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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장메이트신화라 Oct 13. 2021

옆으로 목이 안 돌아가던 아이

엄마의 정성으로 잘 살고 있습니다

내 오른쪽 목 아래에는 흉터가 있다. 손가락 두 마디 정도로 푹 파인 흉터라 그냥 봐도 잘 보인다. 어릴 때 '목 수술'을 했다고만 엄마는 이야기하셨다. 너무 오래되어 병명도 잘 모른다고 하셨다.


물리치료학과로 진학하고서야 내 흉터의 병명을 알게 되었다. '사경'이라는 증상으로 두부(머리)가 한쪽으로 기울어진 상태를 말하는 그것이었다.

보통 신생아 사경일 경우에는 빠른 시간 내에 치료를 해야 한다. 마사지 등으로 치료를 하거나  정형외과적 수술이 필요하기도 하다. 나는 후자에 속했다.


왼쪽에서 누가 나를 부르면 고개를 돌려 보지 못하고 몸통을 돌려서 쳐다보았단다. 오른쪽으로는 잘 돌아가는데, 왼쪽으로는 안 돌아갔던 것이다.


80년대 초에 태어난 나를 데리고 엄마는 소아과마다 다녔다고 했다. 나름 지방의 소도시였고, 인근에서 큰 도시였기 때문에 병원이 많은 편이었다. 당시에 방문한 소아과마다 별 이상이 없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했다. 엄마는 목을 한쪽으로만 돌릴 수 있는 아이가 '별 이상이 없다'는 것에 쉽게 동의할 수 없었다고 했다. 첫 아이 었고 엄마 당신이 많이 아팠기 때문에 아이가 아픈 것에 특히나 예민하게 반응했다.


그렇게 소아과마다 찾아다니는 걸 알게 된 동네 누군가가 이야기해줬단다.

"그라지말고 정형외과를 함 가봐라."


정형외과 의사는 아이를 보자마자 커다란 백과사전 같은 책을 펴서 엄마에게 보여줬단다.

나와 같이 비뚤어진 목 사진이 여러 장 있더란다. 의사는 수술만 하면 정상으로 돌아온다고 간단한 수술이니 바로 날짜를 잡자고 했단다. 엄마는 '곧 추석이니 명절 쇠고 올께예.'라고 이야기했고, 더 큰 병원으로 나를 데리고 갔다. 거기서도 같은 이야기를 들었고, 술 날짜를 잡았다.


아이들만 있는 병실이 가득 차 나는 어른들이 쓰는 병실로 배정을 받았단다. 처음에 아이가 입원하니  병실에 있던 사람들이 싫은 내색을 비췄단다. 아이 환자라 자주 울고 시끄러울 거라고 그랬을 거라는 엄마의 이야기였다. 하지만 나는 당시에 유행이던 '나미'의 <빙글빙글>을 그렇게 잘 불렀단다. 병실에 있던 이모, 할머니들에게 귀여움을 받으며 그렇게 병실에서 쫑알쫑알 잘 지냈었나 보다.


수술 이후 동네로 돌아온 나는 친구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샀다. 그건 다름 아닌 '보조기' 때문이었다.

협착된 흉쇄유돌근을 절개하는 수술을 받은 나는 경추 지지를 하는 보조기를 하게 됐는데, 엄마 말로는 조끼처럼 상부까지 착용하는 보조기였단다. 그걸 한동안 하고 다니니 동네 친구들이 내가 하고 있는걸 자기도 갖고 싶다고 엄마에게 조르는 일이 벌어졌다고. 아무도 하지 않는 보조기를 한동안 하고 다녔고, 병원에서는 재활치료를 집에서 하게끔 코치를 했단다.


"화라야 목 운동하자~"

라는 엄마의 목소리가 들리면 '싫어!'라며 도망가기 바빴단다. 가까스로 잡은 아이의 몸을 엄마의 다리로 고정하고 병원에서 가르쳐준 재활 스트레칭을 한 것으로 보인다. 수술을 했지만 근육이 굳을 수 있으니 계속 목을 옆으로 돌리게끔 했다고. 아이는 아프고, 하기 싫고, 못 움직이게 몸을 누르고 있으니 울어댔단다. 엄마는 그런 아이를 보면서 같이 울었다고.



초등학교 4학년 때 뜀틀을 하다 무릎을 다쳤다. 이후로 안 가본 한의원, 병원이 없었고, 매번 무릎에 물이 차 큰 주사기로 물을 빼기도 여러 번이었다.


그런 무릎이 나을 무렵 대학교 1학년 봄, 얼굴에 좁쌀 같은 화농성 종양이 생겼다. 자가면역질환일 수도 있다는 피부과, 조직 검사를 했지만 별 이상이 없다는 대학병원, 한센병 전문 피부과에서의 독한 약을 먹기도 하고, 각종 민간요법, 1시간 거리의 한의원에서 기약 없는 치료를 몇 년간 받기도 했다.


엄마는 내가 치료를 위해 쓴 돈만 해도 대학을 몇 번 졸업했을 거라고 하셨다.  무릎이 아플 때도, 피부 종양이 생길 때도 엄마는 '목 자주 주물러줘라.'라고 하셨다. 목 근육이 다시 굳어서 '병신'으로 살까 봐 '사람 구실 못' 할까 봐 엄마는 늘 신경이 쓰였던 거다.


너무나도 약하고 자주 아팠던 몸으로 아이를 낳았는데, 그 아이가 자주 아프니 엄마는 당연히 당신의 탓으로 여기곤 했다. '물려줄 게 없어서 아픈 것만 닮게 하고...' 그런 말도 자주 하셨다.


하지만 그런 엄마의 보살핌으로 2.4kg으로 태어난 나는 다이어트를 신경 써야 하는 평범한 40대 여자로 잘 살고 있다. 낳은 아이 둘은 그리  아프지도 않고 잘 크고 있다. 그때 엄마의 적극적이고 예민함이 아니었다면 내 목은, 무릎은, 피부는 어떻게 되었을지 모른다. 나 자신도 어떤 사람으로 살고 있을지도 모르겠고.


지금 나는 엄마가 만들었다.

엄마의 사랑으로 나는 자랐다.  

엄마와 나, 수술 전(목 근육이 불룩하며, 오른쪽으로 기울어진게 보인다)

엄마, 감사하고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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