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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가운 열정 Feb 24. 2021

[#연재소설] 가장 보통의 학교_11

침묵의 하소연 03

외로운 향기에게도 이웃이 있었다. 

다문화가정지원센터에 다닌다고 했다. 그곳에서 만난 복지사님이라고 했다. 그 센터는 향기 어머니 같은 다문화 가정들을 위해 마련되었다. 지역 사회에서 다문화 가정들끼리의 모임을 만들어 서로 한국어와 한국 문화에 대해 배울 수 있도록 돕고 있다. 엄마는 그곳을 좋아하셨다. 집에서는 말이 없던 엄마가 센터 모임에만 가면 수다스러워졌다. 향기가 어렸을 때부터 가끔 듣다가 이제는 거의 잊어버린 베트남어로, 엄마는 한 주간의 말 뭉치를 왕창 다 쏟아내고 마음속 쓰레기통을 탈탈 비웠다. 향기는 떡이며 과일을 집어 먹는 재미로 엄마의 손을 잡고 따라다녔으나 자기와 같은 아이들에게는 말을 붙이지 않았다. 딱 보면 알아볼 수 있었다. 베트남계 한국인이구나, 아니, 한국계 베트남인이구나, 하고.



피부가 까맣고, 눈이 동그랗고, 나처럼 두리번거리는 아이들.

그들은 십중팔구 나와 비슷한 아이들이다. 이런 아이들과 어울려선 안 된다. 나처럼 답답하고 나처럼 소외된 아이들과 친구가 되어선 안 된다. 이방인의 친구는 더 이방인이 되고 만다. 그런 본능적인 방어력이 향기를 굳건히 지켜냈고, 그 사이 다른 아이들은 모두 센터 모임을 떠났다. 지금 중고등부에 남아있는 다문화 가정의 아이는 향기가 유일하다. 복지사님은 그런 향기에게 많이 집중해주셨다. 운동화를 사주기도 하고, 필요할 때는 교보 문고에 데려가 책을 골라주기도 했다. 



그랬던 복지사님 가정에 아기가 생겼다. 

주말마다 센터 모임에서 같이 점심을 먹고 오후 일정을 함께 보내던 복지사님은 몸조리를 하러 들어갔다. 향기는 이내 혼자 남겨졌고, 마음을 나눌 이웃이 사라졌다. 더 이상 모임에 가고 싶지 않았다. 엄마처럼 베트남어로든 한국어로든 마음에 있는 말들을 쏟아낼 사람이 없었다. 다문화가 모인 곳도 다문화가 아닌 곳도 어디서나 향기는 이방인이 되고 말았다. 



현장체험학습 날이 다가왔다.

나는 현장체험학습 담당자로서 고민이 많았다. 아무것에도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이 망나니들이 조신하게 사회의 법과 질서를 존중하며 삼삼오오 돌아다니다가 조용히 흩어져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유일한 목표인 것처럼 계획을 잘 짜야했다. 오랜만의 서울 나들이에 신난 아이들이 흥분하지 않도록 눌러줄 뭔가가 필요했다. 가장 만만한 게 '인증샷 찍기'. 소외되는 아이들이 없도록 모둠별로 움직일 것, 지정 장소에서 모둠 인증샷을 찍을 것, 사진은 시간이 기록되는 타임스탬프 어플만 허용, 미션이 완료되어야 출석 인정, 완료 후 단체사진 촬영, 이후 귀가 가능. 아이들이 구경하고 나중에 기억할만한 핫스폿 몇 군데를 정리하여 사진을 찍도록 했다. 



향기는 모둠에서 성실하게 미션을 수행했다.

보내온 사진 속 향기는 심지어 행복해 보이기까지 했다. 모둠으로 묶어주니까 반강제로 같이 움직이면서 뭐라도 이야기를 주고받고 밥도 같이 먹었나 보다. 모두가 해산하고 나는 교사들이랑 차라도 한 잔 할까 하고 있는데 향기가 나타났다. 그냥 보고 싶었다고 했다. 재미있게 잘 지냈냐고 어깨를 두드렸는데 뭔지 모를 애매한 미소를 지었다. 그냥 종일 듣기만 했단다. 죄다 남자애들에 대한 이야기였는데 재미는 있었단다. 밥 먹고 같이 아이스크림도 사 먹고, 귀걸이도 구경하고, 그러다가 모둠 친구들 손에 이끌려 그 자리에서 갑작스럽게 귀도 뚫었다. 어머나, 의외로 대범한 구석이 있다. 이걸 보여주러 온 거라고. 머리카락을 살짝 젖히는데, 귓불이 붉게 부었다. 별 것도 아닌데, 이게 참 별 거라고. 이러고 나니까 마음이 좀 담대해진 것 같다고. 저 용감하지 않아요? 하는데, 이런 대사조차도 용감하다. 



향기는 점점 입술에 혈색이 돌았다.

수수하던 얼굴에 꽃이 피었다. 귀를 뚫고 나니 여자애들이 환호했다. 같이 밥을 먹은 정이 있어서 그런지 오며 가며 말을 붙이기도 했다. 그러다 한 친구가 틴트를 발라주었다. 모두들 깜짝 놀라며 예쁘다고 칭찬했다. 하굣길에 같이 올리브영에 들러 틴트를 샀다. 친구들은 향기 입술에 무지개를 그리며 어두운 피부에 어울리는 색을 찾아주었다. 화사한 얼굴이 아직은 수줍은 미소와 딱 떨어지게 어울리지는 않지만, 이로써 나와의 급식 타임은 끝이 나고 있었다. 



이런 걸 의도한 건 아니었다.

순진한 애가 메이크업을 시작하다니. 하지만 이방인이 구성원으로, 문 밖에서 문 안으로 들어오기 위해서는 일종의 통과제의를 거쳐야 한다. 너희들의 문화를 존중한다는 뜻으로. 상형 문자를 몸에 새기기도 하고 절벽에서 뛰어내리기도 한다. 그 집단의 문화가 가장 가치 있다고 믿는 그것을 같이 도전하고 받아들이는 것. 말 걸어준 친구들이 입술과 귓불에 꽃이 피길 원한다면 용기를 내는 거지. 어쩌면 향기가 입술에 말을 담아 건네는 것보다는 입술에 색을 입히는 것이 그나마 덜 어색해서, 그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며 호응하는 것보다는 그나마 귀 뚫는 것이 용기가 덜 필요해서, 그냥 그들의 문화에 자신을 맡기고 한 걸음 그들이 세계로 다가간 것이 아닌지.


 

점점 예뻐지는 향기에게선 또한 점점 한국 또래 여자애들의 향기가 나기 시작했다.

여전히 아직은 낯선 모습이지만, 적어도 혼자 밥 먹기 싫어서 교실에 덩그러니 남겨지는 일은 당분간 없을 것이다. 나에겐 사실 이 학교의 모든 국면이 통과제의였고 과연 이것이 맞는 걸까 매 순간 고민하고 있지만, 향기는 나보다 조금 더 빠르게 그들을 이미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겉돌던 마음이 조금은 느슨해지고 반듯하던 경계가 무너지면서 모범생 같은 모습도 조금은 무너졌지만, 이러면 좀 어떠랴. 이제야 비로소, 이방인이 우리에게 스며들었다. 가장 낮고 가장 조그맣고 가장 별 볼일 없는 가장 이방의 교실에서. 환영해, 우리들의 향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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