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서 설거지해본 사람?”
“아니, 그러니까요. 하기 싫어서 안 하는 게 아니라 엄마가 안 시켜요.”
“그럼 라면은 끓여봤어?”
“아니요.”
공부 잘하는 중학생 언니야와의 대화야.
우리 집 소녀는 호시탐탐 라면을 끓여대잖아.
심지어 김치볶음밥은 똥손 어머니보다 훨씬 맛있게 만드세요.
이 나이 먹고 굴욕이긴 하다만 인정할 건 깨끗하게 인정하는 나야 나.
학부모가 되니 전맹 자녀에게 가스 사용을 가르친다는 것이 얼마나 엄두 안 나는 일일지….
솔직히 상상만 해도 심장이 졸깃하구나.
‘난 언제 처음 내손 내라면을 했더라?’
설거지는 기숙사에서 오지게 했던 게 기억나고.
취침 점오 끝나고 밤마다 ‘너구리’ 요, ‘비빔면’이요 불나게 끓여 먹었으니까.
전기쿠커로 저시력 선배 언니가 라면을 끓이면 내가 설거지를 도맡아 했었어.
집에서는 따로 가스불 사용에 대해 배운 적은 없었던 것 같아.
그냥 자연스럽게 언젠가부터 ‘라면’ 정도는 끓여 먹었거든.
맛을 떠나서 계란푸라이나 볶음밥 뭐 그런 것들은 필요에 따라 혼자서 해 먹었더라고.
강산아, 누나 학교에서는 학습 이외에 일상생활, 그러니까 요리부터 보행, 의복, 지역사회 시설 이용 등 시각장애 학생들에게 필요한 다양한 기술 영역을 가르쳐.
사실 ‘공부만 잘하는 인간’은 좀 AI 같지 않니?
요즘은 그런 맥락으로 책도 많이 출간되더라만
매력 없잖아.
인간미도 없고.
맹학생들도 다르지는 않아서.
어느 훌륭한 복지 단체에서 학생들 해외 연수를 보내주는 프로그램을 진행해 왔대.
영어 잘하는 학생을 선발하는데, 그 똑똑한 녀석들이 해외 나가서 신변처리며 사회성 기술 능력에 어려움이 많았나 봐.
그리하여 급기야는 특수교육계에서 교육열 뜨거운 학부모를 대상으로 하는 자녀의 일상생활 등 자립 기술 습득의 중요성을 알리는 강의가….
부모는 참아 마음 아프고 불안해서 직접 할 수 없는 영역을 학교 환경에서 해결하는 시스템 얼마나 은혜롭냐고.
누나도 중·고등학교 때 근사한 가사 실습실에서 삼계탕도 만들고 과일 깎기도 배우고 청소 기술이며 뜨개질 같은 실습 활동을 즐겁게 혹은 투덜거리면서 했던 기억이 있구나.
생각해 보건대 우리가 어릴 때부터 배우고 익히느라 흘리는 땀은 궁극적으로 ‘내손 내 밥’이 목적 아닌가 싶어.
내 앞가림할 줄 알고, 내 밥벌이할 줄 알고 그럼 되는 거 아니겠어?
우리 강산이는 서울대 급 엘리트라 안내견으로 선발되어 의미 있는 생을 살았는데, 누나는 나이 50 먹도록 무엇을 하고 있는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잘 모르겠어라.
문득 허무하고 외롭고 화나고 배고프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