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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영철 Nov 10. 2024

왜 그렇게 그렸니? 서양미술사

6-1. 오직 신과 함께, 중세미술(8~9세기)

혼돈의 시대, 기독교와 게르만의 상생의 조건



동로마 제국과 달리 서유럽은 서로마 몰락 후 약 500년간 혼돈의 시기를 보냈다. 곰브리치는 이 시기민족의 대이동과 전쟁, 봉기로 점철된 이른바 '암흑의 시대'라 평가하 현존하는 작품이나 유물이 거의 없다고 언급하였다.


"이 시기의 가장 흥미로운 점은 어떤 분명하고 통일적인 양식이 생겨나지 않았으며 오히려 수많은 서로 다른 양식들이 갈등을 일으켜 혼돈된 상태이고 이 암흑의 시대가 끝날 무렵에야 그러한 갈등이 겨우 마무리지어졌다는 사실이다."_P157 / Story of Art


'중세 미술' 시작 전 서유럽의 역사를 간략히 훑어 보면, 게르만족 세력 중 가장 성공한 왕조는 프랑크 왕국으로, 이 프랑크 왕국을 최초로 통합한 왕이 메로빙거 왕조를 설립한 클로비스 1세이다. 그는 가톨릭교 개종 후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이 되어 481년부터 약 30년간 통치하였으며 사후 약 250년 간 왕조가 유지되었다. 751년 프랑크족의 카롤링거 가문의 피핀 3세가 쿠데타로 왕위에 오르면서 메로빙거 왕조는 막을 내리고 카롤링거 왕조가 시작되었으며, 로마 가톨릭 교회와의 밀접한 관계를 통해 서유럽 정치세력의 중심으로 떠오르게 된다.


순서대로 클로비스1세, 피핀3세, 신성 로마 황제 추대식의 카롤루스 대제



피핀 3세의 아들이 그 유명한 카롤루스 대제로, 카를 대제(독일어) 혹은 샤를마뉴 대제(프랑스어)라고 불리우는 신성 로마 제국의 시조이시다. 그는 분열되었던 프랑크 왕국을 다시 한번 통일하면서 800년, 로마 교황 레오 3세에 의해 서유럽의 황제로 즉위하게 된다. 그는 서유럽을 하나의 제국으로 통합하여 로마 제국의 전통을 부활시키고자 하였고, 그 결과 '카롤링거 르네상스'라는 문화적 부흥기를 이끌었다.


카롤루스 대제 사후, 그의 손자들 간의 갈등으로 843년 베르됭 조약에 따라 카롤링거 제국은 세 개의 왕국으로 분열되어 서프랑크 왕국(현재의 프랑스), 동프랑크 왕국(현재의 독일), 중프랑크 왕국(이탈리아 북부와 저지대 지역)으로 나뉘었으니, 이는 지금 유럽의 국경 형성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카롤링거 르네상스 시기 프랑크 왕국 영토/814년(좌), 프랑크 왕국 분열 후 영토/843년(우)



이 시대의 서유럽 미술은 초기 헬레니즘 문화처럼 게르만족의 토속 문화와 기존 로마 문화가 결합하여 혼합되고 변형되는 인고의 과정을 겪게되는데, 우리는 그 대표적인 사례를 교회 건축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고대 이래 알프스 북부 지역에 지어진 건축물 중, 천장이 둥근 첫 번째 건축물인 <아헨 대성당>이 그 주인공으로, 카롤루스 대제가 790년~800년경에 궁정 예배당으로 건설하였다. 팔각형 바실리카와 둥근 지붕이 특징인 <아헨 대성당>은 고전 및 비잔틴 양식과 게르만족의 목재 건축 양식이 섞인 초기 로마네스크 양식의 전형으로 이후 본격적인 중세 시대 전까지 교회 건축물들의 모방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카롤루스 대제가 이 성당에 묻힘으로서 정치적, 종교적 상징성뿐이 아닌 그의 유산을 더욱 공고히 하는 계기가 되었다.


아헨 대성당 전경(좌)과 팔각형 돔(우)/8세기 말
아헨 대성당의 초기 모습을 묘사한 복원 상상도/1904년, 8C말 최초 건축 후 지속적인 증축으로 현재 모습을 갖춤
아헨 대성당 팔각형 돔 내부 예배당(좌)과 비잔틴 문양의 모자이크로 장식된 내부(우)



프랑크 왕국에서 도버 해협 건너편에 터를 잡은 앵글로색슨족에게도 기독교는 여지없이 영향을 주게 된다. 7세기 말에 영국의 린디스판 수도원에서 필사된 <린디스판 복음서>에는 페이지마다 복잡한 켈트 문양, 동물 형상, 그리고 기하학적 패턴이 그려져 있고 비잔틴의 영향을 받은 성경의 인물(복음사가)들의 초상화가 포함되어 있다. 이 아름다운 복음서에 대해 곰브리치는 서유럽의 토착미술이 기독교의 새로운 요구에 어떻게 적응하고 있는지를 지적하였다.


린디스판 복음서/698년 경
린디스판 복음서의 켈트 문양으로 장식된 십자가(좌), 성 마테(우)



"필사본에 그려진 복음서 저자들과 성인들의 형상은 원시인들의 우상처럼 딱딱하고 괴상하게 보인다. 이러한 그림들은 토착적인 미술 전통속에서 성장한 미술가들이 기독교 서적의 새로운 요구에 적응하기 어려웠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 그림들을 단지 조잡하다고만 보는 것은 잘못이다. 그들의 전통으로부터 훈련받은 눈과 손으로 필사본 위에 아름다운 문양을 그릴 수 있었으며 이로써 서유럽 미술에 새로운 요소를 가미시킬 수 있었다. 고전적인 전통과 토착 미술가들의 취향이 서로 충돌하는 바람에 무엇인가 전혀 새로운 미술이 서유럽에서 자라기 시작했다."_P161 / Story of 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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