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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연휴에는 아무 데도 가지 않았다

by 김종화

이번 연휴에는 아무 데도 가지 않았다. 역대급으로 긴 연휴였지만, 거의 집 밖으로 나가지를 않았다. 매년 꼬박꼬박 내려가는 가족 모임에도 가지 않았다. 바쁘다는 핑계를 대긴 했지만, 실제로 그 정도로 바쁘지는 않았다. 해야 할 일들도 있긴 했지만, 일을 끝내놓고도 굳이 내려가지 않았다. 일 년에 한두 번 친척들과의 모임의 의미를 경시하거나 귀찮았기 때문이라거나, 5~6시간씩 고속도로에서 보내고 싶지 않아서라거나 하는 이유만은 아니었다. 뭔가 해야 할 것 같은, 할 법한 모든 일들과 잠시 거리를 두고 싶었다.


훌쩍 일본에 식도락 여행을 가거나, 제주도에 동아리 지인의 집에 가서 내내 프리다이빙을 하거나, 산악회 사람들을 따라 멀리 원정 클라이밍을 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면 긴 연휴를 알차게, 그때만 할 수 있는 일들로 꽉 채워 보낸 것 같은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연휴 기간 한참 전에 여행을 예약할 정도로 계획적이지는 못하고, 프리다이빙을 그 정도로 좋아하는지는 모르겠으며, 연휴 내내 비가 내려 클라이밍을 가기도 영 애매했다. 가끔씩 날씨가 좋아 보일 때면, 지인들에게 어디를 가볼지 찔러보기도 했다. 하지만 다들 저마다의 일들로 바빠 거절했고, 그때마다 조금은 비참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이래선 안 되겠다 싶었다.


연휴 초에, 라디오처럼 틀어 놓은 유튜브 어디선가 들은 말이 뇌리에 박혔다. 니체인가 쇼펜하우어인가가 했다는 “어떤 사람의 진가는 그 사람이 고독할 때 무엇을 하는가에서 나타난다.”… 같은 말이었다. 외로울 때가 아니라 고독할 때. 혼자 있는 상태라는 것은 동일하지만, ‘외로움’이 타인과의 단절에서 오는 부정적이고 수동적인 감정이라면, ‘고독’은 스스로 선택한 홀로 있음 속에서 자신에게 집중하는 긍정적이고 능동적인 상태라고 한다. 어쩌면, 명절에 가족들을 만나는 것들이나, 각종 소모임의 지인들과 만나 무엇을 하는 것 등은 외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치는 것처럼 느껴졌다. 진정 고독한 상태가 됐을 때, 내가 정말로 무엇을 할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어서, 뭔가 ‘하는 것 같은’ 상태로 있기 위한 변명거리를 만드는 것처럼 느껴졌다.


사실, 그것이 무엇에 대한 변명인지는 알고 있었다. “너 이래도 게임 안 만들래?”라는 마음속 깊은 목소리에 대한 변명이었다. 주중에 일하는 동안에는 당연히 회사일 만으로 바쁘고 피곤해서 작업을 못하고, 주말에는 날씨 좋은데 벽 타러 가야 해서 작업을 못하고, 날씨가 안 좋아서 어차피 바깥 활동이 어려운 날이면 미뤄왔던 해야 하는 일을 처리해야 해서 작업을 못하고, 그 해야 하는 일을 질질 끌다가 에너지를 다 써서 작업을 못했다. 그렇게 영영 작업을 못한다는 변명거리를 만들어가며 몇 년간 목소리를 외면해 왔다. 그렇게 개인 작업 안 하는 상태가 기본이 되어 버린 평범한 직장인으로, 그럭저럭 먹고살만하고 갖출 것 갖춘 듯 무탈하게 살아온 지 몇 년이 지났다. 긴 연휴 동안, 아무런 변명 거리도 남겨두지 않았을 때, 내가 과연 뭔가 다시 끄적일 수 있을지 확인해보고 싶어졌다. 연휴가 끝나기 전에, 책상에 붙여둔 ‘사이드 작업’이라는 포스트잇을 뗄 수 있을까?


물론 바로 뭔가 작업을 시작한 것은 아니다. 오랫동안 미뤄왔던 숙제 같은 오래된 게임의 업데이트를 해치우고, 집안 구석구석을 정리했다. 너저분하게 물건을 쌓아둔 짐 방을 정리하고, 안 쓰는 물건들을 처분했다. 쌓인 재활용품을 버리고, 싱크대에 찌든 기름때를 구석구석 세재로 닦았다. 더 이상 정리할 것이 전혀 없을 때까지 집안을 정리했다. 미뤄왔던 영화, 소설, 애니 등 많은 작품을 감상했다. 하루 3킬로씩 뛰기를 하루 종일 비가 오는 날은 제외하고 매일 했다. 연휴 내내 비가 오는 것이 오히려 좋았다. 밖으로 나가서 뭔가 해야 할 것 같은 가능성들을 원천 차단해 주니깐. 흐릿한 날씨에 거실에 창문을 열고 선선한 바람을 맞으며 듣는 빗소리가 편안하게 느껴졌다. 더 이상 바빠서, 해야 할 일이 있어서, 누군가 만나러 가야 해서, 집안 정리가 안 돼서 등등 어떤 변명도 할 수 없는 단계가 되었다.


오래된 하드디스크 한편 냉동고처럼 보관되어 있는 폴더의 미완성 프로젝트들을 새 컴퓨터로 옮겼다. 각각 5년, 10년이 넘은 프로젝트로, 저마다 그때는 나름 꽤 열정적으로 만들고 가능성도 보였지만, 세상에 내놓지는 않고 봉인해 버린 것들이다. 이거 해서 뭐가 되겠나, 이게 시장에 먹히겠나, 또 이런 게임 만드나, 이전 게임만큼 성공할 수 있을까, 내가 이걸 만들 수 있을까 등등… 수많은 이유로 중단한 것들이다. 너무 오래된 프로젝트라, 프로젝트를 열자 예상대로 지금 환경에서 열었을 때 수많은 에러가 났다. 폐기된 라이브러리, 쓰지 않는 함수 등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막막했다. 이것들이라도 다시 끄적거려 볼 수 있을까? 뭐가 되든 안되든, 돈이 벌리든 말든 그냥 나를 위해, ‘게임 제작’이 취미이자 일이었던 상태로 돌아가기 위해, ‘게임을 만드는 사람’으로서의 모습을 되찾기 위해, 완성이든 아니든 뭔가 내볼 수 있을까?


폐기된 라이브러리를 사용하는 오래된 코드를 수정하고 구식 엔진 버전을 업데이트해 갔다. AI에게 구식 코드를 보여주고, 그때는 맨땅에 헤딩해 가며 짰던 코드들이 꽤 괜찮다는 평가를 들으니 괜히 으쓱해졌다. 그때 짜며 가려웠던 부분을 긁어주니 뭔가 해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5년 전에 내가 짠 꽤나 복잡한 구조의 코드를 보며, 이놈은 이때 어떤 생각으로, 이걸 이렇게 짰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새로 바꾼 부분과 예전 코드가 뒤섞이면서, 많은 문제가 튀어나왔지만, 완전 먹통이던 프로젝트에서 하나씩 기능들이 되살아날 때마다 조금씩 쾌감이 느껴졌다. ‘아, 나 이런 거 좋아했지.’, ‘내 생각대로 뭔가 동작하게 하는 거 좋아했지.’, ‘나 이런 거 잘하지.’


아직 핵심적인 기능들을 다 살리지는 못했지만, 그때 그만뒀던 지점에 점점 다가가고 있다. 그때 왜 그만뒀는지도, 어떤 한계를 느껴서 어떤 식으로 비켜가려고 하다가 맥이 빠졌는지도 다시 느껴진다. 세상에 내놓을 정도의 뭔가 되려면 꽤나 시간이 걸릴 것 같다. 하지만 이 정도면 연휴가 끝나기 전 ‘사이드 작업’ 포스트잇을 떼어버릴 정도는 될 것 같다. 이 글이 또 다른 다짐이 무색한, 부끄러운 글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 굳이 포스트잇을 붙여 놓지 않아도, 날씨가 좋아서 어딘가 나가야 할 것 같은 날에도, 뭔가 하고 누군가를 만나야 할 것 같은 때에도, 기꺼이 하게 되는 하고 싶은 일이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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