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염없이 눈물이 흘렀었다, 20년을 다니 던 직장을 그만두던 그날 새로운 길을 찾고 싶어서 스스로 한 결정임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떠났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로. 900여 Km를 배낭을 메고 걷는 길-본래는 가톨릭 순례길이지만 그 당시 나는 세례를 받기 전이었다-오랜 직장 생활로 피폐해진 마음을 비우고 생각을 정리하고 이제 또 다른 삶을 살아야 할 때가 왔으니 계획을 세우겠다는 야심 찬 목적을 가지고 약 40일간의 긴 도보 여행을 시작한 것이다.
동이 트기 전 날파리와 사투를 벌여가며 새벽 산길을 출발해도 조금 걷다 보면 롱다리 외국인들 특히 씩씩한 독일 사람들이 '부엔 까미노'를 외치며 성큼성큼 곁을 지나간다. 새벽에 출발해서 정오까지 걷고 도착한 마을에서 알베르게(숙소)를 찾아 짐을 푼 다음 마을을 어슬렁 거린다. 다음날 아침으로 먹을 샌드위치 도시락을 위해 간단한 재료를 사고 마을 바에 들어가 식사를 한다. 물론 맥주가 곁들여지고 여행자들이 모여 앉아 여러 나라 말이 뒤섞인 대화가 이어진다. 가벼운 이야기부터 이 여행을 시작한 내면의 이유까지, 그런데 국적을 불문하고 공통적인 것은 사람들이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새로운 시작을 위한 '쉼'으로 이 길을 선택했다는 것이다.
방안에 짙게 배인 파스 냄새를 맡으며 내 다리에도 역시 파스를 뿌리고 물집이 잡히고 터져서 성한 곳이 없는 발에 바셀린을 바른 후, 베드 버그(빈대)에 물리지 않도록 침대 위에 벌레 기피제를 잔뜩 뿌리고 나서도 메고 다니는 개인 침낭을 머리끝까지 덮어쓰고 잠을 청한다. 그 길 위의 지극히 평범한 하루 루틴이다.
마음을 비우겠다, 생각을 정리해보겠다, 계획을 세울 것이다, 이런 건 전혀 생각할 수 없었다. 끝없는 포도밭을 걷는 내내 헉헉 거리는 내 숨소리만 들렸고 낯선 길 위에 앞서가는 이들의 뒷모습 조차 보이지 않을 때면 마음은 조급해졌고 밤이 되면 고단했다. 물론 행복한 고단이다.
걷는 일에 탄력이 붙었고 그만큼 조심성도 없어졌다. 어느 날 밤 베드 버그에 물렸는데 물린 자리가 어마어마하게 부어올랐다. 병원을 찾아가니 보는 사람마다 큰 병원으로 가라 한다. 도시를 옮겨 큰 병원을 찾아갔더니 여러 가지 검사 끝에 베드 버그에 물린 건데 내가 특히 알레르기 반응이 있다고 한다. 갑자기 너무나 두려웠다. 계속 걸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한국으로 돌아오는 경유지인 파리에서 며칠 휴식을 취한 후 집으로 돌아왔다, 그 길을 다 걷지 못한 채.
그리하여 나에게는 아직 꿈이 남아있다.
길은 걷는 자의 것이다
문밖의 모든 길이 그대의 것이다
박노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