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 에세이] 이지윤 & 문지영 듀오 리사이틀
1. 사실, 와인이 무슨 맛인지 잘 모르겠다
이 소제목을 떠올린 건 머그컵에 소박하게 담아온 화이트 와인의 마지막 한 입을 털어 넣던 밤, 대략 오후 11시였다. 떠올린 문장을 하얀 페이지에 적기 시작한 건 새벽 1시였다.
시간이 조금 지나니, 왜 저 말을 나열했는지 그새 기억이 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한 입쯤 더 마셔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냉장고 문을 열었다. 누가 보면 애주가인 줄 알겠지만, 이번 한 잔의 목적은 단지 ‘왜 그렇게 생각했는가’를 되짚기 위함이었다.
성인이 된 지 꽤 되었지만 여전히 술맛은 잘 모르겠다. 친구들과 술집에 가면 어떤 술을 마실지는 늘 상대에게 맡긴다. A사와 B사의 미묘한 맛 차이? 모른다. 그냥 내 입엔 다 술이다. 제로 콜라와 일반 콜라의 차이도 잘 모르는 사람이 바로 나다.
나는 찔끔 따라온 와인을 마셨다. 굳이 입을 챱챱거리며, 모르면서도 아는 척을 했다. 음, 맛있진 않지만 미묘하게 쓰고, 술 냄새 같기도 하면서 향긋하기도 하다. ‘화이트 와인’ 하면 떠올릴 법한 그 맛이다. 얼음이 들어 있어서 적당히 시원해 그나마 마실 만하다. 술이라서 마시는 맛이라고밖에 정의할 수 없다.
이쯤 되면 너는 ‘도대체 잠도 안 자고 왜 마시고 있나?’ 싶을 것이다. 나도 공감한다. 하지만 적당한 심심풀이로 이만한 게 없다. 아마 당신이 내 컵 안을 슬쩍 보면, 곧장 내 얼굴을 쳐다보게 될 것이다.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에게~~~?” 하고 말할 법한 표정으로. 그래, 그 정도의 양이다.
이 쪼매난 걸 다시 마셔봐도 무슨 맛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한입들이 쌓이면 미묘하게 얼굴이 볼록— 앞으로 디용, 부어오르며 뜨뜻한 기운이 감돈다. 차가웠던 머릿속이 은근히 온기로 감싸이고, 생각이 스멀스멀 기울어지는 기분도 든다.
이 상태로 침대에 누우면 잠이 올 수도 있고, 옆으로 몸을 뉘인 채 핸드폰 속 세상을 헤매다 리포스팅 버튼을 잘못 누르고, 정정하는 바보짓을 반복할 수도 있겠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 보면 양볼에 머물렀던 홍시만 한 따끈따끈함이 천천히 사그라든다.
굳이 이 시간에 냉장고에서 얼음 몇 개를 꺼내 와, 소주 한 잔 분량의 와인을 하얀 머그컵에 따라내며 문득 생각했다. 오늘의 이 와인은 특정한 ‘상태’를 만나기 위한 하나의 통과 지점이 아닐까? 맛을 즐긴 것도 아니지 않은가. 이걸 마심으로써만 만날 수 있는 어떤 ‘상태’를 즐기기 위함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와인을 통해 나른함을 얻고, 잠깐의 몽롱함을 느끼면서 생각했다. 사람들이 이 음료를 왜 사랑하는지도 모르면서, 재미없는 지금을 그저 간편하게 해소하려고 잘만 이용했구나.
2. 사실, 브람스가 누군지 잘 모르겠다
사실, 내가 어떤 대상을 수단 삼아 혹은 통과하여 특정한 ‘상태’나 누군가를 인식한다는 그 생각을 처음 건져 올린 것은, 비단 와인을 통해서만은 아니었다. 와인 이전에, 무엇이 있었나?
클래식 안에도 하나가 있다. 바로 ‘브람스’다. 어쩌다 그를 또 하나의 통과 지점으로 이용하게 되었던가? 시작은 크리스티안 테츨라프의 바이올린 리사이틀에서 브람스의 〈바이올린 소나타 3번〉을 듣게 되었을 때였다.
2악장이 시작되는 순간, 노란빛이 쏟아졌다. 밝기가 점점 올라가며 금빛 조명이 두 연주자와 악기를 물들인다. 그 안에서 위안과 애정, 내밀하게 내밀어진 손이 다가온다. 정경이 그려지기보다, 그 손이 품은 감정선을 따라가게 된다.
선에는 끊김이 없어 놓을 수도, 놓칠 수도 없다. 한 번의 선택으로 일생을 몰입해 온 이를 가까이서 바라볼 수 있다는 건 참 감사한 일이다.
그것도 테츨라프라는 사람은 단순히 능숙함을 넘어선, 그보다 앞단계에 이른 연주자 같았다. 그는 충분히 관객에게 ‘음’을 퍼다 나르되, 과하지도 덜하지도 않게, 적정선 안에서 깊게 파고든다. 감정에 치우치지 않고 악보의 길을 섬세하게 걸어간다.
따뜻한데 멀다. 가까워지기엔 당신과 내가 너무 다른 사람이라는 게 보인다. 닿기 어려운 곳에서 어딘가를 비추는 모습을 하염없이 응시하며, 떨어지는 것을 애써 닦아냈다.
실내악의 매력은 바로 이런 것 같다. 교향곡은 광활한 풍경 속에서 나와 그들이 펼치는 넓은 세계를 보여주지만, 한 대의 바이올린과 한 대의 피아노는 고요한 침묵 속에서 인간의 복잡하고 내밀한 감정을 각자에게 건넨다.
그때의 나는 브람스가 누군지, 크리스티안 테츨라프라는 연주가가 어떤 사람인지 정확히 모르면서, 그저 궁금증만 품은 채 공연장에 발을 들였다. 그 까만 관객석 안에서 한참을 멍— 하니 대각선 방향으로 연주가를 하염없이 바라봤다.
그는 내가 봐왔던 연주가 중에서 제일 개성 있는 바이올리니스트였다. 사람 같지가 않았다. 그 자체로 바이올린 같은 사람이었다. 뭐가 그리 좋았던가?
그는 음을 붙잡는다. 누구보다도 최선을 다해. 어떻게 붙잡는가? 하나하나, 아주 찰나에도, 짧게라도 진동시킨다. 생명력이 있다는 건 무엇일까? 숨 쉬고 있다는 뜻이다. 숨 쉰다는 건 박동한다는 뜻이다. 스치는 매 순간, 손과 손 사이에서 태어나는 박동이다.
그것은 단순히 만개한 것이 아니라, 한 인간이 의지를 가지고 바이올린을 통해 다짐하는 선언 같았다. 나는 피워내리라. 오른팔은 또 하나의 활이 되어 현 위를 쉼 없이 오갔고, 감정의 파도가 출렁일 때는 무너질 듯 움직이며 넓게 흘렀다. 담백하고 노련한 프로 감각을 가진 연주자가 ‘사랑’을 논할 때, 어찌 감정이 뒤흔들리지 않을 수 있을까.
나는 끊임없이 그가 어떤 음악가인지 추측했다. ‘무슨 클래식 들으러 와서 그런 상상을 하나’ 싶지만, 브람스 소나타를 줄기차게 들어온 지금에 와 생각해 보면, 내가 그렇게 집중했던 건 그가 ‘브람스’의 품 안에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이상하게 브람스 바이올린 소나타를 듣다 보면, 연주를 하고 있는 당사자에게 시선이 자꾸 쏠린다. 그가 내뱉는 소리도 소리지만, 지금 이 곡을 손에 얹어 걸어 나가고 있는 연주자 본인이 더 궁금해진다. 희한한 일이다.
이런 특이한 시야를 열어주는 것이 내 세상에서의 브람스다. 그의 선율에는 안정된 포용감마저 가득하니, 사람인 내가 어찌 그를 멀리할 수 있겠는가.
그러니 궁금했다. 내 세상에서는 처음 뵙는 바이올리니스트께서 브람스 소나타를 들려준단다. 내가 알고 있던 그 개성 있는 타입의 브람스와는 무엇이 다를까? 그 차이가 내게 설득될까? 어떤 소리를 들려줄까. 기대가 막 피어났다.
와인 맛도, 브람스의 애수도 정확히 모르면서.
3. 브람스
바이올린 소나타 제2번 A장조, Op. 100
I. Allegro amabile — 사랑스럽게, 빠르게
와! 사랑스럽게... 이렇게 처음부터 ‘사랑스럽게’ 해보라고 지시해주는 악장 제목은 처음 보는 것 같다. 저 단어 하나만으로도 마음이 포근해진다. 그렇다고 시작이 마냥 러블리하진 않았다. 아시다시피 다정한 기색을 밖으로 꺼내놓는 방식은 사람마다 제각각이 아닌가.
이지윤 바이올리니스트는 어떤 모습일까. 나는 편안한 자세로, 일요일 오후 2시에 딱 맞는 나른함으로 첫 선을 기다렸다. 아— 진회색이다. 와, 처음 보는 색이다. 단정하면서 시원한 소리. 얌전하면서도 적절히 강세를 드러낼 줄 아는 기개. 말소리는 부드러운데, 소리 안에서 가장 분명해지는 사람이 여기도 있네. 엄청 올곧게 강하다.
음색이 하나도 쉬워 보이지 않았다. 활 위에서 음을 그려 나가는 모습만 봐도 쉽게 다가설 수 없는 느낌이 있다. 음악에 진심이 아닌 적이 한 번도 없었던 사람이라는 게, 소리로 느껴졌다. 들뜬 분위기를 유도하기보다 신중하게, 다만 짙게! 음을 뽑아낸다. 앞으로 투척하는 게 아니라 충분히 향유할 수 있도록. 조금 남은 와인 한 잔을 천천히 마시듯.
가만— 조금 거리를 두고 악기 하나를 들고 기다려주는, 느긋하게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시선을 돌려주는 다정함이 있었다. 소리가 널찍하게 퍼진다. 듣기 좋은 발성으로 부채 하나를 펼쳐내는 기분도 든다. 아, 개운하다.
II. Andante tranquillo — Vivace — 고요하게 — 활기차게
어떻게 사람마다 표현이 이렇게 다를 수 있을까. 한 계단씩 내려갈 때마다 곡선이 깊어지는 영역이 부드럽게 연결된다. 끊김이 없으니 한 선만 꾸준히 따라가면 된다. 시선을 굳이 무대 중앙에 둘 필요도 없다.
예술의전당 IBK챔버홀 무대 바닥에는 호수가 있다. 얼마나 맨들맨들하게 닦아 두었는지, 각진 벽 모양이 그대로 반사된다. 그곳에 시선을 던져 놓고, 연주가를 오른편 시야 끝에 남겨둔 채 브람스를 감상하면 된다. 즐거운 일이다.
가라앉거나 나아갈 때는 채도 높은 두꺼운 선을 유지하다가, 끝음을 표현할 때는 잎사귀를 넓게 펴준다. 한 번 나타나면 쉽게 사그라들지 않는 것도 좋다. 끈질기게 소리를 놓치지 않고 얄상하게, 높게— 아득하지만 붙잡을 수 있을 만큼 날아올랐다가 천천히 내려왔다가, 다시 살짝 올라올 즈음 소리를 적절히 틀어 주니 입체감이 그대로 들린다.
문지영 피아니스트의 손 모양을 감상하는 재미도 꽤 톡톡했다. 거의 건반을 깊게 누르지 않는 것 같은데, 어떻게 이렇게 소리가 또렷할까. 딱 바이올린과 잘 어울릴 만큼만 또랑또랑하다. 앙상블 안에 있을 때의 피아노는 이런 모습이구나. 건반 위를 오가는 자태도 우아하다. 나긋—나긋.
III. Allegretto grazioso (quasi Andante) — 우아하게, 거의 느리게
우아하면서도 강단 있게, 가녀리기보다는 담대하게 나아간다. 이 즈음의 피아노는 하얀 달무리를 닮았다. 든든한 밤이다. 자잘하게 강약 포인트를 주기보다, 애초에 뻗어내는 음색 자체에 두께감이 충분하다. 그렇다고 비올라나 첼로의 결과 닮은 것도 아니다.
톤은 훨씬 높은데, 우리가 생각하는 그 쨍하고 삐걱거리는 바이올린 소리가 없다. 이렇게 노래하는 악기라니. 이런 표현을 들으면 모두 바이올린과 사랑에 빠지고 말겠다. 높은 음을 잘 내는 사람이 저 깊숙한 땅굴도 파 줄 수 있는 것이다. 그 따뜻하고 재미난 다이내믹을 능숙하게 보여냈다.
바이올린 소나타 제3번 d단조, Op.108
I. Allegro — 빠르게
사탕이 동그란 모양을 갖추기 전에, 양손으로 달달한 것을 쭉— 늘이는 모습이 있다. 오늘의 바이올리니스트는 브람스 3번 1악장의 시작을 그렇게 했다. 손안에 작게 뭉쳐 놨다가, 기다랗게 펼쳐낸다. 한 덩어리였던 것이 사이가 멀어지며, 중간 영역일수록 얇아진다. 그 모양 변화를 살펴보는 재미가 꽤 있다.
세차지만 부담스럽지 않다. 넓게 휘감으며 다가온다. A블록 2열에 앉은 나는 B블록 중앙 맨 앞에 앉은 관객들의 옆모습을 살폈다. 머리를 뒤로 젖히고 눈을 감은 사람, 고개를 한껏 들어 올리고 온몸으로 소리를 맞는 사람.
굳이 저 한가운데를 응시할 필요가 있을까? 소리의 개성이 뚜렷해 아주 성능 좋은 스피커가 눈 앞에 있는 것만 같다. 얇고 투명한 하얀 천 재질의 막을 하나 내려놓아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야가 흐릿하면 소리가 더 잘 들릴까? 지금도 충분히 잘 들리지만, 더 깊게 음미하고 싶은 욕심이 생긴다.
화려한 움직임이 없는데도 바이올린 소리가 중앙에 응집되어 시원하게 내뻗는다. 가을바람 같다. 차가운 소리임에도 이렇게 따뜻한 곡과 절묘하게 어우러질 수 있다니. 그 온도차 덕분에, 이 계절에 딱 맞는 연주자를 만났다는 생각이 든다.
II. Adagio — 느리게
막 다정해 보이진 않던 사람이 따뜻하게 걸어주면, 괜히 더 마음이 움찔하지 않은가. 그 지점에서 태어난 소리들이 여기에 있다. 쉬워 보이지 않는 연주라 더욱 마음에 들었다. 여태까지 그가 품어온 소리들을 충분히 보여줘서 기분이 좋았다. 대접받는 기분.
브람스를 보여주려 천천히 걸어주는데, 어째선지 작곡가는 안 보이고 연주가가 더 잘보인다. (좋은 의미로) 듣기 좋은 선율 안에서도 자신만의 색감을 보여주는 사람을 만나면 이렇게 기쁘다. 흑진주색의 오르골 안에서 파도가 힘차게 출렁인다. 아, 일요일 오후 2시구나. 좋은 주말이다. 오길 잘했다.
III. Un poco presto e con sentimento — 다소 빠르고, 감정적으로
이 파트에서 테츨라프는 진짜— 카라멜 같았는데, 이지윤 바이올리니스트는 다르다. 정직하고 담담하게, 필요한 만큼만 당기고 곧장 되돌아가지 않는다. 그 자리에서 적당히 올라간다. 그리고 강도 있게 집중도를 확 끌어올린다.
굳이 아래쪽에 텐션을 강하게 밀집시켰다가 재간을 부릴 필요가 있을까? 이 정도만으로도 전해질 건 다 전달된다. 이런 방법도 있구나 싶다.
IV. Presto agitato — 매우 빠르고, 격정적으로
너무 몰입해서 4악장이 시작된 줄 몰랐다. (3악장인 줄) 공연장에 와야만 느낄 수 있는 악기의 입체 음향이 듬뿍 담겼다. 성능이 대단히 뛰어난 악기이자 스피커다. 짱짱하게 울린다!
앉아 있는 의자가 클래식 감상실의 소파로 착각될 정도였다가, 딱딱한 나무 의자가 뒷통수를 쳐 ‘아, 여기 공연장이구나’ 하고 정신을 차렸다. 한참 몰입하던 중, 천장에서 문고리 손잡이보다 살짝 작은 둥근 것이 떨어졌다. 얼마나 집중하고 있었던지, 그게 탁— 떨어지자마자 번뜩 깼다. (다행히 아무도 없는 곳으로 떨어졌다)
처음엔 무슨 일인가 싶었지만, 작은 해프닝 정도로 넘어갈 일이었다. 나는 곧장 낙하 직전의 상태로 돌아가려 애썼다. 연주자들은 여전히 끊김 없이 연주를 이어나가고 있지 않은가? 커다란 부채로 찬바람을 강하게 부채질하는 듯한 사운드. 정말 '우와!'였다.
바이올린 소나타 제1번 G장조, Op.78
I. Vivace ma non troppo — 빠르지만 지나치지 않게
악장 제목부터 눈에 띈다. ‘적당히 해라’고 말할 수도 있는데, 빠르면서도 지나치지 않게라니. 감수성 없는 사람은 어떻게 하라고 이렇게 지시했을까 싶지만, 이보다 절묘한 표현도 없으니 할 말이 없다.
적당히 나긋하고, 분명하게 짚어 주며 음을 펼쳐내는 게 바로 ‘빠르지만 지나치지 않게’인가 보다. 그렇다면 오늘의 연주가들이 매우 분명하게 행하고 있음이 확실하다. 브람스의 다정함은 함께 나아감에 있다. 부정적 감정을 없앨 수 없음을 알기에, 같이 다뤄 보자— 동행해 보자— 부드럽게 제안하는 마음결이 저 안에 가득하다.
연주자들은 그의 이야기를 다뤄낼 때마다 어떤 감정을 느낄까? 나는 타인의 연주를 들으며 멋대로 추측할 뿐이지만, 그들은 작곡가의 의도와 살려야 할 포인트를 공부한 뒤 그것을 그어내는 것이 아닐까. 해석을 담아낼 때는 결국 본인이 겪은 세상과 그 시야가 중요할 텐데, 그들은 세상을 더 이타적으로, 혹은 더 시니컬하게 바라보려 할까. 아니면 오직 음악에 몰두하려 할까?
어떤 길을 거닐어야 예쁜 소리를 낼 수 있을까. 소리로 나를 담아내는 일은 어떤 기분일까. 보다 솔직해질 수 있는 공간이겠지. 이제는 글에 거짓말을 쓸 수 없게 된 나처럼, 결국 하고 싶은 말을 어떻게든 해버리게 되는 수단이려나. 상상이 잘 가지 않으면서도, 빛을 쏟아내는 저 연주자의 표현을 듣다 보면 ‘감히 생각하려 들어?’ 하는 말이 절로 따라온다.
지금 브람스 소나타 1번을 듣고 있지만, 궁극적으로 무엇을 듣고 있는지 잘 모르겠다. 브람스는 참 노래를 잘한다. “너가 아직 몰라서 그렇지, 세상엔 아름다운 게 참 많아.” 그렇게 말하는 것 같기도 하다.
간드러짐 없이 거대하다. 소리의 결이 얇아질 때도, 두꺼워질 때도 변곡점이 느껴질 겨를 없이 부드럽게 지나간다. 그런데도 성량이 크다. 굉장한 퍼포머 아닌가. 부드럽고 따뜻한 피아노의 넓은 울렁임 위로 바이올린이 얇고 길게, 급하지 않게 사그라든다.
감정이 짙은데 소리도 크고 듣기 좋다. 등을 의자에 기대고 가만히 있어도 된다. 소리를 끄집어냈다가 쌓아 올릴 때, 빠르다가도 서서히 느려진다. 미세한 컨트롤이 듣는 이를 기분 좋게 만든다. 빛을 들이 부어— 부어!
II. Adagio — 느리게
‘Adagio’라는 제목만 보면 나긋하게 흘러갈 것 같은데, 이만큼 모여들어 쟁여 놓고 툭— 내려놓는다. 길게 바닥선을 그어 버리는 바이올린. 이렇게 한숨에도 표현이 달라질 수 있나. 아무것도 담기지 않은 연주를 만나면 속상할 수밖에 없다. 소리를 어떻게 이렇게 움켜쥐었다가 펼쳐낼까. 섬광이 반짝이는 것 같다.
III. Allegro molto moderato — 매우 절제된 빠르기로
섬광이 반짝인다. 뒤로 갔다가 다시 앞으로 드러난다. 그걸 지켜보느라 이 악장을 다 소진했다. 무엇을 구체적으로 표현했다고 말하기 어려운 구간이다. 들여오고, 내어주고, 나아가고, 멀어지고, 아득했다가 가까워지고— 그 움직임을 관찰하기에도 시간이 부족했다.
좌우가 아니라 앞뒤로도 움직인다. 흥미롭다. 역시 재밌다. 이봐, 브람스는 결국 나에게 누군가를 비춰주는 거울 같다니까. 브람스 씨, 미안미안. 내 앞의 저 사람에게 시선이 자꾸 쏠리는 걸 어쩌겠는가. 저 흑진주빛 소리가 눈부신걸.
4. 사실, 아직도 잘 모르겠다
사실, 브람스 1~3번 소나타를 지나온 지금도 브람스가 어떤 사람인지, 어느 악장이 유독 강렬히 남는지는 선명하지 않다. 아쉬움이 있는 거냐고? 전혀. 오히려 내게 이 세 개의 곡과 악장은 하나로 이어진 교향곡이라 아쉬움이 있을 수가 없다. 애초에 싫어할 수 없는 곡들이 아닌가.
프로코피예프의 곡은 듣기만 해도 귀로 시선이 몰리는데, 브람스는 계속 들어도 딱 적당한 선상에서 오래 머물러 주니, 그만의 매력이 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를 좋아하나 보다.
더 친해질 계획이 있냐고? 글쎄, 아직은 잘 모르겠다. 최애가 연주해 준다면 그때 깊게 생각해 보겠다. (으하하) 모르겠는 건 모르겠는 채로 두는 재미가 있다. 너무 벌컥벌컥 다 알려고 들면 재미가 없다. 한 번에 한 줌씩, 그 정도로도 충분하다.
브람스도, 와인도 결국 그렇게 천천히 알아가면 되지 않을까. 무엇보다 요즘은 타네예프 피아노 퀸텟이랑도 친해져야 하니까— 바쁘다, 바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