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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가운 열정 Mar 14. 2021

[#연재소설] 가장 보통의 학교_16

삼총사의 진짜 싸움 05

우리 잘생긴 모델을 빼놓을 순 없겠다.

서열 3위까지는 그래도 좀 쳐주니까. 모델은 내가 맨날 모델하자고 아무리 꼬셔도 끄떡도 안 한다. 미모로 널리 정평이 난지 오래이고, 넌 미모가 진로라고 가르친 교사들도 한 둘이 아니었을 터, 이 아름다운 얼굴이라면 사실 아무 짓도 하지 않아도 그냥 왠지 먹고살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이런 얼굴을 가진 자에도 슬픈 사연이 있다.



모델은 첫날부터 시종일관 지각이었다.

단 하루도 빠짐없이 1교시 중간에 들어왔다. 어머니랑 통화해도 소용이 없었다. 모델은 심지어 매일 미안해했다. 녀석은 살아가는 법을 잘 알고 있다. 미안해하면 더 뭐라고 하지 못한다는 걸, 심지어 그 잘생긴 눈매에 애교를 듬뿍 담으면서 쌤, 헤헤, 하고 한번 웃어주면 영원히 사면받을 수 있다는 걸, 녀석은 잘 이용할 줄 안다. 그래도 한 달째가 되니 그 미모에 홀렸던 나도 조금 정신이 돌아왔다. 출결 때문에 열린 징계위원회에는 본인도 어머니도 못 오셨지만, 그날 있었던 뒷산 서열 사건 관련한 학폭위에는 어머니를 모실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는 모델처럼 키가 크지도, 그렇게 아름다운 얼굴도 아니었지만 주먹을 쓰는 아들의 어머니치곤 기품이 넘쳤다. 올해 간병휴직을 내어 큰 아들과 함께 시골에서 요양 중에 잠시 오셨단다. 처음 듣는 이야기에 적잖이 놀랐다. 모델의 형이 많이 아프단다. 얼마 전 큰 수술을 했다. 뇌에 종양이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좋은 음식, 좋은 공기 속에 편안히 쉬어야 할 때이다. 고등학교 입학하는 둘째가 마음에 걸리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혼자 지낼 수 있을 것 같아 지방에서 근무 중이신 아버지를 따라 시골에 작은 집을 얻어 잠시 지내고 있다고 하셨다.



모델은 아침에 혼자 일어나 등교한다.

문득 지각보다 방과 후 생활이 더 걱정이 되었다. 부모님이 안 계시는 빈 집, 이 철없는 3인자가 혹시 분별력 없는 생활에 젖어있지나 않을까 하여 어머니와 의논하고 싶었다. 어찌 됐든 폭력으로 서열을 정하는 세계에 오락가락하는 몸이라, 뭐든 조심해두는 것이 나쁘지 않다.

"어머니, 아이가 식사 같은 건 어떻게 해결하나요? 저녁을 매번 사 먹을 수도 없고, 집에서 밥을 혼자 해 먹을 리도 없고요. 신경 쓰이시겠어요."

"혼자 지내는 건 마음이 쓰이죠. 그래도 우리 아들, 셰프예요. 제법 혼자 잘해 먹으니까요."

"어머, 정말요?"

"네. 이미 한식 양식 자격증 다 땄구요. 지금은 중식도 자격증 준비하고 있어요. 집에서도 종종 요리 곧잘 해요. 얘기하니까 우리 아들이 해준 스파게티가 먹고 싶네요."

장남에 관한 속상한 이야기로 풀이 죽어있던 어머니가 막내 요리를 지금이라도 먹은 것 같이 목소리에 힘이 빳빳해지셨다. 방과 후, 주 2회 시내 요리 학원에 수업 가고, 나머지는 집에서 밥을 해 먹는단다. 혼자 먹기 싫은 날은 모든 식사를 안주로 만드는 버릇을 가진 무리들을 불러 같이 먹는다. 딴 건 몰라도 요리는 즐겁다. 큰놈 건강에 마음을 쓰느라 늘 못 챙겨줘서 못내 미안한 작은놈이 그래도 요리에 마음을 붙여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와우, 사람이 다시 보인다.

고질적인 지각대장, 서열 3위 주먹꾼, 화사하게 폭발하는 미모 하나로 세상 쉽게 살 것 같은 철딱서니가 이제 보니 미남 셰프의 탄생이다. 병마로 시달리는 어두운 집안 분위기에 형 뒷바라지로 늘 정신없는 엄마를 대신해서 햇살 같은 요리로 가족들을 즐겁게 했을 것 생각하니 문득 뭉클하다. 아직 고1인데, 요리를 그렇게 잘하면, 뭐 앞으로 먹고 살 걱정은 안 해도 되겠다. 주먹만 좀 잘 정리하면, 발목 잡힐 일이 없을 텐데. 어쩌다 주먹에 엮였을까?



모델의 형은 어렸을 때부터 아팠다.

엄마는 휴직과 복직을 반복하며 아들 둘을 키웠다. 모델은 동생이었지만 늘 형 노릇을 했다. 아픈 형과 같이 목욕을 했으며 형의 식사가 끝날 때까지 자리를 지켰다. 형과 등교하고 형의 교실 문 앞에서 기다렸다가 형과 같이 하교했다. 병약한 형은 곧잘 넘어졌다. 종종 형의 가방을 대신 들어주기도 했다. 친구들과 같이 몰려다녀야 할 때에도 형을 집에 바래다주는 것이 먼저였다. 형 교실 앞에 서있다 보면 동생보다 못한 형이라고 수군대는 놈팽이들도 있었다. 형을 놀리는 놈팽이들 중 한 놈만 딱 붙잡고 후려 팼다. 맞은 아이네 엄마는 항의하지 못했다. 아픈 아이를 놀린 대가치곤 입술에 피 한 방울 정도는 가벼웠기 때문이다. 형 친구들은 언젠가부터 형보다 키가 더 커지기 시작한 동생을 보면 슬금슬금 피했다. 형은 두 살 더 많았지만, 형 친구들을 때려눕힌 동생은 자기 또래들에게도 두려운 존재가 되었다. 사실 주먹 솜씨보다는 그 기세에 눌려 아무도 형을 건드리지 못했다.



초등에서 중등으로 옮기면서 착한 동생은 좀 지쳤다.

형은 이미 1년의 유예로 동급생들보다 한 학년 뒤처지기 시작했고 점점 집에 있는 시간이 더 많아졌다. 때마침 지친 동생은 이제 형을 따라다니는 일을 그만두었다.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며 그간 조금씩 쓰던 주먹을 더 자주 단련해나갔다. 알고 보니 울분이 있었다. 엄마는 관심도 없는 것 같고, 만날 형은 내 몫이고, 그런 형은 자꾸 아프고, 불쌍한데 짜증 나고, 나는 좀 자유롭고 싶고, 어디든 내 맘대로 할 수 있다면 이놈의 집구석 그냥 탈출해버리고 싶었다. 중2 때 딱 한번 가출을 했다. 갈 데가 없었다. 친구네는 엄마의 손길이 뻗쳐있을 것 같고, 주변에 베풀어 둔 은혜가 없어서 뜬금없이 가도 되냐고 물어볼 염치도 없었다.



그냥 길바닥을 헤매다가 시간이 제법 흘렀다.

막차도 끊어진 정류장에 앉아있는 녀석에게 포장마차 아줌마가 남은 어묵 꼬치 하나를 쥐어주었다. 총각, 와서 하나 먹고 어여 집에 들어가라고, 여기 이러고 돌아댕기다가 엄한 데 발 빠지면 못 가는 애들도 있다고. 국물 한 모금 마시고 정신 챙겨 집에 가라고. 버스 끊어져서 갈 방법도 없는데, 막무가내로 가라신다. 종이컵에 국물도 쥐어주고, 남은 순대도 좀 썰어주고, 아줌마가 포장마차 설거지며 뒷정리 마무리하는 내내 국물이랑 부스러기랑 아무 말없이 먹었다. 먹는 내내 궁금했다. 이 맛은 뭘까? 이게 뭐지? 이집 뭐야? 어묵을 난생처음 먹은 사람처럼, 맛이 신기했다. 쩍쩍 갈라진 영혼에 물이 참방참방 차오르는 것 같은 따뜻한 맛. 이게 뭐라고 먹어 없어져가는 동안에도 벌써 그립다. 내일도 오면 먹을 수 있을까?



하지만 내일 또 그 포장마차에 가진 않았다.

그 대신 요리 학원에 갔다. 밤새 아이를 찾고 기다리다 눈이 퉁퉁 부은 엄마는 하루 가출로 금방 돌아온 둘째가 해달라는 대로, 즉각 요리 학원에 3개월치를 선납했다. 아무리 울분에 차 주먹질을 해도 얻을 수 없던 환희가, 그날, 그 어묵 국물 한 모금에 입안 가득 차올랐다. 이런 국물을 먹고 싶다. 매일 먹을 수만 있으면 좋겠다. 그게 이유다. 내가 맛있게 먹고, 또 누군가에게 나도 이런 따뜻한 어묵 국물 한 모금이 되고 싶다. 응어리가 풀리는 기분이 든다.



모델은 생각보다 겸손하다.

서열 3위쯤 되면 그래도 이만한 학교에서 좀 거들먹거려도 되는데, 전혀 티를 안 낸다. 매일 굽신굽신 죄송해하며 뒷문을 열고 1교시에 입장한다. 갈 바를 모르는 중생들을 종종 거둬 먹이고, 엄마가 걱정하지 않도록 교복 와이셔츠도 잘 다려 입고 다닌다. 그리고 종종 놀러 나가는 시내에서 누군가 '엔터테인먼트'라고 적힌 명함을 내밀며 프로필 사진부터 찍어보자고 해도 끄떡도 안 한다. 뚝심 있게 그냥 잘생긴 '요리사'가 되고 싶다. 섬섬옥수 고운 손으로 가지런히 썰고 소금을 흩뿌리는 모습이 누군가의 얼굴을 갈기는 모습보다 훨씬 예쁠 것 같다.



모델, 네 이놈, 너의 죄를 네가 알렷다.

왜 나는 맛있는 거 안 해주냐? 너 요리 잘한다며, 하고 아는 척했더니. 쌤, 다이어트 중 아니세요? 한다. 네가 해주면 고열량도 감수할 수 있다고 하니, 미안하지만 나는 여자한테는 요리 안 해준단다. 이상한 신조로군, 게다가 내가 무슨 여자냐. 이럴 땐 아무 의미 없는 젠더에 대해 조심스럽게 주장해본다. 그래도 쌤, 내가 그런 식으로 요리하는 건 좀 아니거든요. 그리고 어떻게 그런 걸 들고, 아, 노노노, 아, 못 해요, 못 해.



1교시 수업이 끝나고 돌아오니 늘 그랬듯 폰을 가지고 들어온다.

오늘도 지각. 폰을 책상 위에 놓고 작은 쇼핑백도 올려놓는다. 안에 종이 포일로 돌돌 말린 무엇. 열어보니 어머, 상큼 풀잎 가득한 샌드위치다.

"야, 너 누가 지각하는 주제에 이런 거 만들어 오래?"

"왜 해다 줘도 그래요?"

"이런 거 필요 없응게요, 지각하지 말라고요."

"어젯밤에 만든 거예요. 엄마가 먹고 싶대서. 벌써 눅눅해요. 소문내지 마시고요. 이제 안 해준다, 내가. 에잇. 혼나기만 하고."

아흑, 먹기에도 아깝다. 이 녀석, 오늘따라 마음도 쫌 잘생겨가지고. 먹으면서 없어지는 이 맛이 벌써부터 그립다. 나도 오늘부터 요리 학원 가야 하나?





<제목 이미지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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