴 바로 옆 콘서트홀보다 작은 공간인데 왜 소리는 공간보다 거대한 거에요?


III. Scherzo — Allegro leggierissimo — 아주 가볍게, 빠르게


갑자기 시작해버리면 듣고 있는 우리는 어떡해요? 저 세계에 빨려 들어가는 기분. 뒤쫓아가고 싶은 욕심. 아니 속도가 빨랐다가 느려지는 그 길이 왜 능숙해요? 그 사이의 간격을 조절하는 능력을 쌓아가는 게 음악가의 삶이에요? 내가 지금 연주를 보러 온 건지, 저 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광경을 목도하러 온 건지.


당최 구분이 안 가요. 도대체 뭐 하는 사람들이에요? 악기에 진심인 사람 여덟이 모이면 이런 일이 일어나요? 지나치게 한 사람, 한 사람이 지나치게 고악기다. 산책 나온 사람들처럼 편안한 표정을 짓고는 저렇게 그어버려요? 혹시 지금 보이지 않는 각자만의 녹음실에 들어와서 레코딩을 하고 있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완성도가 높아요.


멘델스존은 품격 있는 작곡가인가요?


IV. Presto — 매우 빠르게


첼로가, 이야. 이게 뭐지. 내가 뭘 보고 있는… 이야; 뭐지. 아 당황스럽네. 진짜 — 뭐지? 약간 그리스로마신화에서 지하세계에 사는 분 악기 하나 훔쳐와서 번개랑 음악 대결 벌이는 광경을 목격하는 기분이랄까. 프레스토가 아니라 메가 프레스토.


도대체 이건 뭐지? 8명이 아니라 80명 아니야? 진짜 귀가 멍멍해지고 시선이 아득해지는데, 첼리스트 한 분이 싱긋 웃고 마신다. 아, 이게 맞나? 이 정도가 기본이라고? 들려오는 게 다채로워서 귓청이 터질 것만 같다. 다시 묻건대, 나 지금 콘서트홀에 있는 거지? 8중주가 이런 거야?


멘델스존이 와서 한 번 듣고 가야 하는 거 아니에요? 왜 몸의 힘은 다 안정적으로 풀어져 있으신데, 소리는 이렇게 기세가 세죠? 무지개도 이런 식이면, 보자마자 눈이 멀겠다. 서울국제음악제는 원래 이 정도의 수준인가요?


곡이 끝나자마자 관객석의 분위기로 이 곡의 완성도를 느낄 수 있었다. 와…


슈베르트: 현악 5중주 다장조 Op. 163, D. 956


I. Allegro ma non troppo — 빠르지만 지나치지 않게


천천히— 조급하지 않게— 그리고 높게— 슈베르트를 그려볼 것. 지체하지 않고 생동감을 이곳에 쟁여놓는 건가요? 참 똘망똘망하고, 색다르게 씩씩하다. 그러다가도 자애로움을 잊지 않는다. 민트색과 연두빛이 깃든 바람도 그려낼 줄 아는 사람일까? 아주 옅은 노란색도 스치듯 보이는 것 같기도 하다.


한 발자국, 두 발자국. 첼로가 이정표를 그려주는 순간에도 가볍지만 꿋꿋하게 나아간다. 쿵쿵쿵. 쿵쿵쿵. 쿵쿵쿵. 피치카토가 이만큼 듣기 좋은 걸 다들 알면 좋을 텐데. 뒷길에서 나풀거리는 아지랑이도 그려주네. 아— 평화롭다. 하늘이 맑은 날인가 보다. 먹구름이 걷히는 건가?


은근히 농익은 느낌도 몇 방울 정도 쟁여가는구나. 청년일까? 꼭 되돌아오는 선율들이 왜 지겹지 않고 반가울까? 소리의 집중도가 높아서일까? 흘러가는 그 흐름이 구체적이고 입체적이면 나도 모르게 시선을 한참 빼앗기게 된다. 어떻게 시간 가는지도 모를 만큼.


왜 여러 겹의 형태로 소리를 구성해놓았을까? 마음을 소박하고 눈부시게, 살살 달래주는 마음씨를 지닌 게 슈베르트인가? 뭔가 바흐의 곡을 들었을 때 느낌이 든다. 뭔가 차곡차곡, 소리의 결을 채우고 쌓고 이어나간다. 아주 정돈된 형태로. 웃음을 한아름 띤 채로.


몽글몽글— 엄청 따뜻한 모양새로도 피워 올리네. 둥글둥글, 망글망글, 빙긋이 웃어주는 첼로가 있으니 마음이 엄청 든든하다. 봉우리에서 서서히— 꽃잎이 피어나기도 하는구나. 슈베르트는 정이 많은 사람이에요? 웃음이 많은 타입이려나.


갑자기 폭풍우가 들이치는 순간이 있다. 그렇다고 길게 암울해지는 게 아니라 한 번의 집중도를 확 이끄는 정도겠다. 비 온 뒤 개운한 맑은 하늘마냥 분위기를 환기시킨 뒤 이별했다.


II. Adagio — 느리고 서정적으로


오늘의 킥은 진짜 첼로 소리에 있겠다. 아래로 망울지는 소리들이 따뜻할 수 있나? 밑바탕이 든든하니 위로 아무리 높게 날아올라도 안정됨이 가득하다. 하나를 딱 붙잡고 두 발씩 나아가는 길목이 여기 있다. 그 선장의 역할을 분명히 해주니 마음껏 내뻗어도 된다. 하프 소리도 들려온다.


이만큼 명상적인 악장이 있을 수 있을까? 듣기만 해도 잠이 올 것 같은 밑선이 중간 지대에 끊김 없이 이어지는 게, 그게 딱— 뭔가— 아무 생각 없이 듣게 되는 공명 소리만 같다. 사람의 정신을 그 상태로 부여잡아버리는 파동이 거기 있다.


내가 듣고자 하지 않아도 소리가 양 귀로 들려오니 그 자체로 뭔가에 홀린 듯 몰입이 되는 것이다. 지금 무엇에 따라가고 있는지도 모르겠지만 이 기다란 것들이 분위기의 중심을 형성하고, 바이올린이 나보다 한참 위에서 시선을 빼앗는다.


그러다, 갑자기 휘몰아치는 감정선들이 여기 있다. 어, 갑자기 무슨 일이지? 싶을 만큼 갑자기 응축된 것들이 한아름 모여들어 대각선 방향으로 끊임없이 상승하기 시작한다. 뭔가를 계속 모아가는 사람이, 붙잡아 놓는 것이 슈베르트인가요? 아까의 그 씩씩함은 여전하지만 어느새 슬픔을 알아버린 이가 여기 있다. 이만큼 성숙하다고? 다뤄내는 이들이 능숙해서일까? 딱 일자 형태보다 살짝 기울어진 각도 정도로 ///// 소리가 밑바탕을 지키고 있다.


울먹일 틈을 안 주려고 그러는 건가? 정신 차리라고 어깨를 흔드는 건가 싶기도 하다. 물속 안에서 웅얼거리는 숨자락의 먹먹함을 닮아 있기도 하다.


이봐, 따뜻한 사람인가 봐. 슈베르트는. 왜 자주 사람을 품에 들여줘요?


단 한 번도 누구를 외면하거나, 놓고 지나치지를 않네. 바이올린이 먼저 가 있으면 첼로가 뒷길을 기다랗게 그려놓는다니까요. 왜 여분을 이리 많이 나눠줘요? 예측 가능한 흐름이라서 좋아. 높은 노래를 부르면 꼭 하프가 따라와서 응원해준다니까.


이 안정됨이 사람을 편안하게 가라앉게 만들어준다. 충분히 내려앉을 수 있도록 그들이 서서히 곁으로 다가온다. 생글생글 웃으면서, 여유를 지키면서, 편안하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놀라지 않도록, 제자리로 돌아올 수 있도록. 담백하게도 노래한다. 어떻게 이렇게 끊임없이 바라봐요?


III. Scherzo. Presto — Trio. Andante sostenuto — 매우 빠르게 / 느리고 지속적으로


이봐, 언제 비가 내렸냐는 듯 햇빛을 막 사방으로 쏟아낸다니까. 무조건적인 어둠이 성립할 수 없는 공간인가? 먹구름 뒤에 딱 붙어 있는 빛자락이 여기 가득해요. 부족함 하나 없이 희망을 들여다 놓는구나! 왜 저 / 형태는 생기를 머금고 있어요? 미묘하게 악기별로 타이밍이 안 맞는 듯 일부러 엇갈리게 짜둔 부분은 왜 그렇게 해둔 거에요? 마음 흔들리게!


소리가 양 볼에 바람을 빵빵 넣고, 기운차게 계속— 앞으로 걸어나간다. 예쁜 소나기를 반복해서 내리더니, 다시 밑바탕을 묘사하기 시작하는 순간이 있다. 땅에 귀를 가져다 놓을 시간인가 보다. 차가운 기운은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처럼, 눈을 꼭 감고는 젖은 땅바닥에 제 귀를 가져다 대는 사람이 있는 것이다.


2악장에서 든든히— 중심부를 지키고 있던 긴 선들이 여기로 다시 되돌아왔다. 나보다 아주 살짝 아래에서 부드러운 노래를 부른다. 왜 이렇게 감싸줘요! 열외되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다. 누구 하나 놓고 가려는 의도 자체가 없으니, 주저앉아 있다가도 슬그머니 흐름에 합류하게 되는 것이다.


다 챙기고 나면 다시 양 볼에 바람을 빵빵 넣고, 기운차게 계—속 앞으로 걸어나간다. 성장의 아이콘인가요? 왜 이렇게 소년미가 가득해요? 그의 양손을 붙잡고 있는 친구들이 자꾸만 연상된다. 이 소리 안에서는, 외로운 사람이 있을 수 없다!

IV. Allegretto — 조금 빠르게, 밝게


카리스마 있게 진두지휘하는 소리들이 저기 있다. 깃발을 손에 들고 있는 걸까? 어디로 향하려는 걸까. 사방에 흰 구름이 가득 들이쳐진 하늘을 배경으로, 들푸른 언덕 위를 반드시 지나가리라. 한들—한들— 기분 좋은 봄바람도 이들의 곁을 지킬 것이다. 그렇게 그들이 묘사하고 있다.


멀어질래야 멀어질 수 없고, 떨어질래야 떨어지고 싶지 않다. 이만큼 내 손안에서도 꽃이 피어날 수 있다고, 반복적으로 언질을 주는데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 내 안에도 풀이 자라날 수 있구나. 돋아날 수 있는 것들이 반드시 있다.


포기라는 게 없구나. 미소로 세상을 바라보는구나. 울적함에 머물러 있기엔 세상은 너무도 아름답다는 걸 일러주려는 사람의 이야기일까? 그럴까.


보다 속도를 내는 순간들이 있다. 집중도가 더욱 치밀하게 모여든다. 그들의 손을 따라가면 그만이다. 불안해할 필요 하나 없다. 당신이 아는 바로 그 정도의 평화를 가져다줄 것이다. 다른 결과치는 나타나지 않을 테니, 크게 동요할 필요 없다. 이 안에서 그려낼 수 있는 거대한 산봉우리가 분명 존재한다.


믿고 따라가다 보면 도착지가 어느새 눈앞에 드리워진다. 힘에 겨웠던 순간도 있겠지만, 그가 흘려낸 식은땀이 이제는 시원함을 가져다주는 맑은 물기운이 아니던가. 그 느낌을 잊지 않는다면, 이만큼 올라설 수 있음을 짚어주는 이가 여기 있다.


울적한 시절로 매일의 행복을 놓치지 말고, 순간마다의 여운을 감미롭게 즐길 수 있다면, 이 소리보다 훨씬 큰 사람이 될 수 있음을 자신 있게 선언해주는 이가 여기 있다. 마지막으로 달려가는 지금, 올라왔던 언덕 위에 주저앉아 미끄럼틀 마냥 타고 내려가는 사람들의 신이 난 얼굴들이 가득하다. 어찌나 꺄르르— 신이 나게 웃는지, 어린 날의 우리만 같다.


빛이 쏟아진다.

아, 거대한 마음이 가득하다.

꿈을 가진 사람들이 여기 있다.

슈베르트가, 그들이, 나에게 — 빛을 쏟아낸다.


4. 슈베르트. 슈베르트. 오, 슈베르트?

공연이 끝난 뒤, 예정된 약속을 위해 황급히 지하철로 향했다. 끝나지 않은 박수 소리가 뒤로 들려왔지만, 나를 기다리고 있는 친구와의 만남이 먼저였다. 현대인에게 짧은 뜀박질의 순간에도 필요한 게 무엇일까? 바로, 음악이지. 무선 이어폰을 귀에 꽂고 한쪽 이어폰의 막대를 꾹— 눌렀다. 그러자 아까 미처 다 예습하지 못했던 파트가 흘러나왔다.


"어!"

분명 공연 전에 들었을 때만 해도 한참 웅얼거리고, ‘이게 뭔 뜬구름이야’ 싶었던 소리들이 갑자기 선명도가 쫙— 높아져 있었다. 그새 이 곡과 나는 아는 사이가 된 것이었다. 공연 하나를 본 것일 뿐인데.


반신반의하며 황급히 다른 악장도 재생해보았다. 정말로 내 머리와 노래가 서로를 인지하고 있었다. 의심이 확신으로 바뀌자 푸하하— 웃음이 났다. 아, 진짜. 재밌다. 오늘의 연주자들이 나에게 이 곡의 선율을 각인시켜 준 것이다.


결국 외면하고 싶었던 귀찮은 진실을 제대로 마주해버렸다. 클래식과 친해지려면 고단한 청취 루틴을 반복해야 한다! 미리 듣고, 직접 듣고, 다시 듣고. 몇 번이나! 이미 수도 없이 그리 해왔지만, 이렇게 눈앞에서 결과물이 바로 나타나니 웃펐다. 클래식은 참, 한 번에 친해지기 어려운 존재다.


다만 확신할 수 있는 건, 내가 마음을 조금이라도 열고 다가선다면 그 짧은 눈맞춤 하나로도, 우리의 하루쯤은 가볍게 데려가 버린다는 것. 분명.


이번 공연에서 무엇보다 의미 있었던 것은, 작곡가 슈베르트와 제대로 된 첫 눈인사를 나눌 수 있었다는 점이었다. 그전에는 최애가 연주한 슈베르트의 〈화려한 론도 B단조〉 D.895 하나만 들어봤을 뿐, 그가 정확히 어떤 스타일의 작곡가인지는 잘 몰랐지 않았던가.


슈베르트의, 그것도 무려 현악 5중주를 지나온 지금, 그에 대해 다시금 물음을 던지게 되었다.


사실 나는 그를 느낌적으로만 알고 있을 뿐, 그가 어떤 마음을 지닌 작곡가인지는 아직 완전히 확신하지 못하는 상태였다. 이럴 땐, 무대 위의 연주자들께 한 번 더 여쭤보는 편이 낫겠지?


선생님, 그는 어떤 사람인가요? 따뜻한 사람일까요? 왜 우리를 이토록 많이도 안아주나요? 왜 이렇게 다정한가요?


선생님, 슈베르트를 내게 알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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