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안재연 Feb 01. 2021

<혐오와 수치심> 1편

팬데믹 상황에서의  구분짓기에 대하여

이 책을 관통하는 주제는 혐오와 수치심이라는 감정이 법의 근거가 되는 데 한계를 갖는다는 것이다. 


간단하게 예시를 들자면 다음과 같은 사례에 대해 저자는 반대한다. 


미국에서 있었던 판결이다. 밖에서 친구와 술을 마셨던 한 청년은 피해자인 다른 남성의 차를 얻어 타고 집으로 오는 길이었다. 둘은 섹스할 여성을 찾아 돌아다녔다. 잠시 후 청년이 “어디서 내가 펠라치오를 받을 수 있을까?”라고 묻자, 피해자는 “내가 해 줄 수 있어”라고 답했다. 그들은 주변의 사람이 없는 야구장으로 갔다. 피해자가 그의 바지를 내리자 청년은 그를 발로 차고 짓밟아 죽였다. 재판에서 피고인 측은 동성애적 구애가 살인을 설명하기에 충분한 도발이라고 주장했다. 검사는 이에 반대하지 않았으며, 판사는 이러한 항변을 인정했다. 


캘리포니아의 한 판사는 절도죄를 선고받은 남자에게 “전 절도죄로 보호관찰을 받고 있습니다”라고 적힌 셔츠를 입고 다니도록 명령했으며, 음주운전으로 유죄를 받은 사람에게 “음주운전 유죄 판결”이라고 적힌 스티커를 자동차 범퍼에 부착하도록 조치했다. 


전자는 혐오 감정을 법적 판결의 지침으로 삼은 경우이며, 후자는 수치심의 감정을 공적 실행의 수단으로 삼은 경우이다. 사람마다 의견이 다를 수 있겠지만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두 판결 사례에 문제가 있다고 느낄 것이다. 이것은 혐오와 수치심이 법에서 적용되는 범위에 대한 사회적 인식의 개선이 이루어졌기 때문이지만, 과거에 이러한 판결은 실제로 이루어졌으며 현재에도 모호한 경계를 오가며 혐오와 수치심에 기반한 판결은 이루어지고 있다. 물론 두 사례가 보편적인 법적 판결의 경향성을 대표하지는 않지만, 이를 통해 혐오와 수치심이라는 감정이 법에서 수행하는 역할을 둘러싼 논쟁은 현재진행형 임을 알 수 있다.


저자 마사 너스바움은 법철학자이자 윤리학자이다. 또 그는 폭넓은 학문적 배경을 바탕으로 공적인 이슈에 대해 활발하게 발언하고 있는 사회 참여적 지식인이다. 그는 현대 사회의 갈등에 내재하는 중요한 감정인 혐오와 수치심을 분석하며 인간의 존엄성을 존중하는 자유주의 사회에서 혐오와 수치심이 법적 역할을 담당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을 전개한다. 이 책을 통해서 그는 혐오와 수치심은 정확하게 어떤 감정이며 우리의 사회적 삶에서 맡고 있는 역할은 무엇인지, 최종적으로 이러한 감정들이 어째서 법의 근거가 되는 데 한계를 갖는지 설명한다. 


혐오와 수치심의 한계를 설명하기에 앞서 감정 자체는 법률 체계에서 중요한 판단의 요소로 작용한다는 것을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대부분의 형법에서 범인의 정신 상태는 매우 중요하다. 감정을 고려하지 않으면 우리의 많은 법률적 실천의 이론적 근거를 이해하기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어떠한 침해가 포악한지, 어떤 상실이 인간에게 큰 슬픔을 주는지 등 인간이 지닌 어떤 취약성이 두려움의 근거가 되는지에 대한 공유된 인식이 없다면, 왜 법이 특정 형태의 위해와 손상에 주목해야 하는지를 이해할 수 없게 된다. 혐오와 수치심 역시 같은 맥락에서 범인의 행위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요소이다. 하지만 저자는 다른 감정과 달리 혐오와 수치심은 형벌의 경중을 따지는데 참고할 요소로서 작용할 수는 없다고 본다. 그 이유에 대해 먼저 혐오 감정을 통해 설명을 하자면 다음과 같다.




<혐오>

혐오는 오염물의 체내화라는 관념에 초점을 둔 복잡한 인지적 내용을 지니고 있다. 혐오에 대한 핵심적인 정의는  '역겨운 대상의 (입을 통한) 체내화 가능성에 대한 불쾌감’이다. 혐오의 대상은 단순히 먹기에 부적절한 것이 아니라 오염물로 여겨져야 한다. 그래서 종이, 모래는 우리가 먹기에 부적절하다고 여겨지지만 혐오를 유발하지는 않는다. 


또한 혐오는 기피나 위험과 구별된다. 혐오는 당사자가 지닌 대상에 대한 인식에 따라 같은 냄새라도 다른 혐오 반응을 이끌어 낼 수 있다는 점에서 기피와 다르다. 실험자들을 대상으로 병 속에 치즈와 배변이 각각 들어있다고 설명한 뒤 냄새를 맡게 했을 때, 병 속에 치즈가 있다고 생각한 집단은 병 속 냄새를 좋아했지만 배변이 들어있다고 생각한 집단은 역겹고 불쾌하다고 느꼈다. 
혐오는 위험과도 다르다. (독버섯과 같이) 위험한 대상은 그것을 섭취하지만 않는다면 같이 있어도 아무렇지 않지만,  혐오스러운 대상은 그렇지 않다. 사람들이 바퀴벌레가 주변에 있는 것을 거부하는 것처럼 말이다. 


결국 혐오는 감각적 요소라기보다는 그 대상에 대한 주체의 인식이라고 볼 수 있다. 이렇듯 혐오는 주로 관념적 요소에 의해 유발된다. 관념적 요소를 구성하는 것은. 대상이 지닌 속성 또는 기원, 그리고 그것의 사회적 역사이다. 


보다 구체적으로 혐오는 자신의 몸 안과 밖이라는 경계와 관련이 있다. 혐오는 문제가 있는 물질이 자신의 체내로 들어올 수 있다고 여길 때 생긴다. 즉 혐오스러운 것은 이질적인 것으로 여겨져야 한다. 우리 몸의 부산물이 신체에서 떨어져 나오면 혐오를 유발할 수 있지만 우리 몸 안에 있는 경우에는 혐오스럽다고 여기지 않는 것도 이 때문이다. 혐오가 담고 있는 관념적 내용은 역겨워 보이는 물질을 섭취함으로써 자신이 저열해지거나 오염될 수 있다는 생각이다. 


이와 관련해서 저자가 오늘날 미국에서 중심적인 혐오의 대상인 남성 동성애자에 대해서 해석한 부분이 인상적이다. 남성 동성애자와 대비하여 여성 동성애자의 경우 혐오의 대상이 되는 경우는 보다 적다. 비슷하게, 이성애자인 여성들이 남성 동성애자들에게 부정적인 감정, 두려움, 도덕적 불편함을 느낄 수는 있지만, 혐오의 감정을 느끼는 경우는 거의 없다.

혐오를 일으키는 것은 일반적으로 남성 동성애자에 대한 남성의 사고인데,  그 배경에는 항문으로 침투될 수 있다는 상상이 스며 있다. 남성의 몸 안에서 정액과 배설물이 함께 혼합된다는 생각은 상상 가능한 가장 혐오스러운 사고 중의 하나다. 이러한 무의식적 경계심을 배경으로 남성은 남성 동성애에 대한 혐오의 감정을 갖고 경계를 지으려는 시도를 한다고 저자는 설명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혐오는 우리 자신이 지닌 동물성에 불편함을 느끼는 것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인간은 일정 부분 동물성을 지니는 한계를 분명 갖고 있지만 동시에 이러한 동물성을 부정하고자 하는 본성이 존재한다. 혐오에 담긴 핵심적 사고는 동물성을 간직한 동물의 분비물을 섭취하면, 우리 자신이 동물의 지위로 격하될 수 있다는 생각이다. 


혐오는 자신이 지닌 동물성을 부정하고자 외부의 동물성에 대해
경계와 구분을 짓고 자신은 동물성을 갖고 있지 않다고 분리하려는 태도이다.  
결국 궁극적으로 모든 혐오의 기반은 ‘우리 자신’인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혐오는 역사 속에서 특정 집단과 사람들을 배척하기 위한 강력한 무기로 이용되어 왔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구별할 수 있는 집단을 필요로 하는데, 혐오는 이 때 진정한 인간과 저열한 동물 사이의 경계선의 역할을 하며 특정 집단을 배척한다. 


인간은 이러한 구별짓기를 통해 자신이 가진 동물성을 부정하고 스스로를 인간적인 모습에 더 다가가는 것으로 생각해 왔다. 그래서 유사 이래 특정한 혐오의 속성들은 반복적이고 변함없이 일정한 집단들과 결부되어 왔으며, 실제로 그들에게 투영되어 왔다. 특권을 지닌 집단들은 이들을 통해 자신들의 보다 우월한 인간적 지위를 명백히 하려고 한 것이다. 유대인, 여성, 동성애자, 불가촉천민, 하층 계급 사람들은 모두 이러한 맥락에서 혐오적인 존재로 구별되어 왔다.


결국 혐오라는 감정은 전염 혹은 (실제하지 않는)위험에 대한 신비적 생각과 완벽한 인간에 대한 불가능한 열망을 담고 있기 때문에 비합리적인 사고이며, 이러한 감정이 법적으로 규제할 수 있는 행위에 대한 기준이 될 때 취약한 집단과 사람들을 정치적으로 예속하고 주변화 시킬 수 있기 때문에 법의 근거가 될 수 없는 것이다.


 혐오는 자신이 지닌 인간적 약함을 숨기기 위해 자신과 구별되는 특정 집단을 만들어 ‘비정상성’을 강조한다. 모든 인간은 존엄하다는 사실은 혐오 감정 앞에서 잊혀지기 쉽다. 예를 들면, 흉악 범죄에 대한 엄벌주의를 주장하는 대중은 끔찍한 살인자를 ‘더러운 벌레’로 여기며 범죄자의 ‘비정상성’을 강조한다. 이러한 사태에 대해 저자는 범죄자의 잘못에 대해 분노해야지, 이들을 혐오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범죄자의 인간적 존엄성을 중요시하는 이유도 있지만, 이러한 혐오의 감정이 자신 안의 약함과 문제를 반성적으로 보지 못하도록 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녀는 혐오 감정을 일차적 이유로 범죄 행위를 규정하거나 특정 범죄에 대해 가중 처벌이 이루어지는 것을 반대한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