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좋은 시간,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좋은 그곳, 발리에서 열흘을 머무르는 동안 하루도 빼놓지 않고 지킨 유일한 일과는 저녁에 선셋을 보러 해변으로 나가는 일이었다. 우리가 발리에 갔을 때는 우기와 건기의 중간쯤이어서 어떤 날은 선셋을 기대할 수 없을 정도로 흐린 날도 있었다. 그래도 늘 같은 시간에 해변에 앉아 태양이 바다에 잠기고 하늘과 바다가 하나가 되는 그 순간을 기다린다. 하늘은 어느 한순간도 같은 얼굴을 보여주지 않았고 우리는 그 환상적인 쇼 타임에 매번 감동하는 것이다. 이렇게 밋밋하고 단조로운 그래서 더욱 행복했던 발리의 기억 창고에도 단 한 번의 엄청난 사건이 있었다.
여행하는 나라에 따라 한국에서 현지 화폐로 환전을 해가는 경우도 있고, 달러를 준비해서 현지에서 그 나라 화폐로 환전하는 경우도 있다. 발리의 경우 달러를 가져가서 필요한 만큼만 현지 화폐로 환전을 해서 사용하는 편이 나을듯했고 발리 시내에 환전소는 엄청 많다. 어느 날 점심때쯤 환율이 유리했던 환전소가 눈에 띄어서 그날은 다른 때보다 좀 많은 금액(USD 300)을 한 번에 환전을 하고 기분 좋게 돌아서니 마침 한국 식당이 바로 보였다. 이젠 미시고랭 미고랭 (볶음밥, 볶음 국수) 그만 먹고 싶다 생각하던 차여서 망설임 없이 들어가서 김치찌개를 주문했다. 식당의 주인은 한국 여자분이었는데 여군 출신의 무척이나 호탕하신 분이셨다. 무계획이 계획인 우리에게 어디를 가면 좋을지 장소는 물론 방법까지 자세히 설명을 해주셔서 우리에게도 드디어 계획이 생겼다. 여러 가지 내용의 대화가 오가던 중 바로 앞에 있는 환전소가 환율이 좋아서 거기서 환전을 했다고 했더니 식당 주인분께서 갑자기 걱정스러운 얼굴로 거기 환전 사기하는 곳이라고 말씀하셨다. 발리가 환전 사기가 좀 유명하긴 해서 우리도 환전하는 동안 눈을 동그랗게 뜨고 깜빡이지도 않을 만큼 주의 깊게 보았고, 금액까지 정확하게 확인했기 때문에 그럴 리는 없다고 웃으며 인사를 하고 숙소로 돌아왔다.
그래도 들은 말이 있으니 마음이 좀 찜찜하여 환전한 금액과 사용한 금액을 계산해보니 돈이 반쯤 부족한 것이 아닌가. 다시 계산해봐도 역시 부족하다. 어쩔 수 없이 한국 식당 사장님께 도움을 청했다. 식당 사장님은 한국 사람들이 이렇게 당하는 일이 많은데 절대로 그냥 넘어가면 안 된다고 격분하시며 평소 친하게 지내는 현지인에게 동행을 부탁했고 우리 모두는 환전소로 찾아갔다. 그리고 우리가 식당 사장님의 친구라며 제대로 처리해 주지 않으면 경찰을 대동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아 결국 다시 그 돈을 찾아왔다. 식당 사장님 말씀에 의하면 환전 사기가 있다는 것을 서로 다 알지만 경찰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그것을 빌미로 환전소와 경찰과의 관계가 불편해지는 것을 환전소 측에서 피하고자 돌려준 것이란다. 정말 신기한 일이다. 도대체 언제 어떻게 돈을 뺄 수가 있었을까?
그날 우리는 저녁 식사로 한국 식당에서 소주에 삼겹살을 쏘았다. 발리에서 한국 소주는 약 2만 원이 좀 넘을 정도로 비싸기로 유명하다. 거기 모인 우리는 마치 전투에서 이긴 것처럼 기분이 좋았고, 우리나라 여군은 아마도 소주의 주량을 보고 뽑았나 보다. 그날 우리의 자축 파티 비용은 300불이 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