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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보적인 채색화가' 천경자 전시가 드디어…

석기자미술관(223) 특별기획전《내 슬픈 전설의 101페이지》

by 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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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례없이 길었던 한가위 연휴 기간에 딱 하루, 줄곧 내리던 비가 그치고 반가운 해가 나온 그날, 서울미술관은 나들이객들로 아침부터 북새통을 이뤘다. 많은 이가 그토록 기다리던 천경자 전시가 아니었던가. 탄생 100주년이었던 2024년을 변변한 회고전 하나 없이 그냥 지나가 버린 건 참으로 유감스러운 일이었다.


해가 바뀌어 2025년은 천경자 화백 작고 10주기가 되는 해다. 고맙게도 서울미술관이 이 뜻깊은 해를 그냥 넘어갈 수 없다며 천경자 전시를 여는 지난한 과업을 떠맡아줬다. 천경자 작고 10주기 특별기획전 《내 슬픈 전설의 101페이지》가 9월 24일(수)부터 내년 1월 25일(일)까지 서울시 종로구 부암동 서울미술관에서 열린다.


20251008_120310.jpg 내 슬픈 전설의 49페이지, 1976, 종이에 채색, 서울미술관 소장
20251008_123036.jpg 여인, 1975, 종이에 채색, 개인 소장
20251008_121904.jpg 윤삼월, 1978, 종이에 채색, 개인 소장



이 전시는 2006년 갤러리현대가 개최한 천경자 생애 마지막 전시 《내 생애 아름다운 82페이지》 이후 20년 만에 열리는 가장 큰 규모의 천경자 전시다. 194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에 이르는 천경자 화백의 주요 작품 80여 점을 한자리에 모았을 뿐 아니라 저서, 도서 장정, 화가의 성장 과정과 작품 제작 과정, 여행기 사진과 편지 등 다양한 자료를 함께 소개한다.


전시 개막을 앞두고 열린 기자간담회 자리에 사회부 기자 몇이 왔다고 한다. 그들이 전시 기자간담회 자리에 나타난 까닭이 무엇이겠는가. 혹시 <미인도>가 나오면 가십거리가 될까 싶어서였다. 화가가 세상을 떠난 지도 어느덧 10년이 지났는데 저 케케묵은 ‘위작 논란’이 아직도 천경자라는 이름을 꼬리표처럼 따라다닌다. 심히 유감스럽다. 손꼽히는 미술품 수집가인 서울미술관의 안병광 회장이 오죽했으면 <기자님들을 모시는 글>에 다음과 같은 내용을 적었겠는가.


“날이 서 있는 여러 주장들, 귀를 솔깃하게 하는 자극적인 이야기들보다 그저 작가의 일생과 업적은 남겨진 귀한 작품이 유산되어 존중받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또 미술을 사랑하는 관람객들이 작품을 만나는 기회를 만들고 세상과 작가를 연결해 주는 일이 우리가 해야 할 일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이번 전시에서는 자극적인 인생사와 미인도 사건을 다루지 않습니다. 오셔서 작품으로 거장 천경자의 일대기를 만나주십시오.”


20251008_120924.jpg 조락(凋落), 1947, 종이에 채색, 서울미술관 소장
20251008_121226.jpg 잔상(殘像), 1960년대, 종이에 채색, 개인 소장
20251008_121204.jpg 굴비를 든 남자, 1964, 종이에 채색, (재)금성문화재단



전시는 1,000평에 이르는 서울미술관 제1전시장에 총 8개 파트로 꾸며졌다. 7개 파트에서 주제별로 작품을 소개하고, 나머지 한 파트는 천경자 화백 추모 공간으로 조성했다. 모든 전시 공간에 천경자 화백과 인연이 있거나 각 공간을 대표할 만한 이들의 글을 함께 선보여 천경자의 예술 세계를 입체적으로 들여다볼 수 있게 했다.


천경자는 한국 근현대 미술을 대표하는 독보적인 채색화가다. 천경자 이전에 천경자만 한 화가가 없었고, 천경자 이후에도 천경자를 넘어서기는커녕 천경자에 필적할 만한 경지에 이른 화가조차 없다. 2022년 국립현대미술관 과천에서 열린 《한국의 채색화 특별전 : 생의 찬미》(2022.06.01.~2022.09.25.)에 천경자의 그림이 걸리지 않은 건 충격이었다.


20251008_124019.jpg 여인, 1974, 종이에 먹, 개인 소장
20251008_124042.jpg 한국일보 연재소설 「사랑의 계절」(글 손소희) 삽화, 연도미상, 종이에 먹, 더프리마뮤지엄 소장
20251008_124144.jpg 동아일보 연재소설 「파시」(글 박경리) 삽화, 1965, 종이에 먹, 개인 소장



천경자의 그림엔 태작이 없다. 대작부터 소품까지, 채색화부터 드로잉까지 어느 것 하나 허투루 그린 게 없다. 크면 큰 대로 작으면 작은 대로 뛰어난 예술성으로 감탄을 자아낸다. 태작이 없다는 사실은 화가의 생전 작업 태도를 고스란히 반영한다. 여행지에서 짧은 시간에 쓱쓱 그려내는 드로잉조차도 그렇게 사랑스러울 수가 없다. 올해 봄 서촌의 아트스페이스 월인에서 열린 미술사가 황정수 선생님의 소장품전 《서촌에서 근대를 거닐다》(2025.4.11.~5.6)에서 천경자의 엽서 크기만 한 그림을 보고 단숨에 매혹된 기억이 있다. 이번 전시에서도 사랑스럽기 그지없는 드로잉 한 점이 내 시선을 붙든다. 전시를 통틀어 ‘원 픽’이다.


그런가 하면 아직 전시장에 오지 않은 작품도 있다. 베트남전 종군화가단에 뽑혀 베트남에 다녀온 뒤에 그린 170호짜리 대작 <꽃과 병사와 포성>(1972)이다. 지난해 서울시립미술관이 개최한 천경자 탄생 100주년 기념전 《격변의 시대, 여성 삶 예술》(2024.8.8.~11.17.)에서 대중에게 최초로 공개된 바로 그 작품이다. 전쟁기록화조차 갖은 공을 들여 그린 걸 보곤 천경자라는 화가에 대한 존경심이 절로 일었다. 이 작품을 다시 보기 위해서라도 전시장에 다시 가야 한다.


20251008_123707.jpg 길례언니, 1982, 종이에 채색, 부국문화재단 소장
20251008_123215.jpg 노천명, 1973, 종이에 채색, 영인문학관 소장
20251008_122812.jpg 초원 II, 1978, 종이에 채색, 개인 소장



모진 어려움 속에서도 이토록 의미 있는, 그리고 단언컨대 앞으로도 이만한 규모로는 다시 열기 힘든 천경자 전시를 준비해 주신 서울미술관 관계자 여러분께 깊이 감사드린다. 많은 분이 이 전시를 통해 천경자라는 화가가 우리 시대의 ‘거장’으로 불리는 이유를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는 즐거움과 보람을 누리시길 바란다. 전시 기간은 넉넉하고, 가을날은 더없이 좋다.


■전시 정보

제목: 천경자 작고 10주기 특별기획전 《내 슬픈 전설의 101페이지》

기간: 2026년 1월 25일(일)까지

장소: 서울미술관 (서울시 종로구 자하문로 231)

문의: 02-395-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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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미술관] 내 슬픈 전설의 101페이지_가로형.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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