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을 써 놓고 보니 영화 낚시 글 같다. 영화 이야기는아님을 밝힌다. 때론 현실이 영화보다 더 영화 같기도 하다는 점에서 영화 같은 이야기라고 해야 할까. 음… 그렇지만 팝콘 먹으면서 즐길 이야기는 아니니, 영화와현실 그 어디쯤에 놓인 이야기라고 해야겠다.
8월 말에 엄마 칠순 기념으로 가족 여행을 다녀왔다. 목적지는 부산. 원가족 일곱에 딸 넷의 배우자와 그 자식들을 합해 총 16명이 모였다. 약속된 날짜에 합류할지 다음날 합류할지 불분명한 사람과 2박 3일을 다 못 채우고 중간에 갈 사람, 회비를 취향껏 낸 사람들 사이에서 엉겁결에 총무를 맡아버린 나는 8월 내내 신경이 예민했다. 출발하는 날 아침까지도 여행에 회의적이었다. ‘분명 다 못 모일 거야. 우리 집이 그렇지 뭐.’ 실망하기 싫은 내 마음의 저울 눈금은 일찌감치 ‘0’을 가리키고 있었다.
전국 각지에서 출발한 가족들이 체크인 시간인 4시를 전후해 속속 도착했다. 올 사람들이 왔을 뿐인데 놀라웠다. 믿어지지 않았다. 가족들은 광안리 앞바다가 내려다보이는 뷰와 감성 충만한 풀빌라의 컨디션에 감탄하며 인증샷 찍기에 열을 올렸다. 이곳을 예약하려고 내가 얼마나 손품을 팔았던가. 조금이라도 할인받고 싶어 정성스러운 후기를 약속하며 사장님께 얼마나 굽실댔던가. 어쨌거나 우여곡절 끝에, 이 많은 수가 한 공간에 모여 웃고 있는 모습이 꿈처럼 느껴져 기대치 눈금이 찔끔 움직이려 했다. 하지만 아무도 나의 수고로움을 알아봐주지 않았다는 사실에 눈금은 다시 제자리.
예약해 둔 식당에서 거나한 저녁 식사를 하고, ‘용돈 케이크’ 이벤트에 엄마의 입꼬리가 귀까지 걸리고 나자 아빠가 목소리를 깔고 사위들을 호출했다. 당신의 핏줄인 딸들은 제외한 채 당신의 아들과 남의 핏줄인 사위들을 티 테이블에 둘러앉혔다. 가을에 대대적인 이장을 계획 중인 아빠의 완고한 뜻(큰일을 앞두고 어디 남의 나라 땅을 밟느냐는)에 따라 해외여행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엄마의 미간이 좁아진다. 그러거나 말거나아빠는 ‘모두가 모였으니 다시 한 번 확실히 해 두겠다’며 공지 사항을 브리핑했다.
첫째, 10월 말에서 11월 초 사이, 선산의 조상님 묘를 파묘해 곡성 납골당으로 옮겨 모신다. 비석에 사위들과손주들 이름도 모두 올라가니 한 명도 빠지지 말고 참석해라.
둘째, 가족납골묘는 동그란 봉분 형태가 아니라 사각 비석 무덤이라 때마다 벌초를 하지 않아도 되니 너희는부담스러울 것이 없다.
셋째, 총 16인의 조상님을 모실 것이며, 미래의 조상인 아빠, 엄마의 자리도 마련돼 있으니 너희 입장에서는 엄마 아빠가 언제 죽어도 걱정할 것이 없다.
파묘와 곡성이라고?!
퍼뜩 스치는 영화 생각에 웃음이 툭 터져 나왔지만, 곰곰 생각해보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걱정과 부담은 셀프다. 누가 하지 말란다고 안 할 수 있는 거면 얼마나 좋겠는가. 게다가 조실부모한 아빠가 조상을 열여섯이나 떠맡는다고? 대체 왜 때문에?
인근 주민들의 반대에 부딪혀 선산 정비 계획이 어그러져 아빠는 한동안 상심이 컸다. 그러던 어느 날 큰이모부도 아빠처럼 본인 사후에 ‘그놈의’ 하나뿐인 아들에게 부담 주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납골당을 알아보았고, 최근 곡성으로 이장을 했다는 것이다. 그 소식을 듣고 묘지 임장을 다녀온 아빠는 마음의 결정을 내렸다.
“얼마나 좋은지 아냐? 앞으로는 섬진강이 흐르고 뒤로는 산이여. 여그보다 좋은 데는 없어야.”
(아무래도 나의 금사빠 기질은 부계 유전인 듯)
아빠는 본인 눈앞에만 4D로 펼쳐지는 배산임수 명당, 그러니까 섬진강의 냄새와 바람에 취한 듯했다. 잠깐 마가 뜨는가 싶더니 ‘진짜로 일어날지도 모르는 기적’에 대해 말을 이었다. 목소리를 한 톤 낮춤으로써 좌중의 귀를 솔깃하게 만드는 모습이 흡사 영화 <파묘>에서 풍수사 역할을 맡은 최민식에 버금갔다.
아빠가 갑자기 목소리를 낮춘 까닭에 조금 멀리 있던 나는 기적의 실체(?)를 잠들기 전에야 남편에게 듣고 이불킥을 날렸다. 그 기적이라 함은 글쎄, 큰이모부가 이장을 마치고 얼마 후 로또 2등에 당첨돼 4,000만 원을 손에 쥐었다는 이야기였다. 조상을 잘 모시면 복을 받게 돼 있는 법이라고, 그러니 처갓집 이장에 꼭 참석해 로또 당첨의 행운‘도’ 얻으라니…….
세상에 이렇게 무시무시하고도(?) 솔깃한 참석 독려 메시지가 또 있을까. 남편은 웃었지만 나는 부아가 났다. 케케묵은 냄새를 풍기는 내 머릿속 '유교 폴더'가 열린다. 잊을만 하면 한번씩 돌아오던 제삿날, 그때마다 벌어졌던 크고작은 다툼들, 분란의 씨앗인 '그놈의' 제사를 물려주기 위해 기.어.이. '장손'을 보기까지의 곡절. 어디 그뿐인가. 내 입장에서는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16인의 조상들을 위해 아빠가 지출해야 할 돈은 로또 2등 당첨금보다 많았으면 많았지 결코 적지 않을 것이다.
몰랐으면 모를까, 파묘하는 그날, 로또를 안 살 소신이 나에겐 없다. 젠장.
파묘 D-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