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유일하게 이집트 양식의 철칙들을 뒤흔들어 놓은 사람이 있었으니 제18왕조의 아멘호테프 4세(재위 BC1352~1335년)이다. 제위 4년째 해, 아크나톤으로 개명한 이 파라오는 다신교였던 당시 이집트의 종교에 개혁을 단행한 것으로 유명한데 그 배경에는 아버지인 아멘호테프 3세의 악정으로 인해 아몬 신전 사제들이 왕권을 견제하면서 그 세력이 커진 것이 직접적인 원인이었다. 전대의 약해진 왕권을 다시 강화하고 아톤 신과의 개인적인 영적 교감에 따른 종교적 신념 등의 사유로 진행된 그의 종교개혁은 당시에는 혁신적인 사건이었다. 이러한 혁신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기존 관습의 타파, 새로운 정치이념 등이 수반되듯이 아크나톤은 수도를 이전하고 새로운 사회질서를 정립하고자 했으며 문화, 예술분야 또한 개혁의 대상이었다. 후대 역사가들은 이 개혁을 당시 새로 이전한 수도의 이름을 따 ‘아마르나 개혁’이라고 하였고, 이 개혁은 다신교를 ‘아톤’이라는 일신교로 바꾼 인류 최초의 종교개혁이며 그를 인류 최초의 일신교 신자로 평가하고 있다.
아크나톤의 종교개혁은 그의 죽음과 함께 실패로 끝났지만, 이집트 미술에 혁신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기존의 엄격하고 형식화된 스타일에서 벗어나 자연스럽고 사실적인 표현을 강조하였고 인물의 현실적이고 인간적인 면모를 담아내고자 했다. 아톤 숭배의 종교적 상징성과 가족 중심의 이미지, 예술적 자유와 창의성은 이 시기의 미술을 독특하고 특별하게 만들었으며, 아크나톤 시대가 끝난 후에도 이집트 미술사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아멘호테프 4세와 그의 아내 네페르티티
“초기 파라오들의 그림에서 발견되는 엄숙하고 딱딱한 위엄은 하나도 볼 수 없고 대신에 그가 태양의 신 아톤의 축복을 받으며 아내 네페르티티와 함께 그들의 자녀들을 사랑스럽게 껴안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_P 67/Story of Art
딸들을 안고 있는 아멘호테프 4세와 네페르티티 / BC 1345년 경
위 그림을 보면 정면성의 법칙을 지키고는 있으나 아크나톤과 자녀를 겹쳐서 그리고 발가락을 표현한 단축법, 볼록한 아랫배 등을 볼 수 있으니 기존 이집트 미술과는 다른 자연주의적이고 사실적 표현이 발전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렇게 표현 방식이 다양해지고 있다는 것은 당시 미술가들이 보다 자유롭게 창의력을 발휘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제18왕조 시대에 이러한 개혁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이집트보다 덜 엄격하고 굳어 있지 않은 외국의 작품들에 주의를 돌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외국의 섬나라인 크레타에는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사람들이 살고 있었는데 그곳의 미술가들은 빠른 운동감을 표현하는데 기쁨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스 미케네에서 발굴된 사자 사냥용 단검은 운동감과 유연한 선을 보여주고 있는데 당시 신성한 규범에 얽매이지 않아도 되었던 이집트의 장인들을 감동시켰음이 틀림없다.”_P 68/Story of Art
미케네 출토 단검 / BC 1600년 경
아크나톤이 아톤 신앙과 평화주의를 탐닉해 기본적으로 정복 왕조의 성격을 가진 이집트 제국을 약화시켰고 아마르나 개혁이 기존의 사제 계층을 분노시켰을 뿐 완전히 제거하지 못하고 남겨둠으로써 제대로 된 왕권 강화에 이르지 못하고 결국 그가 죽자마자 기존 신앙이 다시 회복되어 버렸다. 제임스 헨리 브레스테드가 집필한 <고대 이집트의 역사>에 의하면, "아크나톤은 파라오의 권위를 강화하려고만 했을 뿐 정작 그렇게 높인 권위를 민생에 쓰려고 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인기가 없을 수밖에 없었다."라고 혹평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