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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전시 리뷰

원을 그리며 앞서가는 덩어리와 뒷걸음질 치는 알맹이

변카카 전시: 시간의 증상들-2025 올해의 청년작가(대구문화예술회관)

by 정윤선


무거워진 몸은 돌이 이끄는 자리로 한 발짝, 한 발짝 뒷걸음질 친다. 사건을 기록한 물증이자 생과 사의 터전이 되어주었던 바위들이 모래가 되고, 하늘을 향해 키를 높이며 신념과 욕망의 무게를 버티던 석탑도 결국엔 땅으로 떨어지듯이, 한 뭉치 몸은 서서히 흩어진다. 위에서 아래로 쏟아지고 흘러가다가 도착한 곳에서 시간의 연대기를 펼쳐놓고 들여다보면 쪼그라든 얼굴이 되비친다.

ㅤㅤ한 뭉치 덩어리인 몸과 그 덩어리의 일부인 알갱이가 공존하는 변카카의 전시 《시간의 증상들》은 덩어리와 알갱이의 순간들을 포착한다. 전시장에 설치된 지압 길을 따라 걸어본다. 길의 한편에 놓인 수석을 연상시키는 돌 형태의 플라스틱 조각 〈장생건강원-낙엽약수〉는 뒤쪽에 결합된 음수대를 통해 약수를 제공한다. 산의 모양을 닮은 데다가 약수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이 수석은 자연의 경관과 에너지를 머금었을 것이라는 소망이 투영된 산수경석에 가까워 보인다. 초월적 에너지에 대한 기대가 가득 투영된 수석을 지나면, 야외용 운동 기구가 결합된 또 다른 플라스틱 돌 조각 〈구르는 사람과 역경에 부딪힌 사람〉과 부조 시리즈 〈축적과 압력〉이 보인다. 돌을 닮았지만, 마찬가지로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부조의 단면에는 ‘국민체조’의 동작이 새겨져 있다. 작품에 결합된 운동 기구를 움직이거나 작품에 새겨진 동작을 따라 하면서, 누구나 작품을 이용해 운동할 수 있다. 다른 한쪽에는 이름과 날짜가 적힌 담금주 8병이 바닥에서 플라스틱 돌 조각을 지탱하는 모습으로 〈천근만근〉이 버티고 있다.

ㅤㅤ원기 회복에 대한 지친 몸들의 기대는 담금주와 함께 숙성 중이고, 운동 기구를 통해 수행되는 움직임은 관람자들에게 경험되고 기억되는 중이며, 그들의 몸에 섭취되는 중인 약수는 수석이 상징하는 산의 에너지를 나누어 주는 중이다. 공원을 흉내 낸 이곳에는 삶을 원하지만 살아감의 무게에 지친 몸과, 그럼에도 피어오르는 생명력에 대한 맹목적 집착과, 나이 든 몸에 자신의 몸을 겹쳐보는 어린 몸들이 함께 숨 쉬고 있다.


〈천근만근〉, 2025, mixed media, 210x130x100cm



1. 시간의 증상들이 중첩되는 공원


시간의 여러 순간이 발현되고 관찰되는 곳, 공원은 시간의 증상들이 나타났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곳이다. 작가가 전시 공간을 구상하면서 떠올린 대구의 두류공원은 나이 든 몸들의 공간이었지만, 그곳에는 나이 든 몸을 불편하게 바라보는 사람들도 있었다. 작가에게 공원은 타인과 자신이 만나는 곳, 늙음과 젊음이라는 상반되는 시간이 접속하는 곳이었다. 또한 공원은 그가 경험한 타임라인 위에서 과거라는 시점에 접속하게 하는 곳이기도 했다. 과거, 그리고 늙음이라는 시간의 중첩이 그려낸 몽타주는 아버지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추억 속 한 장면으로, 낯익은 어떤 뒷모습으로 70대인 아버지와 40대인 작가는 공원이라는 장소에서 조우했다. 그리고 그는 일상에서는 느리거나, 답답하거나, 미숙해 보였던 노인들, 아버지와 크게 다름없는 그들의 걸음을 따라 걸으면 그들의 기억을 조금 엿들을 수도 있음을 알았다.

ㅤㅤ어린이일 때, 어른이란 둘 사이의 키가 차이 나는 만큼 절대로 가닿을 수 없을 듯이 보이는 먼 미래에야 달성할 수 있는 상태였다. 어린이와 어른의 차이는 지압 길에 놓인 작은 돌멩이와 거대하고 단단한 바위 사이의 차이만큼 큰 것이었다. 하지만 견고해 보였던 돌 조각이 쉽게 부서지는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졌듯이, 어린이와 어른, 어른과 노인의 경계는 몇 번의 부딪힘으로 쉽게 조각날 만큼 연약한 것이기도 했다. 어른이 되기 위해 애쓰지 않아도, 어느 날 거울 속에서 쪼그라든 얼굴을 발견할 수 있듯이 말이다. 변카카의 공원에는 시간과 경험의 차이를 지닌 어린이와 어른과 노인이라는 구분이 있다. 그리고 그들을 구분하는 유약한 경계가 있다.


2. 기억을 새기고, 새겨진 기억에 접속하면서 원을 그리기


작가는 시간과 경험의 양이 서로 다른 이들이 모일 수 있는 공원을 만들었다. 그리고 여기 모인 사람들은 작가가 제시하는 행동을 자연스럽게 수행하게 된다. 변카카의 공원을 산책하는 이들은 약수를 마시거나, 운동 기구를 움직여 운동하거나, 지압 길을 걷고, 국민체조를 따라 한다. 이들은 이러한 체험을 통해서 몸으로 움직임을 기억한다. 한편으로 이들은 풍화된 바위의 일부로서 작은 돌을 밟거나, 약수를 마시면서 덩어리 진 물질이 흩어지고 유연해지는 자연의 해체 과정을 몸으로 경험한다. 운동 기구를 이용하고 국민체조를 따라 하면서, 운동하는 어르신들의 경험을 상상하기도 한다. 이렇게 관람자는 작가가 제시하는 행동들을 수행하면서 자신의 움직임을 몸으로 기억하고, 흩어져가는 덩어리의 기억에 접속한다. 여기 모인 이들은 스스로에게 기억을 새기기도 하고, 기억이 새겨진 다른 존재를 만나기도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둘은 삶과 죽음의 윤회처럼, 전자에서 후자로, 후자에서 전자로 끝없이 순환하는 과정이라는 점에서 원을 그리는 것과 같다.

ㅤㅤ영상 작업 〈산-산조각〉에는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원을 그리는 존재들이 담겨있다. 한 사람의 발목에 묶인 실이 발을 끌어당기는 장면으로 영상은 시작한다. 발이 묶인 실의 반대편 끝에는 돌이 묶여있다. 발은 돌의 방향으로 뒷걸음질한다. 힘없이 누워 있는 사람의 몸 주위로 참새가 종종걸음으로 걷고, 사람의 팔목 위에 무거운 돌이 놓인다. 울퉁불퉁한 동굴 속 바위와 산의 절벽 이미지가 교차하면서, 몸 위로 계속해서 돌이 쌓이고, 물이 흐른다. 몸은 아마도 자연의 일부가 되어가는 듯 보인다. 그 와중에 돌멩이는 흙 위에서 나선형으로 구르면서 흔적을 남긴다. 돌처럼 누워있는 사람 위로 쌓이는 돌과 흐르는 물, 거니는 참새는 인간이 자연의 일부이며, ‘산 조각’으로 자연으로 돌아가게 됨을 암시한다. 영상 속의 자연물과 생물들도 공원에 모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기억을 새겨온 생의 과정을 지나 기억이 새겨진 다른 존재들을 만난다. 그들은 삶과 죽음이 만나고, 뭉쳤던 것이 흩어지고 마모되었던 것이 응결되는 곳에서 원을 그리는 과정에 있다.

ㅤㅤ변카카는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과 뒷걸음질 치는 사람이 마주치는, 과거와 늙음의 시간이 중첩되는 공원을 만들었다. 작가는 필자에게 원고를 문의할 때도 아버지(70대)-작가(40대)-비평가(30대)라는 3세대의 만남이라는 구조를 떠올렸다. 그가 만든 공원과 마찬가지로, 작가는 자신의 작업을 통해 필자에게 작품을 둘러싼 현재의 기억을 새기고, 다른 존재들과 연결될 수 있는 시간을 만들어 주었다. 이렇게 변카카는 기억을 새기는 행위와 타자의 기억에 접속하는 행위를 통해 서로 다른 존재들이 서로를 마주하게 한다. 그 마주함의 과정에서 도돌이표 같은 짓궂은 궤적을 발견하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2025 올해의 청년작가》 중 《시간의 증상들》 전시 전경,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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