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냥냥쭙쭙]
어쩌다 보니 출근시간보다 30분이나 일찍 도착한 날이었다.
그 날 이후로 가족들과의 관계는 여전히 구름이 잔뜩 낀 새벽같다. 엄마는 내가 집밖으로 나가는 것만으로도 뛸 듯이 기뻐했다. 어디가는지 모르겠지만 어디라도 가려고 준비하는 모습이 보기 좋다라는 말을 반복했다. 처음에 한 두 번은 대수롭지 않게 넘겼지만, 그것도 계속 듣자 이상하게 비위가 상했다. 얄미운 생각이 들어서 다시 나가고 싶지 않기도 했다.
내가 나가는 걸 원하고 좋아하는 부모님, 난 그들이 원하고 좋아하는 일을, 그들이 기뻐하는 일을 하고 싶지 않다. 나를 더 망쳐서 그들을 괴롭게 하고 싶다.
어느새 가게에 가는 것이 점점 편해진다. 주문을 받고, 그에 맞는 상품을 포장하고, 발송하는 일을 정신없이 하다보면, 끊임없이 떠올라 나를 괴롭히는 고통의 기억에서 잠시 멀어질 수 있다. 사람들 눈을 보지 않아도 되고, 일을 천천히 하거나 실수를 한다고 탓하는 사람도 없다. 아직 티는 안 나지만 살도 2kg이나 빠졌고, 어쨌든 출근이라는 걸 해야하다보니 매일 씻고, 손톱도 깎게 되었다. 탕비실에 있는 차와 과자도 원하는 만큼 먹어도 되고, 냥이드림에서 만나는 손님들과 인사하는 것도 좋았다.
날이 갈수록 내 스스로를 망치는일과는 거리가 멀어졌다.
가게 문을 열자마자 나는 한숨부터 나왔다. 벽에 걸린 온갖 고양이 그림, 선반에 빼곡히 쌓인 고양이 모양 소품, 곳곳에 놓인 고양이 쿠션과 인형들. 여기는 그냥 고양이 덕후들의 천국이었다. 아무리 봐도 적응이 안된다.
대충 가방과 겉옷을 내려놓으니, 작업대 위에 올려진 여러 가지 신제품이 눈에 들어왔다. 작은 간장 종지 그릇, 손거울, 스티커, 핸드폰 뒤에 붙이는 그립톡, 안경닦이까지. 제각각 앙큼하게 생긴 페르시안 고양이 그림이 그려진 제품들이 줄지어 놓여 있었다. 분명 사장이 어제 늦게까지 촬영하다 두고 간 거겠지.
사장은 대체 여운이 없었으면 어떻게 가게를 운영했을까 싶다. 재고가 가득한 선반장도, 작업대도, 탕비실까지 가게 전체가 깔끔하게 정리 되어 있는 건 다 여운의 작품이었다. 사장은 생긴 건 깔끔한데 은근히 더럽고 잘 안 치우는 편이었다. 그래도 가게 상품엔 신경쓰는 듯 보였지만, 그조차도 여운의 뒷바라지가 반드시 필요했다. 그런 사람이 도대체 손이 이렇게나 많이가는 소품가게는 왜 연건지.
사장님은, 피렌체에서 1600년대에 흑사병을 막기 위해 작은 창문을 통해 와인을 팔던 부케테에 대해 들었다고 했다. 그런 와인 창문에서 힌트를 얻어, 400년이 지난 후 코로나 시절을 맞아 일본에서 시작된 히키코모리 전용 카페를 보고 나서 영감을 얻었다는 이야기였다. 카페 직원은 모두 히키코모리였고, 그들이 힘들 때는 출근하지 않아도 되며, 원할 때 15분씩만 일하도록 돕는 방식으로 사회 복귀를 돕는다고 했다.
사장님은 우연히 티비에서 그 카페를 보고 모티브를 얻어 냥냥쭙쭙을 열었다고 했다.
말이 좋아 모티브지 허락도 없이 그냥 배껴서 쓴거 아닌가.
뭐 다른 점이 있다면 여긴 카페가 아니고, 고양이가 그려진 소품들만 판다는거지만.
아직까지 일본에서 내용증명같은게 날아오진 않았나보다. 그랬다면 벌써 문을 닫았겠지.
여기서 일하기 전보다는 소품에 대한 생각이 조금 호의적으로 바뀌긴 했다. 실생활에서 쓸 수 있는 그릇도 있고, 의류도 있으니까.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스티커와 가챠, 같은 랜덤 뽑기들은 여전히 쓸모 없다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그저 예쁜 쓰레… 아차, 큰일날뻔했다.
그런데 이 모든 것들보다 더 싫은 게 있다.
바로 저기, 아까부터 나를 째려보고 있는 저 녀석.
“야옹.”
제대로 일을 하기 시작했던 날, 가게에 있는 모든 것들에 적응하기란 쉽지 않았다. 처음에는 낯설고, 서툴고, 막막한 마음이 들었지만, 그 와중에도 나를 가장 기겁하게 만든 것이 있었으니. 바로 가게 여기저기를 유유히 배회하고 있던 저 녀석과 맞닥뜨린 것이다.
저 녀석의 사연은 여운을 통해 들었다.
몇 년 전 사장이 가게 자리를 보러 온 날, 복덕방 아저씨는 주방시설을 만들기 어려운 건물이라 카페는 안된다 말렸다. 그 말에 사장의 머릿속이 혼란스러운데, 밖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나가보니 어미 고양이가 차에 치어 죽어 근처 상인들이 다 나와있었다.
인자하게 생기신 철물점 사장님이 어미를 잘 묻어주고, 새끼 네 마리를 키워줄 주인을 찾기 시작했다. 세 마리는 금방 분양이 되었지만, 마지막 한 마리는 아무도 가지려 하지 않았다.
도배 가게 사장님이 손사래를 쳤다.
“고양이가 발톱으로 벽지 다 긁으면 어쩌려고. 장사 망할일 있어?”
“우리도 원단 많아서 안 돼요.” 양복점 사장님도 대꾸했다.
이발관 사장님은 새끼 고양이의 눈을 바라보며 잠시 마음이 흔들리는 듯했다. 고양이는 작은 눈으로 사장님을 올려다보며 애절한 눈빛을 보냈다. 그러나 이발관 사모님이 펄쩍펄쩍 뛰며 사장님을 이발관으로 끌고 들어가며 말했다.
“하루종일 인간들 털 치우기도 힘든데, 고양이 털까지는 못 치운다니까.”
하나 둘씩 떠난 자리에는 철물점 사장님과 우리 사장만 남았다.
철물점 사장님은 아무 말 없이 양손에 쥔 새끼를 우리 사장에게 내밀었다.
사장은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었고, 철물점 사장님은 씩 웃고 가게로 들어갔다.
사장은 고양이를 한참 바라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카페는 못 할 것 같고, 너는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다...” 그녀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눈앞의 작은 새끼 고양이를 보았다.
그 순간, 고양이 전문 소품샵이 떠올랐다. 고양이들을 위한 장난감과 인형, 다양한 소품들이 진열된 가게가 머릿속에 그려졌다. 이렇게 귀여운 고양이라면 은둔 생활자들에게 좋은 친구가 될 것 같았다. 사장은 고양이를 품에 안으며, 이 작은 녀석이 자신에게 새로운 길을 열어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사장은 집사가 되었다.
주어온 고양이라는 뜻에 이름은 냥냥쭙쭙.
가게 이름 역시 애묘의 이름을 따서 냥냥쭙쭙이 되었다.
태국말로는 사랑한다는 표현인 뽀뽀쪽쪽이라나 뭐라나.
냥냥쭙쭙은 무슨. 먹는 거 좋아하는 나는 냠냠쩝쩝밖에 모른다 이거야.
코리안쇼트로 분리된다는 이 고양이의 종은 말하자면 그냥 길고양이라는 뜻이다.
그냥 딱히 예쁜 것도 아니고, 귀여운 것도 아니고, 그런 고양이였다.
색깔은 고작해야 흑백이 섞인 듯한 회색빛이었다. 눈은 차마 똑바로 볼 수 없어서 슬쩍 옆으로 봤지만, 그것도 그저 다른 고양이들처럼 평범하게 초록색이었다.
그 눈빛은 마치 내가 제일 싫어하는 사람처럼 날 불편하게 만들었다. 무언가 짜증이 나는 듯한, '너 여기서 뭐 하는 거야?'라는 시선이 계속 날 따라다녔다. 몸도 얄팍하고 날씬한데, 그러면서도 어딘가 찡그린 표정과 매끄럽지 않은 걸음걸이로 느껴졌다. 기어 다니는 모습에서 그런 불쾌한 느낌을 주는 고양이는 그다지 보기 좋은 모습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이 고양이는 자주 쌩~ 하고 내 옆을 지나가서 깜짝 놀라게 만들곤 했다.
게다가 일상적으로 나를 끊임없이 째려보는 눈빛으로 몰래 다가오는 것을 보면, 뭔가 교활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내가 이렇게 얄밉게 생각하는 이유는, 아무리 봐도 얌전한 척하면서 여전히 나를 자꾸 괴롭히려는 듯한 행동들이 계속 이어졌기 때문이다.
이런 고양이에게 뽀뽀쪽쪽이니 어쩌니 하며 귀엽다고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도 고양이를 지나치게 애정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일 것이다.
지금 저 두 사람처럼.
“냥냥쭙쭙~ 엄마 왔어. 아이고 예뻐.”
“냥냥쭙쭙~ 나도 왔어. 아이 귀여워.”
사장과 여운은 고양이를 두고 마치 어린아이처럼 쭈구리고 앉아 있었다. 그들은 고양이가 다가오자 눈을 반짝이며, 작은 손으로 고양이를 부드럽게 쓰다듬고 있었다. 고양이는 그들의 손길에 부드럽게 몸을 비틀며, 조금은 어색하게 발을 올려 놓았다. 그 모습을 보고 사장은 온몸으로 기쁨을 표현하며 고양이의 털을 쓰다듬었다. 여운도 예외가 아니었다. 고양이를 보고 입가에 웃음을 머금으며 손끝으로 살살 긁어주는 모습은 마치 아주 귀여운 아기를 돌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 광경을 옆에서 보고 있던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럴 줄 알았다. 사장님도 그렇고 여운도 그렇고, 저 두 사람은 고양이에 대한 사랑이 넘쳐흘러서 딱히 뭐라고 할 수 없었다. 그저 고양이를 예쁘다며 한없이 좋아하는 모습에 나는 정말 질렸다. 그들의 얼굴에는 순수한 행복이 가득 차 있었지만, 내겐 그것이 불편한 시선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그때,
저 쩝쩝이 시키가 내게 천천히 고개를 돌리고는, 뚫어지게 나를 바라보았다. 마치 '너도 나를 좋아하지 않을 텐데, 왜 그렇게 싫어하는 거야?' 라는 듯한, 뻔한 속마음이 읽혀지는 눈빛이었다. “흥!” 나를 쳐다보며 코웃음을 치는 것처럼도 보였다. 그 눈이 무서워 나도 모르게 급히 시선을 피하고 말았다. 젠장... 속으로 한숨이 나왔다.
맨날 사람들 눈치 보며 고개 숙이고 다니는 것도 힘든데, 이제 고양이까지 내 눈치를 봐야 한다니. 도대체 이 고양이는 내가 왜 싫어하는지 모른 채, 저리도 당당하게 나를 무시하고 쳐다보며 도발하는 걸까? 기분이 더러워졌다.
예민하고, 영역동물이라 산책하러 밖에 나가는것도 싫어하고, 혼자 있는 걸 좋아하며 방어적인 기질이 아주 강한것까지 전부 내가 싫어하는 것 투성이었다.
인간만 아닐뿐 나 같은 운둔형 외톨이랑 뭐가 다른 거냐. 그런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내가 고양이를 싫어하는 이유는 결국 그와 비슷한 점이 많아서일지도 모르겠다.
사장이 쩝쩝이를 쓰다듬는 손에 고정한 채 내게 묻는다.
“선을님은 고양이 싫어해요?”
나는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그래서 질문에 질문으로 답했다.
“사장님은 고양이를 왜 좋아해요?”
그러자 사장님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갸웃했다.
“나랑 닮아서요.”
그러고는 천천히, 마치 그걸 확인이라도 하듯 고양이의 눈을 빤히 바라봤다. 고양이는 꼬리를 살랑이며 사장님의 무릎을 앞발로 꾹꾹 누르고 있었다. 사장님은 살짝 웃으며 손끝으로 고양이 턱을 간질였다.
사장의 손길에 고양이는 만족스러운 듯 가늘게 눈을 찌푸리며 골골거렸다.
이상했다. 사람눈은 못 보면서 고양이 눈은 저렇게 뚫어져라 잘만 쳐다보네.
어쩌면 사장도 사람이 아니라 저 쩝쩝이처럼 고양이가 아닐까.
그 순간, 고양이가 갑자기 몸을 쭉 늘이며 캣타워로 뛰어오르려 했다. 하지만 중심을 잘못 잡았는지, 옆에 있던 선반을 쳤다.
쿵!
무너지는 소리와 함께, 우리가 포장하려고 미리 만들어 놓은 택배 상자들이 와르르 무너졌다.
여운은 머리를 긁적이며 피식 웃었고, 사장님은 그저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괜찮아. 다시 하면 돼.”
나는 말문이 막혔다. 그런데 문제는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고양이가 가게 구석으로 달려가더니 바닥을 긁기 시작했다. 그러다 마치 뭔가 중요한 일을 끝내야 할 듯, 고양이만의 작은 공간으로 쏙 들어갔다. 그곳은 깨끗하게 준비된, 고양이가 자신만의 시간을 보내기 위한 은밀한 장소였다.
설마...
사장님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고양이 쪽으로 가더니, 이내 감탄 섞인 목소리를 냈다.
“어머, 우리 냥냥쭙쭙 똥 싸는 거예요? 아이고 기특해라.”
나는 기가 차서 헛웃음을 지었다. 그런데 사장의 얼굴을 보니, 너무나도 흐뭇한 표정이었다. 심지어 감격스럽기까지 했다.
“동물이든 사람이든 똥을 잘 싸야 돼요. 그래야 기분이 좋아져. 가뜩이나 마음도 무거워 죽겠는데, 똥까지 이고지고 다녀봐요. 못 움직여. 나가기 싫어져.”
나는 순간 머리를 맞은 듯 멍해졌다.
분명 무슨 냐옹이 같은 소리야? 싶은 말이었다.
그런데도 어딘가 가슴 한구석이 울렸다.
그래 어차피 이 무거운 마음녀석이 쉽게 몸에서 나갈일 없으니까, 비워낼 수 있는 거라도 열심히 비워내야지. 뭐가 있을까. 똥이야 당장 이따 화장실만 갔다와도 해결되는거고. 나가고 싶은 가벼운 몸이 되려면 난 뭘 비워내야 하지.
욕심, 비교, 그리고 성공...
음식물로 만든 찌꺼기를 배출하는 일은 그렇게나 간단한데, 상처와 고통으로 만들어진 찌꺼기들은 도대체 어떻게 배출해야하는건가.
“똥 싸는 것도 예쁘네. 다 쌌어? 엄마가 금방 갈게.”
남은 깊은 생각에 빠트려놓고 자기는 아무 없다는 듯 고양이 똥을 치우러 가는 사장. 그녀의 신난 뒷태를 보니 왜 저러나 싶으면서도 동시에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사장은 비워내고 왔을까.
부르르 키링 사건 이후로 사장은 며칠간 가게에 나오지 않았다. 사장의 일은 대부분 여운이 맡아서 할 수 있었고, 가게 홈페이지와 스토어에는 상시 우리 가게 특성상 배송이 지연될 수 있고 실수가 있을 수 있다는 공지를 올려놨기 때문에 큰 문제는 없었다.
며칠 후, 가게로 돌아온 사장의 얼굴과 몸이 띵띵 부어있었다.
“휴— 덥다, 더워. 조금 있음 가을인데 날씨가 미쳤나봐.”
한 손에 아이스 바닐라 라떼가 담긴 텀블러를 들고, 다른 손에는 커다란 키링이 주렁주렁 달린 가방을 든 사장이 들어왔다. 캔버스 가방 한쪽에는 고양이 키링이 잔뜩 매달려 있었는데, 털복숭이 같은 인형부터 반짝이는 아크릴까지 종류도 제각각이었다.
사장은 보부상처럼 빵빵하게 부풀어 있는 가방에서 반짝이는 금박 포장의 초콜릿, 바삭바삭한 와플 쿠키, 아기자기한 캐릭터가 그려져 있는 일본 수입과자를 순서대로 꺼냈다. 그녀의 매일 아침 출근 루틴 그대로였다.
여운은 과자 무덤을 보자마자 질색팔색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사장님 이거 다 드실 거 아니죠? 아니어야만 해요!”
“당연히 아니지. 하나만 먹을 거야.”
그러면서도 자연스럽게 초콜릿 두 개를 집으려던 찰나— 여운의 손이 부드럽지만 단호하게 뻗어나갔다.
“하나만요.”
순식간에 초콜릿 하나를 빼앗긴 사장은 아쉬운 얼굴로 남은 초콜릿을 멍하니 바라봤다. 한편 여운은 남은 과자 봉지를 한가득 가슴에 끌어안더니 망설임 없이 탕비실로 직행했다.
사장은 여운을 뒤따라 나갔다. 과자 봉지를 품에 안고 있는 여운을 힐끗 보더니, 냉장고 문을 열었다. 안쪽을 잠시 뒤지던 사장은 손을 뻗어 작은 요거트 병을 꺼냈다.
여운이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사장님, 그거 뭐예요?”
“이...이거는 무가당 이야.”
여운은 한숨 돌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드셔도 돼요. 사장님 근데 요거트 신맛나서 싫어하시잖아요?”
요거트 뚜껑을 뜯는 사장의 얼굴이 붉어졌다.
“요새 화장실을 잘 못가서...”
“서대표님한테 안 가세요? 오늘 거기 가시는 날이잖아요.”
사장은 오늘따라 움직이기도 싫다며, 여운 보고 대신 다녀오라고 했다.
아직 며칠 전 일을 완전히 비워내지 못한 것 같았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사장도 결국 나약한 인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잘 비워야 한다. 이고지고 다니면 얼마나 무겁냐‘고 입으로는 쉽게 말하더니, 정작 자신도 그 말을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고 있으니까.
음식물 찌꺼기든, 마음의 찌꺼기든, 한 번 몸 안으로 들어오면 쉽게 빠져나오지 않는다.
타인에게 조언을 구하거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일도 아니다.
친구랑 화장실에 같이 간다고 해서 변비가 해결되는 건 아니지 않은가.
결국 비워내는 일은 스스로의 몫이다.
사장은 그걸 잘 알고 있기에 어떻게든 내보내려 애쓰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 과정에서 더 많은 것을 집어넣고 있었다.
가뜩이나 마음도 무거운데, 그 위에 음식물 찌꺼기까지 쌓아 올리니 몸은 점점 더 무거워진다. 후엔 밖에 나가기 싫어지고, 다시 은둔 생활로 돌아가는 악순환.
머리는 알지만 행동이 따라주질 않는다. 나도 마찬가지고.
무거운 줄 알면서도 끌어안고 버틴다.
몸과 마음이 허하고 추우니까 자꾸만 뭐라도 남겨 두려고 한다.
그게 음식물 찌꺼기든, 마음의 찌거기든.
내가 가진 찌꺼기는?
퇴근 후, 집에 들어서면 발걸음을 죽여야 했다.
그 소리 하나로, 만약 엄마나 아빠가 내 존재를 알게 되면 또 잔소리나 싸움이 시작될 테니까.
그냥 최대한 없던 사람처럼 살아야 했다.
현관문을 조용히 닫고, 소리도 없이 거실을 지나 방으로 향했다.
눈에 띄지 않게, 그들의 관심을 끌지 않게... 그런 노력이 몸에 배어 있었다.
불도 켜지 않은 채 샤워를 하고, 물소리가 너무 커서라도 들리지 않도록 빨리 끝냈다.
몸에 묻은 물기를 대충 닦고 잽싸게 방으로 돌아가 문을 닫는다.
잠금장치가 고장 나서 쉽게 잠기지 않는 그 문에 보안장치를 살짝 걸어 놓았다.
벌컥 열리는 문, 무방비 상태에서 받는 공격.
가족으로부터 나를 보호하는 마지막 방어선이었다.
침대 끝에 걸터앉아 편의점에서 사온 삼각김밥을 급하게 먹고, 급히 불을 껐다.
문 틈 사이로 새어나가는 불빛을 보고 내가 여기에 있다는 걸 눈치챌까봐.
오늘도, 내가 존재한다는 걸 모르길 바라는 마음으로, 숨죽여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편안한 침대위에 누웠음에도 몸이 극도에 긴장상태로 바뀌며 식은땀이 흘렀다. 숨이 가빠지고, 마치 목이 조여오는 것처럼 답답했다. 매일같이 꿈에 나오던 바다가 보이질 않았다.
나는 좁고 어두운 공간에 앉아 있었다. 바닥은 차가웠고, 벽에 등을 기댄 채 나는 고개를 들었다. 대각선 맞은편에, 멀리서 낯선 여자의 뒷모습이 보였다. 익숙하면서도 낯선 모습이었다. 고장난 엘리베이터에 갇힌 건가? 이곳엔 여자와 나 둘뿐이었다. 어떻게 된 거지? 아니,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비상버튼을 눌러야 하는데, 저 여자가 눌렀을까? 물어볼까? 모르는 사람한테 말을 거는 건 항상 힘든 일이다. 도무지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모르겠다. 아직 소리도 내지 않았는데, 목소리가 떨리고, 스트레스성 장염에 걸린 것처럼 배속이 꾸룩거리기 시작했다. 한참을 망설이다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기요.”
여자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목소리가 작아서 못 들었나? 나는 다시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했다.
“저기, 안녕하세요.”
하지만 여자는 여전히 나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철저하게 무시했다.
왜지? 왜 나를 무시하는 거지? 그녀의 냉담함에 위축된 내 목소리는 금새 힘을 잃었다. 공간 안에는 잠시 정적이 흘렀고 그대로 시간도 함께 흘러갔다.
얼마쯤 시간이 흘렀을까.
지금 밖은 몇 시일까?
언제까지 이렇게 좁은 공간에서 저 여자랑 갇혀 있어야 하는 걸까?
이렇게 가만히 있으면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을 거야.
가서 얼굴을 들이대야겠다. 웃는 얼굴에 침뱉지는 않겠지.
뱉는대도 지금은 방법이 없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지만, 그 순간 오른팔에서 찢어질 것 같은 통증이 밀려왔다. 움직이지도 않았고, 조금만 움직여도 죽을 것 같았다.
부러졌나? 도대체 어떻게 된 거지? 어디서 다친 거야?
많이 놀랐지만 감각을 애써 무시하고 사건부터 해결해야지 싶었다.
이가 없으면 잇몸. 왼팔로 겨우겨우 바닥을 짚고 일어나려 했는데, 그때 더 큰 비명이 터져나왔다. 양쪽 다리가 말을 듣지 않았다. 아무런 힘도, 감각도 없이 그저 그 자리에 달려만 있었다.
충격과 공포에 눈물이 펑펑 터져나왔다.
작은 공간이 떠나갈 듯이 표효하며 울부짖었다.
차가운 바닥과 싸늘한 공기, 표현할 수 없을만큼 아팠다. 몸 밖도, 안도.
여자는 단 한 번도 내게 돌아보지 않았다. 내가 언제까지 이렇게 울고 있을 때까지도.
그래도 지금 여기서 도움을 청할 사람은 저 여자밖에 없다.
나는 간신히 숨을 쉬며 다시 입을 열었다.
“저기요, 죄송한데요. 제가 다친 것 같아요. 팔다리가 움직이지 않아요. 119에 전화 좀 해주시겠어요?”
하지만 여자는 여전히 침묵을 지켰다. 작은 미동조차 없었다. 나는 점점 화가 나기 시작했다. 사람을 무시해도 유분수지, 대답도 안 하고, 다친 사람을 한 번 쳐다보지도 않는다. 뭐 저런 인간이 다 있어?
급박한 상황 앞에서, 예의와 매너를 지키며 이성을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나는 그 몇에 들어갈 사람이 당연히 아니었다.
“저기요! 내 말 안 들려요? 이봐요, 여기 사람이 다쳤다고요!”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도와줄 의무는 없다는 거 알아요. 그래도 적어도 묻는 말에 대답 정도는 해줄 수 있잖아요. 도대체 여기 어디냐고요? 왜 당신이랑 나랑 이렇게 좁은 곳에 갇혀 있는 거예요? 그런데 당신은 그렇게 멀쩡하고, 왜 내 몸만 이렇게…”
그때, 나는 더 이상 소리를 지를 수 없었다. 앉은 자리에서부터 다리까지, 갑자기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다. 그 따뜻함은 점점 옆으로 퍼져 나갔다. 코 끝을 찌르는 암모니아 냄새가 나를 감쌌고, 그것은 내 뇌리에 닿자마자, 나를 기절시키듯 퓨즈를 내리게 만들었다. 충격과 수치심의 압박이 너무 심해져, 나의 몸은 더 이상 기능을 하지 않았다. 나는 얼빠진 표정으로 가만히 앉아 있었다.
잠시 후, 따뜻했던 다리는 어느새 축축해졌고, 그 액체는 식어가며 추위를 불러왔다.
그저 무력하게 앉아 있는 나는 최악으로 망가져 있었다.
모든 것은 무너졌고, 더 이상 나를 구할 방법은 없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