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업으로서의 소설가>는 무라카미 하루키가 쓴 자전적 에세이입니다. 그 책 45페이지에 이런 대목이 나와요.
나는 그때 아무런 맥락도 없이, 아무런 근거도 없이 문득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래, 나도 소설을 쓸 수 있을지 모른다'라고.
소설이라곤 단 한 편도 써본 적 없던 하루키가, 어느 쾌청한 날 야구 경기장에 앉아 이런 생각에 빠져든 겁니다. 이때의 경험을 그는 ‘일종의 계시’ 같은 거라고 말해요. 그 계시는 ‘뭔가가 하늘하늘 천천히 내려왔고, 그것을 두 손으로 멋지게 받아낸 듯한 기분’을 선사했죠.
그의 경험을 충분히 이해합니다. 내게도 그런 순간이 있었으니까요.
중학교 2학년 때인가? 손등으로 배구공을 튕기며 시장 골목을 걷고 있었죠. 공을 받으려고 고개를 든 순간, ‘아무런 맥락도 없이, 아무런 근거도 없이’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아, 나는 작가가 되겠구나. 아주 늦은 나이에.
그 흔들림 없는 신념이 내 삶을 떠받드는 근간이 되었죠. 이런저런 글을 끄적이고 이런저런 책을 읽으며 살아왔어요. 시간은 넉넉했어요. 어차피 늦은 나이에 작가가 될 거니까. 이 길로 갔다가 아닌가? 하며 돌아오고, 저 길로 갔다가 또 아닌가? 하고 되돌아왔죠.
운명은 언제 실현되는 걸까? 도대체 그 ‘늦은 나이’라는 게 몇 살일까?
아무런 성과도, 보람도 없는 날들이 이어졌죠. 나는 지쳐갔어요. 신념이 점점 변질되기 시작했어요. 작가는 다음 생에! 이번 생은 ‘독자’로!
죽어라 책만 읽었죠. 소설, 인문학, 불교철학, 천문학, 양자역학…. 그렇게 헤매다 40대에 접어든 어느 날, 내 갈 길이 ‘동화’라는 사실을 깨달았어요.
생각해 보면 의문입니다. 왜 ‘이른 나이’가 아닌, ‘늦은 나이’일까요? 나는 왜 그 계시를 당연하게 받아들였을까요?
쉬운 길을 두고 어려운 길로 돌아가는 천성이 이 계시에도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어요. 제가 사는 아파트 뒤로 자동차 전용 도로가 나 있어요. 이 도로를 이용하면 김해 시내건, 부산이건 쉽고 빠르게 갈 수 있어요. 그런데 나는 이토록 편한 길을 두고 불편한 길로만 다녔어요. 이유는 알 수 없어요. 내 머릿속엔 자동차 전용 도로 존재 자체가 없었으니까요. 신호에 걸리고, 속도제한에 브레이크를 밟아가며 힘든 길로만 다녔죠. 이 아파트에 사는 5년 내내!
며칠 전, 길을 헤매다 우연히 자동차 전용 도로를 타게 되었어요. 막힘없이 달리는 도로 위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어요. 내가 어떤 사람인지 깊이 깨닫는 순간이었죠. 그리고 다음 날, 내 작품 <쥐들 G들>이 대상작으로 결정되었다는 당선 소식을 듣게 되었어요. 세상은 온통 상징 투성이랍니다!
제 관심사는 동물권과 환경문제에 집중되어 있어요. 스스로 ‘동물의 대변인’을 자청해 글을 쓰고 싶어요.
발간을 앞둔 <하늘에서 떨어진 닭>과 <쥐들 G들>은 모두 ‘동물권’을 다룬 장편 동화입니다.
인간이 온통 지구를 독차지하고 있잖아요. 인간과 그들의 먹이인 가축을 제외하면 이 행성을 터전으로 살아가는 야생동물은 한 줌도 되지 않아요. 수많은 종이 멸종위기에 처해 있어요. <쥐들 G들>에 등장하는 ‘햇살바람쥐’ 역시 그런 처지에 놓인 종입니다.
‘G들’은 햇살바람쥐 퇴치를 목적으로 개발된 인공지능 방역로봇입니다. 생김새가 햇살바람쥐와 똑같죠. 아이러니하게도 이 로봇 중 하나가 멸종위기에 처한 햇살바람쥐를 돕게 됩니다.
초고는 무척 복잡했어요. 아이들과 쥐들 세계를 왔다 갔다 하며 서술하다 보니 이야기가 산만했어요. 어떻게 하면 플롯을 단순화할까? 고민하다 방정환 선생님 작품인 <시골쥐의 서울 구경>에서 영감을 얻게 되었어요.
아하, 내 이야기를 <시골쥐의 서울 구경> SF 버전으로 만들면 되겠구나!
‘쥐들’과 ‘G들’만 남겨놓고 등장인물을 대폭 정리했죠. 그러자 이야기가 술술 풀려나갔어요. 그렇게 완성한 작품을 방정환 문학 공모전에 응모하게 된 겁니다.
시놉시스는 3년 전에 썼어요. 어렵게 초고를 완성했지만, ‘이건 아니다’ 싶었죠. 아닌 건 알지만, 답을 몰랐죠. 이럴 땐 묵혀두는 수밖에 없어요. 세월에 발효가 되거든요.
올 초에 큰맘 먹고 장독 뚜껑을 열어보았어요. 작품이 잘 삭았더라고요. ㅋㅋ 그래서 후딱 꺼내 단숨에 다시 써버렸죠.
수상 소식을 전해 들은 다음 날, 심사평이 발표되었어요. 심사평에는 ‘어린이 심사위원’의 의견도 함께 담겨 있었어요. 아이들의 소감을 읽다가 그만 울고 말았어요.
저에게 글쓰기란 ‘모니터’라는 벽을 마주하고 앉은 면벽수행에 다름 아닙니다. 그래서 장편만 고집하는지도 몰라요. 등단이 목적이었다면 단편을 써서 신춘문예에 투고했겠죠. 그러나 그건 내 길이 아니었어요.
나는 왜 이런 소재를 붙들고 씨름하는 걸까? 화두에 답을 얻어야만 했어요.
결론은 이랬어요. 내 마음 편하자고 이런 이야기를 쓰는구나! 지구상에서 고통받는 수많은 가축과 야생동물에게 지구인을 대신해 사죄하고픈 마음에 이런 이야기를 쓰는구나!
그런데 놀랍게도 어린이 심사위원이 내 마음을 고스란히 알아줬어요. 그 아이들이 내게 이렇게 말하는 듯했어요.
작가야! 우린 네 마음 다 알아. 그러니까 흔들리지 말고 계속 써.
지금껏 어느 누구에게도 받아보지 못한 위로를 그 순간 경험했어요. 그리고 힘을 얻었습니다. 흔들리지 않고 글을 써나갈 자신감을 얻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