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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진규의 공간에 스며든 배형경의 조각

석기자미술관(237) 《배형경 – 50년 만의 인연》

by 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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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살면서 수없이 많은 벽을 마주한다. 그 앞에서 때론 좌절하기도 하고 고민 끝에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아가기도 한다. 삶의 무게에 눌려 고뇌하는 현대인의 모습을 인체 조각으로 빚어낸 작품이 있다. 육중한 벽 앞에 체념한 듯 서서 고개 숙인 존재들. 저마다 표정을 숨긴 채 굳은 침묵에 잠긴 그들. 하나같이 잿빛을 띤, 거칠고 앙상한 육신.


배형경의 조각은 세상의 수많은 벽 앞에서 고뇌하는 인간의 실존을 생생하게 드러낸다. 그것은 곧 우리 자신의 모습이기도 하다. 배형경은 조각을 통해 삶이 무엇이고,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지, 끊임없이 질문을 던져왔다. 시멘트로 형상을 빚고, 표면을 일일이 다듬은 뒤 먹으로 색을 입힌다. 묵직해 보이는 조각들이 그 자체로 삶의 무게를 느끼게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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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마다 짊어진 생의 무게가 다르듯 눈높이도 다 제각각이지만, 그런 '다름'을 인정하는 것이 바로 인간다움의 길. 지금은 다들 고개를 떨구고 잔뜩 웅크렸어도, 조금은 더 나은 미래를 향해 함께 나아가야 하는 삶이기에 실낱같은 희망일지라도 포기할 순 없다. 작가가 말한 대로 가장 중요한 건 사람이다. 그래서 배형경은 사람의 모습을 빚는다.


■세상의 벽 앞에 고개 숙이다…시멘트로 빚은 ‘우리의 자화상’ (KBS 뉴스9 2023.04.29.)

https://news.kbs.co.kr/news/pc/view/view.do?ncd=7663970


배형경의 사람이 권진규 아틀리에 안으로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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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웠던 시절, 대부분의 가난한 예술가들이 그랬듯 고국으로 돌아온 권진규도 서울 변두리 동선동 산동네에 자리 잡았다. 가까운 정릉에도 예술가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정릉 살던 조각가 최만린이 이따금 먹을 것을 사 들고 와 함께 나눠 먹었다는 권진규의 집. 큰길에서 골목으로, 골목에서 또 다른 골목으로, 주택가를 돌고 돌아 가파른 계단을 오른다. 삶의 계단은 어디까지 이어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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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한참을 오른 끝에 다다른 조각가 권진규의 집. 너도나도 추상으로 거침없이 직진하던 시절, 권진규의 구상 조각은 설 자리를 찾지 못했다. 조각가로는 드물게 두 번이나 개인전을 열었다지만, 권진규의 조각은 팔리지 않았다. 반고흐도 생전에 그림 한 점 팔았을 뿐이라지. 고려대학교 박물관이 작품을 수집한 덕분에, 권진규 생전에 팔린 작품은 단 한 점이었다. 아침 일찍 박물관을 찾아가 자기 작품을 보고 돌아온 권진규는 그날 스스로 세상과 절연했다.


권진규는 일본 유학에서 돌아와 1973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바로 이 동선동 집에서 살며 작품 활동을 했다. 전시를 위해 작품이 나가는 날에는 리어카에 작품을 싣고 가파른 고갯길을 조심조심 내려가곤 했단다. 시간이 흘러 권진규는 재평가됐다. 나는 고려대학교 박물관에서 본 권진규의 <자소상>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본 권진규의 <지원의 얼굴>을 잊지 못한다. 권진규의 조각이 가만히 내 마음을 뒤흔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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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생 권경숙 씨는 2006년 권진규가 살던 집을 내셔널 트러스트 문화유산기금에 기증했고, 이곳은 <서울 동선동 권진규 아틀리에>라는 이름으로 국가등록문화유산이 됐다. 정문 옆에 세워진 안내판에 그 내력이 적혀 있다. 권진규 아틀리에는 한 조각가가 세상에 남기고 간 자취를 확인하게 해주는 공간이자, 새로운 예술 세계를 창조하기 위해 실험하고 도전하는 젊은 작가들의 전시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20251127_151553.jpg Wall-Human, bronze,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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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문을 지나 마당 안으로 들어서면 왼쪽에 두 사람이 벌서듯 서서 고개를 푹 수그리고 있다. 비가 내린 직후라 둘은 비에 흠뻑 젖었다. 차가운 늦가을의 공기 속에서 고개 숙인 그들의 머리 위에 맺힌 물방울은 비일까, 땀일까, 아니면 눈물일까. 바짝 다가서서 얼굴을 확인하려, 표정을 읽으려 애쓴다. 하지만 예상대로 그들은 말이 없다. 빗방울이 눈물처럼 눈가로 흘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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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127_151530.jpg sitting figure, bronze, 2019


맞은편에 한 사람이 앉아 있다. 무릎 사이에 얼굴을 파묻고, 두 손을 살짝 오므려 땅 위에 올려놓는다. 뒤에서 보니 더 확연하게 드러나는 앙상한 육신. 뼈마디가 툭툭 튀어나온 손과 발. 그 앞에 낙엽 몇 개가 떨어져 있다. 가만히 스러져가는 것들을 차마 보낼 수 없는 걸까. 스산하기만 한 가을이 거기에 있었다. 발과 손이 놓인 바로 그 자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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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127_151337.jpg Equalizer, bronze, 2023



집 안으로 들어가면 방 한가운데 그보다 작은 조각들이 무리를 이루고 있다. 저마다 다른 곳을 향하고 있는 고개 숙인 존재들. 벽에 아슬아슬 매달린 가녀린 영혼들. 무릎을 세우고 앉아 고개 숙인다. 학창 시절 권진규의 도록을 넘기며 조각가의 꿈을 키웠다는 배형경은 그로부터 50년이 지나 그토록 흠모했던 권진규의 집에 작품을 들여놓았다. 그 실낱같은 인연 덕분에 더 애틋함을 주는 전시다.


20251127_151312.jpg Untitled, bronze, 2022
20251127_151425.jpg Untitled, bronze, 2019
20251127_151435.jpg Untitled(ghost), bronze,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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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127_151652.jpg sitting figure, bronze, 2019



집을 돌아 나오면 한쪽 벽에 십장생이 그려진 커다란 구조물이 붙어 있다. 권진규가 동생의 집에 꾸며줬다는 이 커다란 부조는 훗날 저 모양으로 조심스럽게 잘려 리움미술관으로 들어갔고, 권진규 아틀리에를 꾸미면서 원본과 똑같이 복제해 이곳에 걸었다고 한다. 고대 고분 벽화를 보는 것 같다. 그 앞에 한 사람이 무릎을 꿇고 앉아 고개를 숙였다. 내게는 그곳이 성소로 보였다. 내가 아는 한 이보다 더 완벽한 ‘장소 특정적 예술’은 일찍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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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으로 난 쪽문으로 들어가면 권진규의 작업실이 나온다. 생전에 권진규가 쓰던 작업실을 비교적 옛 모습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낡은 나무 탁자와 의자, 받침대, 이젤, 손때 묻은 도구들, 한겨울 작업실의 냉기를 달래줬을 작은 벽돌 난로. 작업실 바닥에 누워 있는 존재. 그는 다름 아닌 권진규였다. 적어도 내게는 그렇게 보였다. 낡은 작업실에 조각 하나 놓았을 뿐인데, 이 공간을 둘러싼 공기가 완전히 달라졌다. 이보다 더 완벽한 ‘장소 특정적 예술’의 사례를 나는 본 적이 없다.


20251127_152020.jpg lying figure, bronze, 2019
20251127_152003.jpg sitting figure, bronze, 2019


낡은 작업실 창 너머에도 누군가가 고개 숙인 채 앉아 있다. 안에 누운 존재와 밖에 앉은 존재의 거리를 생각한다. 작업실 옆에 딸린 작은 방을 돌아본 뒤 다시 마당으로 나와 같은 공간을 천천히 걸으며 조심스럽게 탐색하며 돌고 또 돈다. 눈높이에 따라, 각도에 따라, 거리에 따라 조각이 주는 느낌이 매번 달라진다는 사실에 새삼 놀란다. 처음부터 여기에 있기 위해 만들어진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권진규의 공간과 배형경의 작품은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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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4월, 갤러리 시몬에서 열린 배형경의 전시를 취재하고 난 뒤로 오랫동안 배형경의 전시를 기다려왔다. 그리고 그 기다림은 기대대로 헛되지 않았다. 작은 거인. 나는 이보다 배형경을 잘 나타내는 표현을 찾지 못한다. 하여 내년 3월로 예정된 배형경의 개인전을 다시 기다린다. 그 기다림 또한 조금도 헛되지 않으리라.

■전시 정보

제목: 권진규 아틀리에 기획전 《배형경 – 50년 만의 인연》

기간: 2025년 11월 21일(금)~12월 6일(토)

장소: 권진규 아틀리에 (서울시 성북구 동소문로 26마길 2-15)

관람 시간: 목~토 13:00~17:00

문의: 02-3675-3401 / www.ntculture.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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