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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화 굽 속에 들다

1. 이탈리아 남동쪽의 도시 브린디시

by 다나 김선자



어마한 덩치의 초대형 페리가 미끄러지듯 아주 천천히 항구에 들어서 정박한다. 물 위를 떠다니는 8층 건물. 그리스 파트라를 출발해 다음 목적지 이탈리아 브린디시로 가는 배다. 항구직원들의 안내를 받아 선착장에서 멀치감치 떨어져 배를 기다리던 우리는 말없이 그 광경을 지켜본다. 드디어 배 뒤꽁무니에서 거대한 입이 쩍 벌어진다. 직원의 신호에 이어 우리들은 그 벌어진 입 안으로 빨려들 듯 잽싸게 들어갔다. 페리에 올라탔다. 브린디시 항구까지는 약 10시간이 소요될 예정이다. 배가 항구를 벗어남과 동시에 12일간 그리스 코르푸 섬과의 작별을 고했다.

우리는 침대칸이 아닌 일반석을 예약했다. 일반석이라도 손님이 많지 않으므로 어디서든 충분히 누워서 갈 수 있었다. 먼저 스크린 없는 영화관처럼 생긴 방으로 들어갔다. 손님이 없어 거의 텅 빈 상태다. 푹신한 안락의자가 가로세로 가지런히 놓여 있어 발을 뻗고 드러누울 수도 있었다.

짐칸에 가방을 올려놓고 갑판으로 향했다. 굳게 닫힌 갑판문은 쉽사리 열리지 않았다. 있는 힘을 다해 열긴 했지만 한 발짝을 내딛기도 힘들다. 바람이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앞으로 나아가면 날려 버릴 기세다. 나는 배의 구조물과 난간을 붙들고 몇 발짝 걸었다. 갑판에는 우리를 포함하여 겨우 다섯 사람만이 나와 있다. 그들도 우리처럼 꽤나 호기심이 많은 것 같다.

휘몰아치는 거센 풍랑 때문에 똑바로 서 있을 수가 없다. 차가운 바람에 몸이 오싹거린다. 거대한 파도가 갑판 위로 밀어닥치더니 순식간에 바닷물을 쏟아 놓는다. 철서덕 철석. 무척이나 사나운 것이 나를 삼켜 버릴 것만 같다. 철석 철서덕. 쥐도 새도 모르게 풍랑에 휩쓸려 갈 것만 같다. 그 잠깐 사이에 바닷물이 내 옷자락을 젖셔 놓았다. 너무 위험해서 더 이상 머물기가 힘들 뿐 아니라 여유롭게 주변 풍경을 살펴볼 겨를도 없으니 그만 안으로 들어왔다.

바가 있는 널따란 응접실 같은 홀에 들어섰다. 손님들 대부분이 이곳에 모여 삼삼오오 자리를 잡고 있었다. 다들 지루한 표정들이다. 창가 쪽 좋은 자리들은 이미 차지하고 보이지 않는다. 남편과 나는 남아있는 입구 쪽 넓은 소파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서는 카드를 꺼내 놀이를 시작했다.

요컨대 실내장식으로 보아 비록 낡긴 했지만, 한때는 고급스럽고 호화로운 배였음을 어렵잖게 알 수 있었다. 넓은 공간의 짜임새와 아늑한 장식들은 지금도 편안하고 쾌적함을 준다. 복잡하지 않으니 더욱 그랬다. 우리는 카드놀이가 끝난 후, 이어폰으로 음악을 듣기도, 책을 읽기도, 그것도 지루하면 아래 위층으로 돌아다니며 배의 실태를 탐색하기도, 그러다 준비해 온 음식으로 간단하게 저녁식사도 하면서 그렇게 10여 시간을 보냈다.

장거리 항해에서의 장점은 대체로 초대형 선박이라 원만히 거센 파도에도 크게 흔들림이 없어 뱃멀미를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리고 여러 종류의 방들이 있어 휴식을 취할 수도, 바에서 간단한 식사와 커피를 마실 수도, 또한 장시간 앉아 있기가 불편할 때 동네를 한 바퀴 돌아다니듯 걸어 다녀도 다른 사람들에게 크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 하지만 단점이라면 다소간의 지루함과 답답함이다. 특히나 갑판으로 나가서 시원한 바닷바람을 맞으며 주변 풍경을 한량없이 바라보는 즐거움과 재미가 없다면 집안에 틀어박혀 있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므로 우리가 크루즈 여행을 기피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크루즈 여행은 모험이나 동선이 긴 움직임을 선호하기보다 한정된 공간의 실내에서 각종 이벤트를 좋아하는 피동적인 사람들에게 적당하다고 본다. 따라서 정년퇴임을 한 노인들을 위한 여행이라고도 하는 것이다.

우리를 태운 페리는 이오니아 해에서 아드리아해로 접어든다. 동쪽의 발칸반도가 점점 멀어지는 동시에 이탈리아 해역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점차 본토에 근접함을 느낀다. 이것은 지리적 지식을 근거로 하여 지각된 것일 뿐, 사실상은 육지가 보이지 않았다. 그것은 이탈리아 동남쪽 땅은 지대가 낮아 먼 거리에서는 바다와 거의 평형을 이루기 때문에 시야 권으로 얼른 들어오지 않는 것이다. 어느덧 항구와 가까워졌는지 육지가 길게 수평선을 그으며 가물가물 시야로 들어온다.

드디어 이탈리아의 브린디시 항구에 닿았다. 저녁 어스름이 깔린 항구는 휑해서 더욱 쓸쓸해 보였다. 어쩌면 내 마음 어디쯤에서 우러난 쓸쓸함인지도 모르겠다. 아침부터 내달린 여정의 끝에서 이미 지친 육체로 인해 마음까지 허약해졌음의 반증일 것이다. 아는 이 하나 없는, 낯선 곳에 도착한 낯선 내 심경일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것이 여행의 묘미 중 하나이기도 하다. 이 낯섦이 나를 흥분케도, 설레게도, 하면서 자극제가 되어 삶의 원동력을 준다. 극복하려는 의지와 함께. 낯섦이 더 이상 낯설지 않을 때까지.

우리는 서둘러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마지막 버스가 출발 시간에 임박해 있었다. 버스를 타고 기차역 정거장에서 내렸다. 이틀 후 이 역에서 레체행 기차를 탈 것이라고 남편이 알려 준다. 우리는 역을 등진 채 캐리어를 끌고 15분가량 밤길을 걸었다.

도심의 밤은 너무 아름답다. 건물도, 불빛도, 어둠 속에 비치는 모든 것이 아름답다. 비록 보이지 않은 것일지라도. 보이지 않아서. 곧게 직선으로 뻗은 도로 양쪽에서 늘씬한 야자수나무들이 행진을 하듯 나란히 길게 서 있다. 어둠을 뚫고 하늘높이 솟아있다. 그 뒤 바로크양식의 건물들과 별처럼 반짝이는 야자수나무들이 아름답게 빛난다. 불빛에 반사된 야자수 잎사귀들이 팡파르를 울리며 행렬하는 것 같다. 트럼펫인가? 지구별이든가? 그것도 아니면 불꽃놀이 중인가? 건물들도 그들과 함께 우아한 모습으로 행진을 한다. 아니다. 내가 그 앞을 행진하듯 걷고 있다. 아! 이 아름다운 모습이 이탈리아다. 장화 굽 속의 브린디시다. 그 속에 내가 들어왔다. 그 아름다움에 빠져든다. 밤의 거리, 자연과 인간이 만들어낸 합작품속으로.

그리고 문화의 도시.

대리석과 원석으로 잘 깔아 놓은 보도 한편에다 캐리어 바퀴가 도로 쪽으로 쉽게 끌리도록 나지막한 경사를 만들어 놓았다. 앞서 거쳐 온 나라들에서는 보지 못했던 사람을 생각한 도시다. 거리의 사람들은 자유롭게 활기가 넘친다. 지중해연안사람들의 특유한 낙천적 평화로움이다. 어느새 이 아름다운 모습이 내게 긍정적 영향을 미쳤는가 보다. 나도 덩달아 호기심 가득 찬 뜨거움으로 열정이 솟아오른다. 아까의 쓸쓸했던 마음은 사라졌다. 어디론가. 점점 이 도시가 좋아진다. 반갑다 도시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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