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남부의 도시를 여행 중인 처제가 보내온 어느 마을의 아름다운 골목길. 돌로 쌓은 듯한 벽 위에 덧칠한 회갈색의 집들 사이로 조약돌과 흙을 섞어서 만든 듯한 회갈색 계단의 골목길이 적당한 보폭에 맞게 놓여 있다. 골목의 끝은 집들 사이로 보이는 파란 하늘빛으로 이어지고 계단의 조약돌들은 새침하게 반짝인다. 그리고 골목길 한편에 놓인 꽃화분들이 푸른 색감을 더하고 있다.
균일하지 않은 집과 골목의 재질, 불규칙적인 집과 골목길의 공간 배열과 구조, 많은 사람들과 여러 교통수단들의 원활한 이동에 무심한 협소한 공간. 유럽의 소도시에서 볼 수 있는 이런 모습들은 우리가 익숙한 도시공간의 통일성과 일관성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이 작은 마을의 모습들은 근대적인 도시 기획에서 배척되어야 할 것들이었다. 적어도 한국 사회에서 이런 불규칙적인 특징들은 근대화 과정에서 버려진 낙후된 지역이거나 정책적으로 또는 상업적으로 추진되는 “재개발”의 대상을 규정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최근 일본에 대한 불매운동으로부터 야기된 일본 소도시 여행객의 감소는 많은 사람들이 거대도시로부터 벗어나 아담한 마을의 정경을 느끼고 싶어 한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작은 마을과 골목길에서 발견하고 느끼는 즐거움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단순히 현대화를 거치지 않고 오랜 시간을 그대로 간직한 “옛 것의 흔적”에서 비롯되는 것일까?
아마도 그것은 실제로 그 마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시간과 관련이 있다. 우리에게는 낙후되고 버려진 오래된 집과 마을이 유럽에서 지금까지 유지된 이유는 그것이 “박제되어 보존된 것이 아니라” 거기에 사람이 살아왔기 때문이다. 단순히 그 공간에 사람이 있다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이 그 공간에서 오래도록 살면서 자신의 집과 마을 공동체를 “가꾸어 왔기” 때문이다. 즉 자신이 사는 “집”이 있고, 그 집에서 오래도록 살 수 있게 하는 자신과 지역의 사회경제적 안정성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집에서 하루하루 먹고사는데 급급해하지 않고 자신의 집 안과 밖을 정돈하고 이웃과 함께 골목길에 꽃도 심고 관리할 수 있는 시간적(노동), 경제적 여유가 있어야 한다. 급격한 사회경제적 변화로 대량실업이 일어나 많은 사람들이 다른 지역으로 이주를 해야 하거나, 반대로 급격한 경제적 개발 등의 영향으로 외부자본이 대량 유입되고 순식간에 막대한 경제적 이득을 얻어 기존의 생활패턴이 바뀐 경우에도 생활터전의 장기적 안정성은 유지되기 어렵다. 매일 쓰고 가꾸던 것들이 버려지거나 새 것으로 교체된다.
우리의 시각에서 보면 주로 선진국의 중소도시에 발견되는 아름다운 마을의 모습들은 이러한 급격한 사회경제적 변화로부터, 그것이 경제적 발전이든 침체이든, 상대적으로 그 충격을 덜 받거나 그러한 충격을 완화하는 사회적 장치들로 인해서 지속적인 삶의 안정성이 존재했음을 보여준다. 안정된 사회경제적 기반 위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마을과 집들이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다. 단지 오래된 시간의 껍데기가 아니라 자신의 삶을 조금 더 아름답게 가꾸려는 노력의 결과이다. 마치 시간의 흐름이 우리의 얼굴에 주름을 남기듯 골목마다, 집집마다 똑같지는 않지만 신기하게도 낯설지 않은 정감을 느끼게 하는 온기는 마을을 가꾸며 살아가는 성실한 사람들의 주름을 닮아있다.
이런 이유로 작은 마을들의 오래된 모습을 “보존”하고 “재생”하려는 움직임은 그 본질인 사람들의 지속 가능한 삶의 문제를 우선시하지 않는다. 도시재생을 향한 정책적 기획은 일관성과 규칙성을 수반하며 공간적 구획과 시간적 제한성을 필요로 한다. 게다가 필연적으로 가시적 성과가 단기적으로 확보되어야 한다. 이 때문에 도시재생을 통해서 어느 정도 낙후된 골목길을 아름답게 재단장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그 마을의 지속 가능한 삶은 담보할 수 없다. 도시재생이 사람들의 실질적인 삶의 지속가능성을 우선시하지 않는 도시 행정가의 정책적 기획으로 변질된다면, 전 지역으로 확산되는 마을벽화 사업, 출렁다리나 케이블카 사업처럼 획일화되고 동질화되어 버릴 것이다. 마을벽화로 외부 관광객을 유인하고 이를 통해서 지역의 지속가능성을 모색하려는 정책적 시도들은 ‘유행’이 되어 버리고, 결국 여행객들의 소비패턴 변화에 따라 퇴색될 수 있다.
낙후된 지역에 도로를 새로 깔고, 오래된 집을 새로 고치는 행위들은 그곳에 사는 사람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인가? 아담하고 아름다운 마을을 보고 싶어 하는 외부 여행객들을 위한 것인가, 아니면 낙후된 곳을 세련된 곳으로 단기간에 바꿔보고 싶은 행정가의 야심인가? 이러한 시각의 이면에는 “타자적 시각”이 자리잡고 있다. 주민들이 자신의 마을을 외형적으로만 아름답게 재생시킨 결과로 그런 마을이 유지되어 온 것일까? 마을 사람들은 자신과 공동체의 삶을 보다 더 나은 방향으로 가꾸려고 한 결과가 아닐까? 마을과 도시가 주는 정감 어린 주름은 생겨난 것이지 성형외과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한편에서는 낙후된 곳을 과거의 근대적 개발이 아닌 재생이라는 방식의 재개발을 추진하는 정책적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다른 한편에서는 그러한 낙후된 곳을 상업적 시설 – 카페, 숙박시설 등 –로 재단장하는 민간의 움직임이 유행처럼 일어나고 있다. 그 의도는 상반될지 모르나 이 양쪽의 움직임은 모두 타자적 시각을 공유한다는 점에서 일치한다. 그리고 해당 지역의 부동산 가격이 상승하고 외부의 대형자본이 유입되고 소위 말하는 젠트리피케이션을 초래한다는 점에서도 일치한다. 소비패턴이 유행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변한다는 점에서 상업적 재생은 지속가능성과는 거리가 멀다. 더 많은 사람들이 여행을 통해서 정감 어린 삶의 주름들을 발견하고 싶어 하는 열망은 그러한 가치들의 실존적 빈곤을 반증한다. 그것은 소비행위를 통해서 일시적으로 충족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갈증은 근본적으로 해소되지 않는다. 그러는 사이 한국사회에서 사회경제적 안정성은 점점 더 약화되어가고, 공동체적 가치는 해체되어 간다. 그 결과 이웃과 어울려 자신의 삶을 가꾸는 소박하지만 정감이 깃든 시간과 공간의 주름들은 사라지고 있다. 그리고 그 빈자리를 ‘기획’과 ‘자본’이 메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