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순원의 '소나기'가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단편소설이라는 어느 기사를 본적이 있습니다. 학교에서 이 작품에 대해 배울때가 기억나네요. 사실 학창시절 배웠던 많은 소설과 시에 대한 해석들은 일견 지루한 수험의 과정일수도 있었겠지만, 이 소나기라는 소설에 대해서는 인상깊은 것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소년은 물을 움키었다라는 표현이 오래남아있습니다.
소녀가 들고있던 도라지꽃의 보라색. 소설 속 훌륭한 복선의 대표적인 예로 회자되는 이 부분에 대해서는 앞으로 진행될 소녀에 대한 결말을 암시한다고 배웠습니다. 보라색이 죽음을 상징한다는 것을 저는 이 작품 이후 인지하게 되었습니다만, 보라색에 대한 관점은 사실 여러가지라고 합니다. 서양에서는 태양신 아폴론의 연인 히아킨토스가 서풍의신 제피로스에게 죽고, 그 죽음을 슬퍼한 아폴론이 흘린 눈물에서 태어난 꽃이 히아신스라는 이야기가 있는데요. 히아신스의 색 중 하나가 보라색이라 죽음을 상징한다는 설이 있습니다. 다만 서양에서도 보라색을 죽음의 색으로 보는 동시에, 창조의 색으로도 본다고하니 이 부분에 대한 관점은 읽는사람에 따라 다를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가끔 도라지꽃을 볼때면 지금도 이 윤초시댁 증손녀가 생각나, 개인적으로는 좋아하는 꽃이 되었습니다.
참고로 황순원작가가 '그냥 보라색을좋아해서 쓴것뿐이다'라고 이야기했다는 말이 퍼져있는데 이는 낭설입니다. 황순원작가는 그런 이야기를 한적이 없습니다.
이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 대해서는 흥미로운 이야기가 존재합니다. 원래 황순원 작가는 우리가 아는 마지막 문구 뒤에 몇문장을 더 썼지만, 번역가였던 원응서선생의 조언에 따라 마지막 네문장을 삭제했다는 이야기인데요. 원래 있던 네 문장은 다음과 같다고합니다.
어떤가요. 개인적으로 원응서 선생의 조언을 받아들인것이 그야말로 신의한수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작품을 관통하는 주인공들의 '애틋함'은, 작가의 과감한 결단으로 인해 독자들 마음속에서 영원히 빛을 잃지않게되었다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 감히 생각하기에, 소설 '소나기' 속 서정성의 정점은 우리가 알고있는 마지막 몇문장에 있습니다.
'그런데 참, 이번 계집앤 어린것이 여간 잔망스럽지가 않아. 글쎄 죽기전에 이런말을 했다지않아? 자기가 죽거든 자기 입던 옷을 꼭 그대로 입혀서 묻어달라고....'
돌이켜보면 새드엔딩이 익숙하지 않은 학생들에게 좀 더 인상적으로 다가오는 문구이면서도, 그 끝이 비극으로 끝나기에 이 작품이 가지는 아련함이 배가 됩니다. 작품이 세상에 나온지 수십년이 되었지만 아련한 첫사랑의 비애는 세월을 모르고 사람들의 마음속을 파고듭니다. 작품내내 소년이 소녀를 마주치던 징검다리는 돌아갈 길없이 항상 일직선입니다만, 그로인해 소년은 마주치는 소녀를 피할길이 없습니다. 어쩌면 인연이라는것은 그처럼 한방향으로만 길이 난 징검다리와 같단 생각을 하게됩니다.
사람의 마음은 모래시계처럼 한 번 쏟아지기 시작하면 그것을 멈출 수가 없죠. 소년이 윤초시네 증손녀를 처음 보았을때부터 시계속 모래는 이미 쏟아지기시작하여 작품이 끝날때까지 멈추지 못합니다. '소년은 소녀를 사랑했습니다'라는 문구는 단 한번도 등장하지 않지만 읽는사람들은 모두 알 수 있죠. 우리가 소설을 읽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그런것 아닐까합니다. 사전적의미를 지닌 단어 하나로 모든것을 정의할수도, 설명할수도 있겠지만 우리는 그 설명의 과정을 좋아하는것일지도 모르겠네요.
그 아슬아슬한 징검다리 속 만남에서 진행되던 아름다운 첫사랑은 결국 영원한 헤어짐으로 끝이나지만, 우리는 소녀를 잃은 소년의 미래가 어떨지 짐작해볼 수 있습니다. 사춘기시절 어설픈 첫사랑은 반드시 한번은 겪어야할 열병처럼 앓다지나갈것이고, 아마도 소년은 그 열병 속에서 한뼘 더 성장했을거라고 말입니다. 사실 그렇게 되기를 소망하는면이 더 크다고도 할수 있으니, 완전한 비극이란 마음먹기에따라 없는것일 수도 있지않을까싶네요.
우연한 기회에 이 소설을 다시 읽어보게 되었는데,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소설이라는 타이틀이 아깝지않다는 생각이 들어 써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