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잔혹극(1977) 루스 랜들
[세계추리문학전집] 46/50
"어린 시절부터 영감을 준 앙리 조르주 클루조와 클로드 샤브롤, 두 분께 감사드립니다." 2019년 《기생충》으로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고 봉준호 감독이 남긴 소감이다. 그의 영화는 풍자와 은유를 포함해 다양한 방식으로 한결같이 계급 문제에 천착했다. 역시 부르주아 가정의 위선을 비웃었던 클로드 샤브롤에 봉준호가 끌린 이유는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직접적으로 《기생충》 관람 전에 봐야 할 영화로 《의식》을 꼽기도 했다. 클로드 샤브롤의 90년대 최고작인 《의식》은 루스 랜들의 미스터리 소설 『활자잔혹극』을 영화로 옮긴 작품이다.
본명 루스 렌델과 필명 바바라 레인. 두 이름으로 활동한 작가는 1930년 생으로 영국 추리 문학을 대표하는 거장이다. 1963년 시작되어 50년 동안 이어진 대표작 '웩스퍼드 경감 시리즈' 외에도 반짝이는 걸작을 다수 내놓았다. 가끔 포근함이 느껴지기도 하는 애거서 크리스티와 달리 루스 랜들 미스터리를 대표하는 단어는 '긴장감'이다. 조금만 공기를 더 불어 넣으면 터질 것 같은 풍선의 팽팽한 위기감이 건조하고 절제된 문체와 어우러져 독자를 고양했다. 소설 역사상 가장 인상적인 첫 문장인 『활자잔혹극』의 도입부는 이를 잘 보여준다.
"유니스 파치먼이 커버데일 일가를 살해한 까닭은, 읽을 줄도 쓸 줄도 몰랐기 때문이다." 과격하게 정직해서 불안하다. 결말과 범인이 공개되었지만, 이야기에 빨려든다. 도서 미스터리도 아닌데 범인을 밝히고 시작하는 기괴한 범죄 소설. 작가는 범인 찾기의 재미를 포기하는 대가만큼 충격을 키워 살인 동기를 강조하는 쪽을 택했다. 첫 문장을 조금 수정하면 유니스는 자신이 문맹이라는 사실이 '들통났기 때문에' 살해를 저질렀다. 단순히 부끄러워서는 아니다. 글 따위는 몰라도 된다는 자신의 신념이 송두리째 부정당했다는 절망감과 모멸감 때문이다.
『활자잔혹극』에서 '문맹'은 '글을 아는 상태'의 반대가 아니라 사회적 지위와 존재감의 상실을 의미한다. 글을 모르고 교육도 못 받았고 남과 교류하지 않은 유니스에게 하필 감정까지 없다. 자신이 문맹임을 개의치 않는다. 문명 속 원시인으로 살고 있는 나만의 세계에 타인이 침입하는 것만을 경계할 뿐이다. 하지만 유니스 자신도 다른 누군가에게는 틈입자다. 《테오레마》와 《기생충》이 그랬듯 외부인은 견고해 보이는 부르주아 가정을 허물어버린다. 처단을 완수한 유니스는 평온을 되찾았을까? 계급 충돌이 빚어낸 위태로운 파멸극의 끝을 주목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