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즈더우먼'을 중심으로
'루이즈더우먼'을 중심으로 '#미술계_내_성폭력' 운동을 연구하다.
몇 문장으로 요약된 간단해 보이는 일 안에는, 알고 보면 구체적인 세부 과정이 있다. 지난 화에서 '예술가에게 배운 논문 주제 찾는 법 세 가지'에 대해 적었다. 어떤 과정이든 '~하는 몇 가지 방법'으로 요약하고 나면 정말 간단해 보인다. 그리고 그 몇 가지 방법을 따르기만 하면 어떤 성취가 쉽게 이루어질 것만 같다. 물론 그렇지 않다. 또한 사실 내가 이 연재 글에서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쉽게 성취를 이루기 위한 '논문 주제 잘 찾는 법'은 아니었다. 이 연재 글에서 궁극적으로는 나는 어떤 태도와 어떤 목표를 가지고 논문을 썼는지, 그래서 이 논문의 주제가 나에게 어떤 의미가 되었는지를 기록하고 공유하고 싶었다. 그래서 논문 주제를 고민하던 구체적인 시작점부터 내가 어떤 태도와 목표, 의미로 논문을 쓰게 되었는지 적어보려고 한다.
동시대의 페미니즘 미술을 담을 수 있는 언어
과거에 내가 한국의 '페미니즘 미술'에 대해 가졌던 어렴풋한 인상은 '강렬함'과 '이질감'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종종 미술관에서 한국 페미니즘 미술을 주제로 한 전시를 볼 때면, 다른 전시에서는 느끼기 힘든 에너지를 느꼈다. 그 힘은 작품의 스케일이나 조형적인 측면에서 오는 에너지라기보다는, 작가의 삶과 작품이 연결되어 있기에 뿜어져나오는 작가에게 뿌리를 둔 에너지였던 것 같다. 나 역시 삶에서 페미니즘을 실천하고자 하는 한 사람으로서 그 에너지 가운데에서 작가들의 고민과 문제의식, 분노에 공감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나는 그 작품들 앞에서 이질감을 느꼈다. 미술관에서 페미니즘 미술을 주제로 전시나 프로그램 등을 기획할 때 자주 호명되는 작가와 작업의 형태가 있었다.
다른 미술관에서 하는 다른 전시라도, 페미니즘 미술을 주제로 하면 비슷한 작가의 작품이 전시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물론 미술관 밖에서도 동시대의 페미니즘 미술 실천을 전시하고자 하는 시도들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미술관에서 페미니즘 미술을 이야기할 때 특정한 작가, 특정한 작품의 형식, 특정한 서술 방법이 반복해서 나타나는 것을 보면서, 나는 점점 페미니즘 미술을 작게 보게 되었다.
나는 그런 감각을 나 혼자만 느끼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주변 동료들과 이야기를 할 때면, 동료들은 페미니즘 미술에 대한 불편함, 거부감 같은 것을 표할 때가 있었다. 스스로를 '페미니즘 미술가'라고 칭하고 싶어하지 않는 경향도 볼 수 있었다. 물론 여기에는 자유로움을 추구하는 예술가에게 어떤 종류의 타이틀, 낙인이 생기는 것에 대한 거부감도 작용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뿐만은 아닌 것 같았다. 우리가 미술관을 통해서 목격한 '페미니즘 미술'이라는 언어가, 페미니즘을 실천하는 동시대의 예술가를 담기에는 그 범위가 작았던 것은 아니었을까? 적어도 내가 나의 시간 속에서 경험한 '페미니즘 미술'은 미술관에서 흔히 호명되는 특정한 작가나, 특정한 형식의 작품이나, 특정한 서술 방법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었다. 무엇보다 내가 경험한 페미니즘 미술에는 '#미술계_내_성폭력' 운동이 있었다.
'#미술계_내_성폭력' 운동이라는 현장의 페미니즘 미술
'#미술계_내_성폭력' 운동은 미투 운동의 연장선에 있다. 미투 운동은 미국 사회운동가 타라나 버크(Tarana Burke)가 시작한 운동으로 성폭력 피해를 고발하고, 피해자에게 연대하는 운동이다. 2017년 미국의 배우 알리사 밀라노(Alyssa Jayne Milano)가 하비 와인스타인(Harvey Weinstein)의 성폭력을 고발하기 위해 SNS에 #MeToo 해시태그를 달면서 대중화되었다. 한국에서는 2018년 서지현 검사의 미투 운동을 통해 대중화되었지만, 사실 문화예술계에서는 2016년부터 미투 운동이 시작되었다. 2016년은 서양화과를 다니던 내가 대학교 졸업을 앞두던 시기였다. 마지막 학기를 다니던 때, 내가 다니던 대학교의 미술대학 건물에는 입구에서부터 건물 안까지 대자보가 붙어 있었다. 이 장면이 바로 내가 첫 번째로 경험한 '페미니즘 미술'의 현장이었다.
선행 연구를 읽으면서 내가 페미니즘 미술에 대해 이질감을 느꼈던 원인을 찾을 수 있었다.¹ '#미술계_내_성폭력' 운동은 '페미니즘 미술 행동주의'의 성격을 가진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과거 한국 미술사에서는 한국의 페미니즘 미술을 '운동적 차원'과 '문화적 차원'이라는 이분법적 틀 아래 서술하고, 후자에 우위를 부여했다. 그 안에서 '페미니즘 미술 행동주의'는 '문화적 차원'으로 가는 발전의 과정이자 미완성된 것으로서 저평가되었다. '#미술계_내_성폭력' 운동은 그러한 저평가의 연장에 놓여 있었으며², 이러한 관점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미술계에서 강력하게 작용하여 한국의 '페미니즘 미술사'를 동시대의 현장과는 거리가 있는 역사로 만들었다. 나는 미술사 학계에서 논의하는 '페미니즘 미술'과 나의 현장에서 목격한 '페미니즘 미술' 사이의 이질감을 느끼면서, '페미니즘 미술'이라는 언어를 나의 현장을 포함할 수 있는 언어로 확장시킬 필요를 느꼈다. 그리고 선행 연구들에서 이미 지적한 바 있듯이, '페미니즘 미술'이 단지 전시장 벽에 걸린 작품만이 아니며, '운동적 차원'과 '문화 지향적 차원'이라는 두 가지 갈래만으로 정렬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말하고 싶었다.
'루이즈더우먼'이라는 '#미술계_내_성폭력' 운동의 구체적인 사례
그렇게 나는 나의 현장을 포함하는, 벽에 걸린 작품이 아닌, '운동'과 '문화'의 이분법을 넘어서는 복합적인 성격을 가지는 페미니즘 미술의 구체적인 한 사례로서 '루이즈더우먼'³을 연구하게 되었다. '루이즈더우먼'은 2020년에 만들어진 여성 예술인 네트워크다. 이들이 단체를 만들면서 낸 성명문에는 "2016년 #예술계_내_성폭력 고발 이후 조금도 변화하지 않은 미술계의 침묵 속에서 우리는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모일 것입니다"라고 적혀있다. 논문에서 나는 '#미술계_내_성폭력' 운동을 단지 '과거'에 SNS에서 일어난 해시태그 운동이 아닌 '현재 진행 중'인 운동으로 보았다. 때문에 '루이즈더우먼'이 '#미술계_내_성폭력' 운동이 시작하던 시점으로부터 약 4년 뒤에 만들어진 단체임에도 이들의 실천을 '#미술계_내_성폭력' 운동의 연장으로서 구체적 사례로 보았다.
그리고 나는 '루이즈더우먼'이 생긴 2020년, 1기부터 단체에 참여하여 논문을 쓰기 시작한 시점에서 2년 전부터 단체의 멤버로 활동했다. 나는 나의 현장을 포함할 뿐만 아니라, 이 단체에 대해 가장 잘 알 수 있는 내부자이자 연구자라는 외부자라는 두 가지 위치에서 연구를 시작했다. '루이즈더우먼'에서 잠깐 운영진을 한 경험이 있는 사람으로서, 그리고 페미니즘 미술의 지향점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으로서, 나는 외부자로서 '루이즈더우먼'을 본다면 어떤 것이 보일까 라는 질문을 항상 가지고 있었다. 논문을 쓰면서 외부자의 위치에서 이 단체가 마주한 한계점은 무엇인지,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은 무엇인지 본격적으로 고민해 보기 시작했다.
결국 나에게 논문을 쓰는 과정은 '페미니즘 미술'을 재검토하고 확장하는 과정이었다.
그리고 과정은 내가 지나온 시간을 재해석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1) 연구에서 중요한 근거가 된 논문은 지도 교수님의 두 논문 「‘#미술계_내_성폭력’ 운동과 미술사학의 과제 - 미투운동 시대, ‘페미니즘 미술사 리부트’를 위하여」(2019), 「김홍희의 페미니즘/포스트모더니즘 미술사론과 이불의 역사적 위상」(2020)이었다. 김현주의 「1980년대 한국의 ‘여성주의’ 미술: 《우리 봇물을 트자》전을 중심으로」(2008), 「한국현대미술사에서 1980년대 ‘여성미술’의 위치」(2013)와 조혜옥의 「한국 페미니즘 미술의 역사, 담론의 재구성 1980년대 ‘여성미술’과 1990년대 ‘포스트모던 페미니즘 미술’」 역시 기존의 페미니즘 미술사를 날카롭게 지적하여,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게 해주었다. 또한 '페미니즘 미술'에 대한 사고의 전환을 경험하게 해주었던 논문으로는 정헌이의 「미술을 바라보는 ‘페미니스트적 시각’이란 무엇인가」(1998)가 있었다.
2) 박소현, 「‘#미술계_내_성폭력’ 운동과 미술사학의 과제 - 미투운동 시대, ‘페미니즘 미술사 리부트’를 위하여」, 『한국근현대미술사학』 38(2019), pp. 131-161.
3) '루이즈더우먼'의 홈페이지, https://louisethewomen.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