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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전의 시퀀스

by 라미루이









팔각 경기장은 밤의 심장처럼 박동하고
관중은 미세 결정으로 박혀 얼굴을 반사한다
움켜쥔 주먹은 링의 끝자락을 잡고 맨발은 지도를 갉아먹는다
헐벗은 두 몸은 서로의 과거를 샅샅이 조사하는 탐정이 된다

둘은 교대하는 계단처럼 오르내리며
밀려든 숨결 하나 등고선을 흔든다



피는 시간의 사물함에서 소리 없이 옷을 갈아입고
땀은 라디오처럼 오래된 노래를 반복한다

그의 왼팔은 강철의 약속을 띄우고
그녀의 오른발은 달을 향한 빚을 갚는다
육체적 충돌은 계산서가 아니라 제안서이다
제안서 위에 새겨지는 것은 무게와 기억과 초점이다

찰나 움직임은 모든 감정의 축약이자 함의
단 한 번, 반동은 어제의 이름을 지워버리고
낡은 호흡들이 서로를 향해 결의문을 건네면
공기는 고개를 숙여 그 텍스트를 받아 적는다

관중은 침묵을 거래하고 심판은 순간을 저울에 놓는다
모든 결정은 작은 소리로 태어나 커다란 표정을 만든다
빛은 방패이고 어둠은 피 묻은 수건
그들이 닿는 곳마다 오래된 약속들이 쓰러진다

한 동작, 두 동작, 세 동작..
연결 동작들은 서로에게 증명서를 건네는 아이들처럼 교차한다



상처는 지도를 새기고 웃음은 지도를 훑는다
지도가 끝나는 곳에선 또 다른 출발이 숨을 쉰다

끝은 언제나 가능성으로 남아 있고
우리는 그 가능성을 입에 물고 늘어진다
싸움은 단지 싸움이 아니고
맨몸 싸움은 우리가 서로를 알아보는 방식이다

난 경기장의 바닥에 손을 대고 들어본다
피를 뿜는 바닥은 지워진 악보를 되풀이하고
그 악보 위에서 발자국들은 새로운 음표가 된다
음표들은 서로를 부르며 우리는 그 호출에 응답한다

돌아서면서 난 한 문장을 남긴다
피비린내 나는 문장은 접힌 손수건처럼 주머니에 넣어 두고

다음 라운드까지 비척이는 걸음을 옮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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