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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화의 본질과 가능성을 탐구하는 화가 김남표

석기자미술관(230) 김남표 개인전 《연작에 대하여: 회화의 가능성》

by 김석

화가를 보여주는 전시가 있고, 작품을 보여주는 전시가 있고, 작업을 보여주는 전시가 있다. 김남표 개인전의 방점은 ‘김남표’라는 이름이나 김남표가 그린 ‘작품’이 아니라 ‘작업’에 찍혀 있다. 전시 제목을 보라. ‘연작’을 얘기하고 ‘회화의 가능성’을 거론한다. 미술관이 아닌 상업 갤러리 전시다. 요즘 같은 시절에 퍽 이례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일까. 김남표의 ‘작가 노트’는 이렇게 시작된다.


올 한 해는 세 번의 개인전을 ‘회화 이야기’로 채웠다. 《누가 회화를 두려워하랴》(성남큐브미술관), 《경험은 회화를 배반한다》(호리아트스페이스), 《연작에 대하여: 회화의 가능성》(갤러리 PaL). 화가로서 감사한 일이다. 치열한 현실 속에서 버티는 갤러리 입장에서는 내색은 안 하지만 회화에 대한 주제를 선호할 리가 없는데도 나의 전시를 묵묵히 받아준 데 대한 미안함과 고마움이 넘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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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김남표 작가를 처음 만난 건 2010년 9월이었다. 가나아트센터에서 열린 김남표, 지용호 작가의 2인전 《김남표 & 지용호 - 두 세계의 만남》(2010.8.27.~9.12)이다. 얼룩말 등에서 폭포수가 쏟아지고, 신발 위로 꽃이 피어나는 초현실적인 풍경. 김남표를 아는 사람이라면 가장 먼저 떠올리는 바로 그 이미지다. 김남표 작가는 당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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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이게 이해가 안 돼. 도대체 어떤 의도일까 하는 것보다는 어 다르다, 뭔가 다르다. 그걸 굉장히 재미로 볼 수 있다는 거죠.”


그 한 번의 만남 이후 김남표 작가를 다시 만나기까지 11년 반이 걸렸다. 전시장에서 만난 김남표의 그림은 내가 11년 반 전에 처음 본 것과 달랐다. 물론 변하지 않았다면 그게 더 이상했겠지. 두 번의 만남 사이에 놓인 11년 반이란 시간 동안 김남표는 화가 인생에 커다란 전환점이 될 중대한 결심을 했고 끝내는 이뤘다. 나중에 술자리에서 들은 얘기다. 작가 노트를 보자.


2020년부터 10년 넘게 대형 갤러리라는 정글에서 생존 전략으로 작업을 해오던 울타리 안 공간에서 벗어나 독립적으로 작업을 하게 되었다. 10여 년 바쁘게 지낸 만큼이나 놓치고 달려온 중요한, 회화와 관련한, 방치된 근본적 고민들이 쌓여 있음을 반성하는 계기로 삼는다.


김남표는 이름만 대면 알만한 대형 갤러리에서 10년 넘게 전속 작가로 활동했다. 정글에서 살아남기 위해 정신없이 그렸다. 사람들이 한 번쯤은 봤을 백호와 얼룩말이 등장하는 그림 말이다. 그렇게 10년이 지나고 보니 이게 뭔가 싶었다. 쉬지 않고 달리기만 했을 뿐 내가 지금 제대로 가고 있는 건지, 이것이 내가 꿈꿨던 화가의 길인지, 깊은 회의가 밀려들었다. 이대론 안 된다. 울타리 밖으로 나가자.


쉬운 결정이 아니었다. 하지만 김남표는 울타리 밖 세상으로 결연히 나가 자유를 얻었다. 그리고 화가로서 삶의 방향을 새롭게 설계하기 시작했다. 공교롭게도 딱 그 시기에 코로나바이러스가 세상을 덮쳤다. 그로 인한 오랜 단절의 시간이 화가에겐 스스로 질문을 던지고 차근차근 답을 찾아가는 반성과 성찰로 채워졌다. 더는 스튜디오에 갇혀 그리기만 하지 않아도 됐다.


나는 우선 스튜디오에서 나와 어렸을 때부터 좋아했던 자연의 현장으로 들어갔다. 2019년부터 제주에서 일년살이하며 제주의 실경 작업을 시작했고, 2023년에는 히말라야 안나푸르나, 2024년에는 파리 시테 레지던시, 2025년에는 탄자니아, 그리고 얼마 전 다녀온 히말라야 메라 피크에 이르기까지… 줄기차게 돌아다녔고 쉴 새 없이 현장에서 그림을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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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년 반 만에 재회한 김남표 작가를 비로소 나는 제대로 보게 됐다. 미술을 향한 진지한 태도와 작업에 임하는 남다른 열정은 그때까지 내가 만난 어느 화가에게서도 본 적이 없는 것이었다. 아니, 세상에 이런 화가가 다 있었단 말인가. 내가 왜 김남표라는 화가를 여태 주목하지 않았던가. 그때부터 김남표 작가의 전시는 거의 빼놓지 않고 다 다녔다. 그 출발점이라 해도 좋은 제주 실경 작업은 2023년 전남국제수묵비엔날레 전시장에서 봤다.


그리고 바로 그해 11월, 김남표의 ‘작업’을 제대로 들여다볼 기회가 왔다. 박영석 대장과 대원들을 찾는 수색대를 따라 안나푸르나에 다녀온 결과물을 선보이는 전시 《김남표 개인전: 안나푸르나》가 서울시산악문화체험센터에서 열렸다. 한 번의 사전 답사와 한 번의 현장 취재를 통해 화가가 안나푸르나에서 눈과 가슴에 담아온 것들에 최대한 가까이 다가가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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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푸르나에 잠든 박영석 대장…그 흔적을 그림에 담다 (KBS 뉴스9 2023.11.03)

https://news.kbs.co.kr/news/pc/view/view.do?ncd=7809649


그 뒤로 김남표 작가의 전시를 취재하고, 관찰하고, 분석하고, 기록한 내용은 브런치 글을 통해 꾸준히 소개했다. 각각의 전시는 서로 무관한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김남표의 전시를 꾸준히 보고 나면 실은 그 모든 전시가 하나의 소실점을 향해 공명하고 있다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깨닫게 된다. ‘과정’에 집중하는 김남표 작가의 ‘작업’의 ‘궤적’이 보인다.


■감춰진 세계의 본질…화가 김남표가 들여다본 ‘구멍’

석기자미술관㊾ 김남표 개인전 <구멍>

https://brunch.co.kr/@kimseok7/263


■틈새로 비어져 나온 그림…김남표의 수채화 드로잉

석기자미술관(164) 김남표 김세중 2인전 <Être>

https://brunch.co.kr/@kimseok7/380


■지독한 회화주의자가 쫓는 ‘회화적 리얼리티’의 힘

석기자미술관(193) 김남표 개인전 《누가 회화를 두려워하랴》

https://brunch.co.kr/@kimseok7/412


■회화라는 망망대해를 유영하는 화가 김남표

석기자미술관(208) 김남표 개인전 《경험은 회화를 배반한다》

https://brunch.co.kr/@kimseok7/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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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스스로 질문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림을 왜 그리는가, 그림이 무엇인가…. 이런 의구심들은 그저 작업실에 앉아 생각할 그런 질문들이 아니다. 당장 몸이라도 피곤하게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뜨거운 햇빛의 현장에서, 그리고 오지와 같은 고산에서 헤맸다. 최소한 그래야 할 것만 같았다. 몸이 자연에 노출돼 한계를 맞게 되면, 그만큼 내 그림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하게 돼 그림과 내가 서로 대등한 관계를 맺게 된다. 어쨌든 앞에서 놓치고 달려온 10년 세월 동안 잃어버린 그림에 관한 질문들을 다시 세우고 바라봐야만 했다.


대상의 존재를 새롭게 발견하고 인식하는 과정에서 그림에 관한 고민은 회화에 관한 질문으로 전환돼 갔다. 그림은 지나치게 포괄적인 개념이다. 뭘 해도 그림이 될 수 있다는 건 흥미롭지 않다. 오히려 그림 안에서 좀 더 지엽적이고 배타적인 성격의 ‘회화’라는 개념이 미술에 관한 본질적인 질문을 끌어내기에 더 적합했다.


나는 회화의 조건을 불완전성의 태도와 더 다가서기 위한 접근 방식으로 보고 있다. 이는 현대미술의 중요한 요소인 연작 개념과 깊은 연관성이 있다. 연작은 탐구하는 과정으로서, 불완전한 창작자가 존재하는 허상과 같은 걸 보이게 하려는 불가능한 시도를 연속적으로 지속해서 이끌어가는 미술적 행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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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표의 올해 세 번째 개인전 《연작에 대하여: 회화의 가능성》에서는 ‘고개 숙인 해바라기’, ‘안나푸르나’, ‘제주의 검질’, ‘연작으로 만들어진 풍경’, ‘오후 5시 풍경’까지 다섯 가지 연작이 각각의 군집을 이뤄 선보인다. 한 해에 미술관과 갤러리를 오가며 개인전을 세 차례나 여는 것 자체도 대단히 이례적이지만, 상업 갤러리가 ‘작업’에 방점을 둔 화가의 진지한 작품들을 미술관처럼 소개하는 경우를 본 기억이 없다. 이제 김남표의 작가 노트 마지막 대목을 읽어보자.


수년간 지속해서 연작으로 나온 것들을 작업실처럼 전시장에 채운다. 서로 간극이 있는 소재들인지 모르지만, 불가능한, 보이지 않는 무엇을 지속해서 보이게 하는 무모한 시도들이 공통점일 것이다. 마치 형광등에 대가리를 처박아대는 나방과 같을 것이다. 그렇다고 불빛이 될 수 없는데도 나방은 숙명처럼 그럴 수밖에 없다는 걸 업보처럼 받아들인다. 작업(作業)에서 업(業)은 일의 성과나 직업을 의미하기보다는 창작의 업보다.

그 업보를 받아들이는 데서 미술은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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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 정보

제목: 김남표 개인전 《연작에 대하여: 회화의 가능성》

기간: 2025년 11월 6일(목)~27일(목)

장소: 갤러리 PAL (서울시 강남구 논현로 164길 21)

문의: 0507-1486-3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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