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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가운 열정 Mar 10. 2021

[#연재소설] 가장 보통의 학교_14

삼총사의 진짜 싸움 03

태수는 아무래도 힘들었다.

한 번도 제대로 들어본 적이 없는 수업에 집중한다는 것이 쉽지는 않았다. 우선은 우리말이 제일 쉬우니까 국어라도 해보라고 했다. 주머니에 여태껏 있어본 적이 없는 삼색펜이 들락거렸다. 태수는 짝꿍과 자리를 떼고 혼자 앉았다. 수업 중에 시끄러우면 친구들에게 조용히 하라고 했다. 수업 중에 졸리면 자리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켰다. 말귀는 곧잘 알아듣는 것 같았다. 그렇게 며칠이 흘렀다. 태수가 또다시 찾아왔다.



"쌤, 아무래도 이렇게는 어렵겠는데요."

"어느 쪽이? 금연이, 아님 수업이?"

"수업이요. 알아들을 것 같기도 한데, 대부분은 잘 모르겠고요. 듣는 내내 엉뚱한 생각만 들어요."

"무슨 생각?"

"이거 배워서 뭐 하나, 이런 생각이요. 쌤, 저는 원래 국영수는 모르는 거고요. 음악, 미술은 관심이 없어요. 다 마찬가지예요. 컴퓨터 실습시간이나 뭐 좀 할까, 아님 체육밖에 없어요. 도대체 수업을 어떻게 들으라는 건지. 영어는 죄다 외계어고. 한자도 모르겠고. 그나마 그냥 국어랑 역사만 들어요."

"그렇게 시작하는 거야, 원래. 여태 해놓은 게 없는데, 하루아침에 귀에 팍팍 꽂힐 거라고 생각했어? 그만하면 자기 인식도 분명하고 잘했구만, 뭘."

"아니, 쌤은 진짜 무슨 해결책이 있긴 한 거예요? 나 뭐 해먹고 살아요, 쌤?"



또 그 소리, 뭐 해 먹고 사냐고.

태수는 장남이다. 정신 차리고 살아야 할 중요한 위치에 서 있다. 아래로 여동생 하나, 남동생 하나. 자기가 봐도 다 한심하다. 중2 여동생은 빨간 입술에 치마가 너무 짧고, 뭘 하고 돌아다니는지 모르겠다. 초6 남동생은 집에서 게임만 붙들고 있다. 아부지는 컴퓨터 기술이라도 하나 배워서 취업하라고 컴퓨터과에 입학시켰는데, 1학년 1학기 초, 벌써부터 똥칠했다. 맨주먹으로 세상을 떨치면서 생각 없이 여기까지 왔다. 그런데 사고 치고 갑자기 위기감과 함께 철이 들었다. 나는 누구, 여긴 어디, 내 미래는 무엇?



"좋아하는 것은?"

"운동."

"어떤 사람이 되고 싶어?"

"네?"

"무슨 일 하고 싶으냐, 이건 의외로 중요하지 않아.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가 중요하지."

"돈 잘 버는 사람."

"나도."

"뭐예요, 쌤, 상담이 뭐 이래요?"

"응. 상담이 원래 이래. 또, 돈 말고 딴 모습은 없어?"

"좋은 아빠."
"오우, 좋은 아빠, 좋네. 나도."

"쌤은 무슨 여자가 좋은 아빠예요. 상담 진짜 이상해."

"좋은 아빠 되려면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돈 잘 벌고. 잘 놀아주고. 같이 운동도 다니고. 얘기도 들어주고. 음...모르겠어요. 그 정도?"

"응. 사기 쳐서 돈 잘 벌고, 주먹 쓰면서 잘 놀아주고, 운동이라고 데리고 다니면서 사람 패는 기술 가르치고. 그런 거?"

"아, 쌤, 그런 거 아니잖아요. 오늘 왜 그래요, 진짜?"

"그럼, 좋은 아빠는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마음이면 좋을까?"

"부끄럽지 않게 살아야죠. 당당하게."

"자, 정리해보자. 운동을 좋아하는 당신이, 돈을 잘 벌고 싶어. 그럼 뭘로 돈 벌면 좋을까? 수학, 영어로 돈 벌긴 어렵겠지 아무래도? 그럼 운동으로 돈을 벌어야 해. 그런데 운동 잘해서 돈 벌면서도 뭔가 구린 구석이 없이 깨끗하게. 사회에 좋은 영향을 주면서, 우리 아빠 자랑스럽게, 그치? 운동으로 돈 잘 버는 당당한 아빠. 결론은 운동으로 좋은 일 하는 게 뭐가 있나 생각해보면 되겠네."

"그러네요."

"운동으로 좋은 일 하려면, 운동선수가 되든지. 아님 운동 관련 업무들, 운동 코치라든지, 체육관 선생님, 체육관 선생님 보조, 운동 기구 관련 사업이라든지, 운동 관련 마케팅, 또는 운동 기술을 요청하는 직업들, 체력을 많이 요하는 직업들, 정의로우면서, 그러면 뭐, 경찰, 소방관, 경호원, 뭐 이런 것들 아니겠어? 좀 더 상상력을 발휘해봐. 심지어 요즘 유아 체육도 핫하니까. 유치원 체육 선생님이라든지, 푸핫, 좀 웃기긴 하겠다. 너 삐약삐약 하는 아이들 데리고 운동하면. 요즘 생활체육도 무성하잖아. 뭐 꽂히는 거 없어?"

"하...쌤, 쌤 진짜 짱이에요. 그런 건 제 인생에서 생각도 못해봤어요. 대박이네요. 그런 게 제가 가능해요?"

"그런 거, 뭐? 뭐가 땡기는데?"

"아...쪽팔리는데, 불가능이죠."

"뭔데? 응? 아무 거나 골라잡아봐. 지금은 뭐든 일단 꿈꾸는 게 우선이야."

"쌤, 와, 저는 진짜, 와, 저는 경호원, 와, 진짜, 경호원 죽이는데요?"

어느새, 태수는 내 앞에서 공손해졌다. '제가' '저는' 이런 말을 쓰기 시작했다. 에헴, 쫌 존경스럽냐?



경호원, 강태수. 

그럼, 지금부터는 목표 없는 운동이 아니다. 유도, 합기도, 뭐든 좋으니 단을 따고 자격증도 따야 한다. 경호학과를 목표로 해보자. 그래도 조금이라도 더 취업되려면 전문대학이라도 이름을 걸어놔야 학교로 연락 와서 사람도 뽑아가고, 어디든 얻어걸릴 확률이 높다. 경호학과 찾아보자. 내신으로 들어가네. 아무 거나 세 과목, 뭐 딱 너 듣는 과목, 이런 것만 열심히 해도 문은 열려 있네. 버릴 건 버리고, 뭐 이제 와서 어쩌겠니. 따라갈 수 있는 것들과 따라가야 할 것들이 비슷해서 참 다행이다. 그치? 것봐, 금연 잘했지? 운동으로 자격증 따려면 몸 제대로 만들어야지, 재미 삼아할 수준이 아닌데. 오늘부터는 딱 세 가지만 하면 되겠다. 금연, 국어 역사 체육, 운동. 너 이것만 잘하면 돈 잘 버는 좋은 아빠 될 수 있어.



태수 얼굴이 붉어졌다.

금연으로 축 늘어진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쌤, 저 오늘부터 대통령 경호원, 청와대 한번 들어갑니까? 오냐. 대통령 경호원한테 나중에 삼청동에서 밥이나 한 끼 얻어먹어보자. 콜? 태수는 그날부터 단 한 번도 징계위원회에 얼굴을 비친 적이 없었다. 적어도 내가 담임을 맡았던 그해 내내 그랬다. 아이들은 예전보다 태수를 더 무서워하기 시작했다. 목표가 있는 눈빛은 힘이 다르다. 우리 반은 그때부터 수업시간만큼은 정말 조용해졌다. 경호원은 수업 분위기부터 경호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가 부르면 언제든지 달려왔다. 크고 작은 심부름뿐만 아니라 내가 뭐라고 나서기도 전에 반을 (분위기, 쓰레기, 뭐 할 것 없이) 정리해두었다. 그리하여 나는 2, 3학년들 사이에서도 북부 서열 1위를 스스로 마당쇠처럼 자동으로 구르게 하는 무시무시한 '쎈캐'가 되었다. 이럴려던 게 아닌데, 쩝.






<제목 이미지: '영화 경호원' 스틸컷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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