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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영철 Oct 20. 2024

왜 그렇게 그렸니? 서양미술사

4-2. 지극히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로마 미술(3~4세기)

지는 로마 뜨는 기독교, 고대의 종말.



우리는 앞서 2장에 걸쳐 로마 미술에 대해 알아보았다. 고대 시대의 예술 발전의 원동력은 집권 체제의 지지(후원)에 기반하였기에 집권층이 원하는 정치의 방향성에 종속될 수 밖에 없다. 특히, 로마 시대의 미술은 제국의 운영과 선전을 위한 실용적 기능 이상을 요구하지 않았기 때문에 제국의 후반으로 갈수록 미술의 발전은 더뎌질 수밖에 없었다.


미술의 암흑기라 불리는 중세 시대를 향해 가는 3~4세기, 역사적 변환기를 맞는 중대한 사건이 발생하는데 로마의 기독교 공인(AD 313년)과 비잔티움으로의 수도 이전(AD 330년)이다. 이 두 가지 사건을 관통하는 하나의 키워드가 있으니 그것은 바로 '기독교'이다. 기독교는 일신론적 특성과 배타적 신앙 체계로 인해 다신교를 믿고 황제를 추앙하는 로마와는 체질적으로 맞지 않아 그간 엄청난 박해를 받아 왔다. 당시 기도교인들은 이러한 박해 속에서도 '카타콤'이라는 무덤을 개조한 지하 묘굴에서 생활하며 자신들의 종교적 신념을 지키고자 했으니 로마는 기독교인들은 죽였지만, 기독교인들의 숫자는 줄이지 못했다.


로마의 산 프리실라 카타콤(좌)과 벽화 <타오르는 불길 속의 세 사람> / AD 3세기 경



"지하 묘굴의 그림을 그렸던 화가는 불굴의 신앙심과 신의 구원을 감동적이고 고무적으로 보여주기 위해서는 페르시아 옷을 입은 세 남자와 불길, 그리고 하나님의 구원을 상징하는 비둘기를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만 그리면 그것으로 충분했다. 명확성과 단순성의 개념이 충실한 모방이라는 개념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되기 시작한 것이다."_P129/Story of Art


아무튼, 이러한 고진감래 끝에 정치적 기반이 약했던 '콘스탄티누스'에게 민중의 기반을 제공한 기독교가 황제 등극의 결정적 계기를 만들어 주었고, 마침내 313년 '밀라노 칙령'을 통해 종교적 자유를 공인받게 되었다. 이어 392년에 로마의 국교로 선포됨으로써 본격적인 '유일 신'의 시대인 중세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전성기를 지난 3~4세기의 로마 미술은 여전히 그리스-로마의 사실주의와 고전적 조각 양식을 따랐지만, 위와 같은 분위기 속에 점차 기독교의 영향과 로마 시대 후반의 사회적 혼란으로 현실적인 표현보다는 종교적 상징과 초월적인 분위기를 강조하게 된다. 특히, 3세기 100년 동안 로마는 35명의 황제가 교체될 만큼 혼돈의 시기였으며, 미술가들은 더 이상 그리스 미술의 유산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 듯 보였다.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거대상>은 단명하는 기존 황제들과의 차별성을 강조하기 위해 전통적인 황제상 이상의 권위와 정통성을 보여주어야만 했던 당시 시대의 절박한 반영이라고 볼 수 있다. 우선, 형태의 거대함으로 그의 신성함을 강조하고자 하였고 고전적인 얼굴 비례에서 벗어나 크고 이상화된 눈, 간결한 얼굴 표정, 그리고 과장된 턱과 강조된 매부리 코를 통해 콘스탄티누스를 단순한 인간이 아닌 마치 로마 신화의 신적인 존재로 묘사하고 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 거대상 유물 파편(상)/AD 315년 경, 최근 복원된 높이 약 13m 거대상(하) / 2022년



또한, 기존 로마 황제의 개선문이나 승전비로부터 부조와 조각들을 가져와 재사용한 <콘스탄티누스 개선문>은 제국의 연속성을 강조하면서 그 자신이 로마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는 정통성의 메시지를 담고 있으며, 미술사적으로는 로마의 전통적 기념물 양식과 이후 비잔틴 양식으로 이어지는 과도기의 예술적, 정치적 성격을 잘 드러내는 중요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콘스탄티누스 개선문/315년
콘스탄티누스 개선문의 '4개의 시대', 개선문에 활용된 역대 로마 황제의 부조 부문



아래 사진은 콘스탄티누스 개선문의 조각 중 유일하게 건축 당시 제작된 부조로 이전의 사실적이고 자연스러운 인체표현과는 대조적으로 경직되고 비정상적인 비례감을 보여 준다. 특히, 황제의 모습(현재는 보시는 바와 같이 소실됨)이 중앙에 위치하고 다른 등장 인물보다 크게 표현하는 등 정형화되고 상징성을 강화하는 표현 방식은 비잔틴 미술을 거쳐 중세시대로 넘어가는 당시 미술의 과도기적 시대상을 보여준다.  


콘스탄티누스 개선문의 부조 일부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의 초상 조각과 같이 놀라울 정도로 실물을 닮은 작품에 익숙한 로마 인들은 이러한 작품들은 솜씨가 빈약하다고 퇴짜를 놓았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들이 보기에는 이러한 작품들이 그 나름의 생명을 지니고 있는 것 같이 보이며, 고대 세계의 종말을 의미하는 기독교의 대두를 눈으로 보았고 마침내 그것을 받아들였던 사람들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준다."_P 131/Story of Art


이로써 찬란했던 고대(고전)시대는 기독교의 부흥과 서로마의 붕괴로 그 막을 내리고 중세시대를 맞이하게 되어 이른바 '미술의 암흑기'로 접어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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