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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이 Oct 30. 2024

12층 어르신께

2022년 10월 29일을 추모하며



           

 편지의 서두에는 첫인사를 적는다고 배웠고, 아이들에게도 늘 그렇게 가르치고 있지만 오늘만은 예외로 해야 할 듯합니다. 어르신이 머무는 그곳의 인사법을 제가 모르는 까닭이지요. 이렇다 할 친분이 있거나 부고를 받은 것도 아니지만 저는 그날을 누구보다 생생히 기억합니다.      


  생전에 딱 한 번 대화를 나눴을 뿐인 어르신이 떠나신 날을요.


 시댁에서 늦은 저녁을 먹고 집으로 출발할 때였습니다. 잘 시간을 넘긴 아이들은 뒷좌석에서 짜증을 연발했고, 남편은 비좁은 지하주차장에서 차를 빼느라 안간힘을 쓰고 있었어요. 옆 차와의 간격에 놀란 제 비명소리에 남편은 급히 차를 세웠고, 내려서 아무 이상 없음을 확인한 뒤 다시 차에 탔습니다. 그러고는 불안지수가 높은 아내의 설레발에 무언의 눈빛으로 일갈했죠. 무안해진 저는 서울의 야경을 포기한 채 눈을 감았어요.      



  불편한 마음에 자다 깨다를 반복했고 꿈과 현실의 경계에서 주황빛의 환영을 본 듯했습니다. 낯선 감각에 잠을 완전히 깬 저는 옆 차선을 달리는, 멋들어진 클래식카를 운전하며 음악에 맞춰 노래를 흥얼거리는 젊은이를 발견했어요. 방금 본 것은 환영이 아니었습니다. 차 앞유리 프레임을 따라 연결된 호박 조명이 발산하던 빛이었죠. 세상 혼자 사는 것 같은 흥과 분위기에 취한 젊은이를 시샘하며 다시 눈을 질끈 감아버렸습니다.   

   

 평소라면 가족 모두가 잠들어 있을 11시가 다 되어서야 사는 곳 주차장에 도착했습니다. 비몽사몽인 아이들을 이끌고 엘리베이터로 향하는데 입구 앞에 세워진 큰 차 옆에서 주위를 살피던 한 아저씨가 말을 걸었어요.      

“여기가 ***동인가 보죠?”      


 단 한마디였지만, 점잖고 무게감 있는 목소리에서 예삿분이 아니란 걸 느꼈습니다. 질문이라기보다는 확신에 가까운 물음에 신중함이 깃들어 있었거든요. 맞는다고 확인시켜드렸음에도 아무 움직임 없이 제자리를 지키던 그분의 정체가 궁금했습니다. 다시 한 번 뒤를 돌아본 제 눈에 뒷문이 열린 큰 차의 내부가 훤히 들어왔고, 순간 섬뜩했어요. 경험은 없지만 그 차가 운구차라는 걸 알아봤기 때문입니다.      


 ‘119 구급차도, 사설 앰뷸런스도 아닌 운구차라니…… 누군가 집에서 임종하셨구나.’라는 데 생각이 미쳤습니다. 동시에 후드티를 뒤집어쓴 훤칠한 청년이 저희가 탈 엘리베이터에서 나와 두리번거리기 시작했죠. 대학생쯤으로 보이는 청년은 금세 아저씨에게 다가갔고 두 사람은 조용히 속삭였어요. 자리를 이동해 먼저 엘리베이터에 탄 제가 거듭 열림 버튼을 누르다 더 이상 참지 못한 채 벽을 사이에 두고 물었습니다.


“저기…… 안 타세요?”


그러자 신중한 아저씨의 목소리가 낮게 울렸습니다.

“먼저 올라가세요.”     


 지하에서 11층까지 올라가는 동안 저는 답을 찾았어요. ‘아, 윗집 어르신인가보다.’ 이따금 인근 대학병원 유니폼을 입은 간호사와 엘리베이터에 동승했던 기억, 간헐적으로 구급대원들과 마주쳤던 기억이 연달아 떠올랐습니다. 그즈음 제가 일상에서 길어 올리는 글쓰기에 매진하고 있어서였을까요, 궁금증을 이기지 못하는 천성 탓이었을까요. 아니면 불과 며칠 전 ‘병원이 아닌 집에서 죽을 권리’에 대한 신문기사를 인상 깊게 읽어서였을까요. 저는 곧 올라올 엘리베이터가 12층에서 멈출 거라는 직감을 확인하고 싶어 안달했습니다.      


 속으로 자신을 책망하면서도 식구들을 먼저 들여보낸 뒤 복도에 남아 엘리베이터의 위치가 바뀌는 과정을 지켜보았어요. 예상대로 엘리베이터는 12층에서 멈췄고, 머리 위에서는 철제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몇 달 전, 저는 평소처럼 토요일 오전 달리기를 마치고, 듣던 노래를 마저 듣고 싶어 로비층 벽에 기댄 채 멍하니 휴대폰을 보던 중이었습니다. 인기척에 고개를 드니 어르신과 친구분들이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지나가고 있었죠. 어르신은 어딘가 불편해 보이는 동작으로 어딘가에 뒀을 공동현관 출입카드를 찾고 계셨고, 카드를 미처 꺼내기도 전에 열려버린 문에 적잖이 당황하며 저를 보셨어요. 해명을 요구하는 표정이라고 느낀 저는 폰을 들어 보이며 말했습니다.


“여기, 프로그램이 깔려 있어서 자동으로 열렸어요.”


어르신은 푸념 섞인 대답을 하셨지요.

“우리 같은 사람은 문 한 번 열기가 얼마나 번거로운데…… 그런 게 다 있었나? 어쨌든 학생 고마워요.”   

   

 학부모인 저를 어르신은 ‘학생’이라고 부르셨습니다. 눌러 쓴 모자 덕분에 제 얼굴에 새겨진 세월의 나이테를 못 보신 까닭이겠죠. 빈말이라도 좋았던 저는 출입카드 없이 문 여는 방법을 알려드리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이미 어르신의 등이 보였기에 호의는 생각만으로 그쳤습니다.      


 그 짧은 대화가 아니었다면, 깊은 밤 아파트 복도에서 이웃의 죽음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지 고민하지 않았을 거예요. 알은척을 할 순 없지만 모르는 것도 아닌 무거운 마음에 짧게나마 묵념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여간해서는 먼저 다가가는 법이 없고, 누가 다가오더라도 경계부터 하는 저는, 숙인 고개만큼이나 순식간에 좁혀져 버린 마음의 각도가 부담스러웠어요. 한시바삐 잠으로 도피하고 싶었죠.      


 물론 잠이 올 리 만무했습니다.      


 한참을 뒤척이다 습관처럼 휴대폰을 붙들고 자주 가는 커뮤니티에 막 올라온 동영상을 눌렀습니다. 여러 사람이 길거리에 누운 사람들을 상대로 심폐소생술을 하는 기이한 장면을 보고는 ‘아무리 핼러윈이라도 그렇지. 선을 너무 넘었네.’라고 혼잣말하며 혀를 찼어요. 퍼포먼스가 아니면 안 될, 아니 퍼포먼스라고 해도 용납하기 어려운 수위였으니까요.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고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었지만 방금 전까지 제가 목격한 어르신의 죽음은, 외람되게도 받아들여졌습니다. 저절로 고개가 숙어졌습니다.      


 하지만 손에 잡힐 듯 선명히 찍힌 영상 속 젊은이들이 맞이한 것 역시 죽음이었다니요. 그렇다면 저는 이미 죽었거나 죽어가는 과정에 있던 사람들을 목격한 셈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르신의 죽음과 젊은이들의 죽음을 차마 같은 선상에 놓을 수는 없었어요.      


 어쩌면 저는, 어르신과 저 사이에 존재하는 시간차만큼 제가 ‘아직’은 안전하다는 생각에 한 발짝 떨어져 ‘적당히’ 애도할 수 있었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고개가 갸우뚱거려질 뿐인 영상 속 수많은 사람들의 죽음과 저 사이에는 ‘아직’이라는 부사를 들여놓을 수가 없었습니다. 성별도 나이도 직업도 제각각인 그들의 죽음을 보며 나 역시 ‘전혀’ 안전하지 않다는 절망에 빠지고 말았으니까요. 나에게 벌어질지도 모를 비극을 한 발짝 떨어져 애도하기란 불가능했습니다.      


 ‘한평생 살아 누린 나이’라는 뜻의 ‘향년’이라는 명사 옆에 어떤 숫자가 붙은들 슬픔을 비켜날 수 있을까요. 땅에 발조차 닿지 않아 부유한 채로 세상을 등진 그들의 이름 옆에 감히 ‘향년’이라는 단어를 나란히 적어도 될까요.      


 얼마 후, 폐기물 스티커가 붙은 오래된 장롱과 식탁이 주인을 잃은 채 버려진 모습을 보았습니다. 한동안 12층의 모든 창문이 열려 있던 모습을 어르신도 보셨겠지요. 겨울을 재촉하던 비가 탐스러운 함박눈으로 바뀌고, 봄바람에 연일 꽃잎을 날리던 벚꽃도 수그러들 무렵이었습니다. 금방이라도 쏟아져 나올 듯 꽉 차 있던 어르신 댁 우편함이 깨끗하게 비워지더니 ‘12층 인테리어 공사 동의서’ 사인 요청이 이어졌습니다. 고백건대 그 공사 동의서가 반가웠습니다. 이름 석 자를 눌러쓰며 깨달았지요. 제가 추모를 끝낼 명분을 찾고 있었다는 것을요.      


 이웃의 영원한 부재를 필요 이상으로 선명히 감각하던 나름의 추모 방식은 사실, 부끄럽게도 저를 보호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뉴스에 보도되던 납득이 어려운 죽음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라 어르신의 죽음 뒤로 숨고 싶었습니다. 참담한 슬픔으로부터 도피처가 필요했다는 것이 더 솔직한 해명이겠죠.      


 아침저녁으로 제법 스산한 바람이 불더니 어느새 옷깃을 여미는 계절이 왔습니다. 살아있으니 어김없이, 가을이 왔습니다. 꾸역꾸역 계절의 무게를 견디던 어느 날이었어요. 집에 두고 나온 물건을 가지러 허겁지겁 탄 엘리베이터 안에 낯선 어른과 아이가 타고 있었죠. 저는 숨가쁜 와중에도 불이 들어온 12층 버튼에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이제 막 배꼽 인사를 배운 듯한 꼬마가 저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허리를 숙였어요. 웃지 않을 도리가 없는 해맑은 인사에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습니다. 아이의 순수한 웃음 한 조각이 내내 우울했던 제 마음을 관통하는 순간 알아차렸어요. 더 이상 숨을 수도, 슬퍼할 수만도 없다는 것을요. 겁이 나서 외면하고 싶었던 속마음을 인정하고, 어디에도 닿지 못한 위로의 마음을 내내 기억하며 살아야겠다는 것을요.      


그럼 어르신, 평안하시길 빕니다.     

깊어가는 가을날에

11층 ‘학생’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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