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랑 쫀득 애착 인형]
“너무 귀여워, 진짜!”
여운은 아침부터 신제품 소품을 들고 들뜬 목소리로 난리였다. 그녀의 손에 쥐어진 것은, 고양이 모양의 미니어처 미끄럼틀이었다. 미끄럼틀 위에 앉아있는 고양이 인형은 뭔가 특별한 점이 있었다. 고양이의 발끝에 작은 배터리가 달려 있어, 미끄럼틀을 타는 순간, 고양이의 뒷다리가 살짝 흔들리며 ‘웅’ 하고 작게 울면서 내려갔다. 그 모습을 보고 여운은 입을 떼지도 못할 만큼 흥분했다. 얼굴엔 말 그대로 광기 어린 사랑이 묻어났다.
덕후 중에서도 찐덕후.
여운은 귀여움이 세상을 구한다는 말을 밥 먹듯 반복했고, 고양이 좋아하는 사람중에 나쁜 사람은 없다라는 부족한 논리를 신봉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인지 그녀는 늘 밝고 경쾌하다. 방 안에서 자신을 가뒀던 시간이 있었나 싶을만큼. 고양이 미니어처 하나로 그녀의 세상은 한 여름 낮보다 더 환해졌다.
그 모습이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나는 지금, 그냥 숨 쉬는 것조차 버거운데. 온몸은 뻐근하고, 마음속엔 어두운 물이 고여 있는데. 여운님이 히키코모리였고, 암 투병까지 하고 있는 사람이라니.
“여운님.”
그녀가 고개를 돌렸다. 아직도 손에 작은 고양이 피규어를 들고 있었다.
“네?”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있는 그대로 말했다.
“어떻게 그렇게 밝아요? 어떻게 그렇게 작은 거 하나에 행복해요?”
여운이 피규어를 내려놓으며 천천히 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3년동안 꾸준하게 심리상담을 받았어요. 처음엔 별 느낌 없었죠. 매주 나가서 말만 했으니까요. 크게 효과도 없는데 비용도 부담스러워서 그만 두려는데 어느날 중요한 걸 깨달았어요.”
“중요한 것이요?”
“네, 자기 수용, 자기 긍정, 자기 일치. 이 세 가지요.”
“어렵네요, 그게 뭐예요?”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이는 거요. 못나도, 아파도, 지금 이대로 괜찮다고 말해주는 거. 그리고... 내가 뭘 좋아하는지, 뭘 원하고 있는지에 솔직해지는 거요. 억지로 밝게 꾸미는 게 아니라, 내가 나에게 거짓말하지 않는 상태를 말해요.”
그녀의 말투는 담담했지만, 그 안엔 분명 무언가 단단한 것이 깃들어 있었다.
“이 나이에 대학도 못갔고 변변한 직업도 가져본적도 없고, 여전히 병마와 싸우고 있는 몸이죠. 그래도 이런 나를 받아들이고 사랑하기로 했어요. 내가 고양이를 좋아하고 작은 소품들을 보는 것만으로 행복해한다는 사실을 알았고, 다른 사람을 위해 억지로 만드는 행동과 표정없이 나. 나라는 사람으로 충분히 괜찮다. 말해주고 있어요. 안 괜찮아도요.”
‘안 괜찮아도...’
그 말 앞에서 나는 잠시 멍해졌다.
언제나 실패했다고 생각했다. 못났다고 생각했다. 가지고 태어난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다른 사람들을 위해, 그리고 내가 원하는 모습을 위해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인것처럼 밥 먹듯이 연기를 했다. 내가 진짜 좋아하는 것과 원하는 것은 무시한채로.
나도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나라는 사람으로 충분히 괜찮다.’
하지만 그러면 거짓말 아닌가.
안 괜찮은데 괜찮다고 말하는 게, 내가 나한테 하는 거짓말이잖아.
혼란스러웠다.
그러나 그 혼란의 끝에서, 아주 작게 무언가가 움트고 있었다.
괜찮지 않다고 인정하는 것.
그 자체가 어쩌면 괜찮아지는 첫 걸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었다.
한껏 흥이 묻은 발걸음으로 다시 귀여움을 구하러 선반으로 향하는 여운의 뒷모습을 보니, 문득 어제밤 꿈 속에서 봤던 그 여자의 뒷모습이 떠올랐다.
지난밤 악몽에 시달린 탓에 몸이 무겁고 컨디션이 엉망이었다. 피곤함에 눈꺼풀이 처지고, 조청이 잔뜩 묻은 약과를 먹고 손을 안 닦은것처럼 마음 한켠이 찝찝했다. 왜 그런 꿈을 꿨을까, 그 여자는 도대체 누구였을까. 떠오르는 질문들이 머릿속을 맴돌았지만, 답은 없었다.
잠시 후, 늘씬한 모델 같은 여자가 커튼을 젖히며 가게 안으로 들어왔다. 첫 인상은 강렬했다. 그녀는 나를 향해 가벼운 목례를 하더니, 스튜디오로 들어갔다. 가게 구석엔 안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작은 미니 스튜디오가 있었다. 거치대와 카메라 조명까지 15초 미만의 짧은 영상을 촬영하는 데 최적화된 공간.
여자는 마치 그 공간이 자신의 작업실인 듯 능숙하게 세팅을 시작했다. 나는 그 장면을 멍하니 바라보며 선반 쪽으로 걸어갔다. 여운은 여전히 귀여운 소품을 탐색하며 행복해 보였다.
“여운님, 저 분은 누구예요?”
여운이 흘끗 스튜디오 쪽을 보고는 다시 선반으로 시선을 돌리며 대답했다.
“영상 담당자 제이님이에요.”
“담당이요? 우리 가게에도 그런게 있어요? 다들 그냥 번갈아가면서 일하잖아요.”
“영상 촬영 만큼은 제이님이 하지 않으면 퀄리티도 조회수도 현저히 떨어지더라고요. 손이 정말 예쁜데다 포장도 깔끔하게 잘 하세요. 발음도 좋고, 목소리도 예뻐서, 아나운서 지망생이었대요. 아무튼 구독자가 엄청 늘었어요. 덕분에 주문량도 늘었고요.”
“근데 전 오늘 처음 보는데요?”
“아... 제이님은 아직 집 밖에 나오는 걸 많이 힘들어하세요. 그래서 거의 두 세달에 한 번 정도 오세요.”
어느정도 세팅이 끝나자 그녀는 양 손에 가녀리고 청순한 매쉬 소재의 팔토시를 끼고 단정하면서도 야무진 손길로 포장을 시작했다.
고양이 인형을 얇은 노루지 봉투에 조심스레 넣었다. 투명한 종이 사이로 둥근 실루엣이 어렴풋이 비쳤고, 접힌 부분을 정성스레 눌러 밀봉 스티커를 붙였다.
그다음엔 OPP 봉투. 메모지와 볼펜을 차곡차곡 넣어 매끈하게 정리한 뒤, 조금 더 단단한 각대 봉투에 인형과 문구 세트를 깔끔하게 담았다. 마지막으로 입구를 밀봉하고, 분홍색 박스에 넣어 테이프로 단단히 마무리했다. 최대한 로고를 가리지 않게 조심스럽게 붙인 송장이 마지막 터치.
중간중간 화면을 확인한 그녀는 뭐가 맘에 안 드는지 같은 장면을 몇 번이고 다시 촬영하기도 했다.
그녀는 잠시 숨을 고르더니, 갑자기 마이크를 세팅했다. 입술이 조용히 움직이며 무언가를 말했지만, 스튜디오의 방음 때문인지 내용까지는 들리지 않았다.
“제이님도 열심히 살았거든요.”
어느새 옆에 와 있던 여운이, 창 너머 스튜디오 안을 바라보며 말했다.
제이는 뉴스 및 장르 연습, 신문 음독, 칼럼 필사, 라디오 뉴스 모니터링, 시사 공부, 운동, 상식 공부, 독서, 논술 쓰기 등 하루도 허투루 보내지 않았다고 했다. 아나운서가 되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스스로에게 채찍질하듯 익혔다.
아나운서의 길은 녹록지 않았다.
경쟁은 치열했고, 학원비와 메이크업 비용만 해도 몇백만 원. 부모님이 지원해주셨지만, 그만큼 제이의 어깨는 무거워졌다. 아르바이트로 생활비를 벌며 새벽까지 스피치 연습을 했다. 하루 4시간씩 발성과 발음을 다듬었고, 틈틈이 토익과 한국어 공부도 병행했다. 하지만 그 노력에도 불구하고 번번이 최종 문턱에서 미끄러졌다.
“왜 나는 안 되는 걸까?”
좌절할 틈도 없이, 다시 지원서를 냈다. 지방 방송국까지 지원했지만 결과는 같았다. 몇 년을 바친 꿈이었기에 쉽게 포기할 수도 없었다.
또한가지 그녀가 끝내 넘지 못한 벽은 ‘나이’였다.
방송업계 특성상 젊고 예쁜 사람을 선호하는 분위기라 지망생 생활이 길어질수록 나이 때문에 더 불리해지는 구조였다.
지독하리만치 노력했지만 세상은 좀처럼 기회를 주지 않았다.
“꿈이란 건 도대체 얼마나 가야 닿을 수 있을까요? 우주의 시간만큼 멀리 가야해서 우리같은 평범한 사람은 갈 수가 없나...”
제이의 이야기는 남 얘기가 아니었다. 내 얘기였고, 이 가게에서 일하는 모든 청년들의 이야기였고, 너무 열심히 살았기 때문에, 너무 많이 상처를 입은 모든 청춘들의 이야기였다.
여운은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대부분에 사람들은 못가요, 너무 멀어서. 결국 적당한 지점을 찾아 정착하죠. 어르신들은 그걸 철들었다고 하더라고요. 저도 그 철이라는 거 한 번 들어보려고요.”
내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자 여운이 싱긋 웃으며 덧붙였다.
“저, 가게 일 그만두려고요.”
“네? 왜요?”
“냥냥쭙쭙은 은둔 생활자들에게 천국같은 곳이에요. 이제는 집처럼 느껴지죠. 하지만 여기서만 계속 있으면, 집에서 가게로만 옮겨온 히키코모리가 되어버릴 것 같아요. 물론 바깥 세상은 이 곳처럼 날 이해해주지 않겠죠, 배려해주지도 않을거고요. 무섭지만 그래도 나가 보고 싶어요. 너무 늦었지만, 대학도 가고, 취직도 하고, 결혼도 해보고 싶어요.”
평생 냥냥쭙쭙 그리고 사장과 함께 할 것 같은 여운이 그만 둔다는 건 정말 예상치 못했지만, 그녀의 결정과 용기는 실로 존경스러웠다.
3년 전, 그녀는 암 수술을 받았다. 그 후 시간이 흘러 그녀는 건강을 되찾았지만, 워낙 재발률이 높은 부위였던 탓에 늘 마음을 졸이며 하루하루를 살고 있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여운은 한 번도 주저앉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 반대였다.
한 번만 아파도 세상이 끝난 것처럼 느껴지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그녀는 자신을 옥죄는 수만 가지 불안과 두려움을 등에 업은 채 안정적인 울타리를 벗어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사장님 잘 부탁 드려요.”
“네? 갑자기 그게 무슨…”
“아시잖아요.”
여운이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과자쪽으로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옆에서 잘 봐주세요. 사장이라는 자리가 가게에 모든 걸 관리해야하는 자리지만, 우리 가게는 좀 특수하잖아요. 사장님도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해요.”
무언가 중요한 책임을 떠안게 된 기분이었다.
그 책임이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나를 이끌어갈 것이라는 건, 그때는 전혀 예상할 수 없었다.
시간이 흐르고, 오후의 햇살이 창문을 통해 들어오기 시작했다. 어느새 시계는 점심을 훌쩍 지나, 오후로 접어들고 있었다.
“지연아, 지연아. 여기 있어?”
어느 날부터인가 익숙해진 소리다. 가게 근처에서 종종 들려오던 남자의 목소리. 처음엔 그냥 스쳐 지나갔다. 누군가를 찾는 것 같았지만, 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장면이라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그런데 그 남자가 오늘도 다시 나타났나보다. 또다시 가게 주변을 맴돌며 누군가를 애타게 찾고 있었다. 나는 잠시 시선을 창문 쪽으로 돌렸다가, 이내 가게 홈페이지 리뷰를 확인하는 화면으로 돌아갔다. 이젠 여운이 가르쳐주지 않아도 할 수 있는 업무가 많아졌다.
홈페이지에 달린 리뷰를 확인하는 일은 항상 즐겁다.
여운같은 소품덕후들이 하트 이모티콘과 키스 이모티콘을 천 개쯤 사용하며 귀여운 리뷰들을 달아준다. 냥냥쭙쭙에 물건 덕분에 힐링되고 행복하다는 장문의 글들을 볼때면 괜히 마음이 흐뭇하고 울컥한다. 사장이 이 가게를 운영할 수 있는 큰 이유중에 하나겠지.
마우스 스크롤을 또르륵 굴려 가장 최근에 달린 리뷰들을 확인해본다.
어찌된일일까? 오늘따라 유독 안 좋은 리뷰가 많았다.
이렇게까지 안 좋은 댓글이 많이, 그것도 한 번에 달린적은 없었는데 이상하다.
‘여기서 절대 사지 마세요. 퀄리티 최악입니다.’
‘배송도 늦고, 고객센터는 연락도 안 됩니다.’
‘전화받는 직원 싸가지 없음. 진짜 최악이에요.’
한두 개가 아니라 수십 개.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악평이 계속 쏟아졌다. 요즘 사장님도 몸이 안 좋아 보이는데, 이런 걸 보면 더 심란해질 텐데… 다른 직원들도 마찬가지고.
더구나 여운이 곧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고 있는 시점에, 이런 일로 마음을 어지럽히고 싶지 않았다. 가게가 편안해야 그녀가 마음 편히 떠날 수 있을 것이다.
임의대로 지울수도 없는 노릇이고, 어떻게 해야하지. 흠...
턱을 괴고 다시 한 번 마우스를 또르르 내리는데, 눈에 띄는 게시물 제목이 한 줄로 떠올랐다.
‘살인자. 내 딸 죽인 가게.’
순간, 뒤통수가 뜨겁게 달아오르며 머리가 띵하고 멍해졌다. 그 말이 내 귀에 울려 퍼지듯이 박혀오는 느낌이었다. 충격이 온몸을 휘감는 순간, 숨이 턱 막혔다. 따끔할 정도로 날카로운 말이 내 가슴을 파고든 것 같았다. 눈앞이 흐려지고, 화면 속 글자는 마치 빨간 피가 주루룩 흘러 내리는 것처럼 보였다.
그때, 촬영을 마친 제이가 여운과 함께 스튜디오에서 나왔다.
“벌써 구독자가 10만 명이 넘었어요! 실버 버튼 곧 온대요.”
여운이는 신난 표정으로 말했다. 제이도 조용히 옆에서 웃었다.
여운이 나를 발견하며 제이에게 뭐라고 말을하자 그녀가 끄덕이며 발걸음을 옮겼다.
아마 여운이 나와 인사를 하자고 제안한거겠지.
제발 오지마. 지금은 안 돼. 속으로 간절히 외쳤지만 그들에겐 닿지 않았을 것이다.
심장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그들이 가까워질수록, 손끝에서부터 미세하게 떨리는 걸 느꼈다. 그 순간, 화면을 재빨리 스크롤하며 삭제 버튼을 눌러야 한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하지만 손이 말을 듣지 않았다. 잠시 멈칫한 나는 그들이 점점 내 쪽으로 다가오는 걸 보며, 마음이 점점 조급해졌다.
그들이 거의 내 앞에 올 때까지, 나는 계속 고민했다. 이제, 내가 이 게시물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생각만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그들이 거의 내 앞에 왔을 때, 나는 떨리는 손으로 겨우 게시물 삭제 버튼을 눌렀다.
“선을님. 여기는 제이님이에요.”
나는 떨리는 손으로 겨우 게시물 삭제 버튼을 눌렀다.
제이가 나를 향해 수줍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편하게 제이라고 불러주세요.”
아무것도 모르는 그녀들이 해맑게 인사를 건네는 모습을 보자 내 몸은 점점 더 뜨겁게 달아올랐다. 땀이 삐질삐질 흐르기 시작했고, 얼굴이 빨개지는 걸 느꼈다.
하지만 나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미소를 지으며, “안녕하세요, 제이 씨.” 하고 가볍게 인사했다.
내 손끝은 여전히 떨렸고, 심장은 계속 쿵쾅거렸다.
쿠당탕.
사장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커튼 뒤에서 나타났다. 양손에 커다란 인형을 한 아름 안고 헉헉거렸다. 땀범벅이 된 얼굴로 인형을 바닥에 내려놓고 숨을 고르자, 성격급한 여운이 금새 쫓아가 비닐 포장을 풀었다.
“사장님, 이게 뭐예요?”
“예전에 우리 가게에서 한 번 팔았었는데 계속 재입고가 안 됐잖아? 지난주에 일본 도매 사이트 들어갔더니 이게 떡하니 있는 거야! 막 손이 떨리더라고. 빨리 안 사면 금방 품절되니까. 미친 듯이 결제까지하고 좋아했는데 글쎄... 가게가 아니라 집 주소를 쓴거있지. 더운데 들고오느라 죽을뻔했네.”
그녀가 이글거리는 눈빛과 허공을 가르는 손동작으로 이야기를 풀어 놓는 모습이 마치 군대 이야기 하는 남자들 같았다.
여운이 꺼낸 고양이 인형은 사람 상반신 사이즈만큼 컸으며, 부드러운 촉감이 눈으로도 느껴질 정도였다. 커다란 귀, 동글동글한 눈, 포근한 털.
처음으로 이 가게에서 무언갈 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 잠자리가 하도 사나워서, 저런 걸 안고 자면 무자비한 몽마(夢魔)라도 ‘풉! 유치하긴’ 하면서 한 번 웃지 않을까? 그리고 꿈의 강도를 조금은 낮춰주지 않을까 싶었다.
“너무 귀여워요! 저 한 번 안아봐도 돼요?”
여운이는 신이 나서 인형을 꼭 안아보더니, 옆에 있던 제이에게도 건넸다.
“제이님도 한 번 안아봐요! 치유되는 느낌이랄까?”
“저는 괜찮...”
제이는 손사래를 쳤지만, 여운이 억지로 인형을 떠넘겼다. 제이가 인형을 받아드는 순간, 그녀의 얼굴에 시퍼런 그늘이졌다.
어라? 제이님은 나보다 이런 걸 더 싫어하는구나. 다행이다.
여기에 사장이랑 여운 같은 사람만 있는 게 아니었어.
그 남자의 목소리가 창문 너머에서 다시 들려온다.
“지연아. 지연아. 너 거기 있지?”
툭.
제이가 사색이 된 얼굴로 인형을 떨어뜨렸다.
애착은 마음의 안정감을 주지만, 방향이 조금만 틀어져도 광적인 집착으로 변질된다. 집착을 사랑이라 부르는 괴물들은 상대방이 고통스럽든, 슬프든 상관없이, 자신이 상대를 소유하고 안고 있을 때 안정감을 느낀다면 그것으로 만족한다.
하지만 세상에는 남녀 간의 사랑보다도 더 불타오르는 사랑이 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의 꿈을 향해 몸이 다 타버려도 좋을 만큼의 열정적인 사랑이다. 누군가는 그런 사랑을 이해하지 못한다. 어떻게 사랑이 연인 간의 애정보다 더 소중할 수 있느냐고 반문한다. 하지만 그런 부류의 사람들은 영원히 이해할 수 없다. 그들이 강요하는 폭력적 사랑과 세뇌는 ‘사랑’이라는 단어를 더럽힐 뿐이다. 이런 이야기는 매일같이 뉴스에 나온다. 이제는 일상이 되어버린 비극.
제이와 그의 남자친구의 만남은 대학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항공승무원과 재학생이던 제이는 단정한 머리, 날렵한 목선, 깔끔한 유니폼 자태로 남자들의 로망을 자극하는 존재였다. 그를 처음 본 남자는 한눈에 반했다. 사진전공이었던 그는 모델을 찾는다며 그녀에게 접근했다. 썩 괜찮은 외모, 찍었다하면 인생사진을 남겨주는 그의 사진 실력에 제이도 점차 마음을 열게 되었다.
세상이 많이 바뀌었다지만 예술은 잘 나가는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여전히 배고픈 직업이었고, 그는 전형적인 후자에 속했다. 공모전에 낸 작품은 번번이 탈락의 고배를 마셨고, 소셜미디어에 사진을 올려 홍보해보기도 했지만 돌아오는 건 늘 무관심과 지인 몇 명의 좋아요 버튼 뿐이었다. 자신의 작품이 빛을 보지 못하는 현실에 불만이 쌓이자, 밤새 술이나 마시고 24시간 운영하는 PC방을 전전했다. 수입은 없고 지출만 늘자 그에게는 목숨과도 같았던 카메라마저 팔았고, 그날부터 그는 인간의 영혼도 같이 팔아버렸다.
악마가 되어갔다. 재가 잔뜩 낀 세상으로만 보이는 눈을 가진.
여자친구의 꿈이 점점 위협적으로 느껴졌다. 혹여 그녀가 성공해서 자신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된다면? 돈도 더 많아지고? 감히 쳐다볼 수 없는 레벨로 올라가 버린다면? 그의 불안은 점점 커졌고, 그 감정은 곧 분노로 변질되기 시작했다.
제이는 꿈을 위해 열심히 달렸다. 메이크업과 학원비를 벌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하고, 틈틈이 연습하며 아나운서 공채 시험을 준비했다. 자연스레 핸드폰을 볼 시간조차 없었다. 남자는 끊임없이 전화를 걸어왔고, 문자를 보냈다. 답장이 늦어질 때마다 그는 지옥의 불같이 화를 냈다. 그리고 결국, 사건이 터지고야 말았다.
그날, 제이는 하루 종일 학원에서 훈련하고, 발성 연습을 하고, 토익 시험까지 보고 왔다. 시험이 끝난 후 핸드폰을 켜자마자 수십 개의 부재중 전화와 메시지가 쏟아졌다. 그리고 그 메시지 중 하나가 그녀를 얼어붙게 만들었다.
“시발, 나보다 네 꿈이 더 중요해?”
그의 분노는 단순한 짜증이 아니었다. 감정이 격앙된 그는 제이를 찾아왔고, 길거리 한복판에서 소리를 질렀다. 제이는 무서웠다. 몸이 떨렸다. 그래서 결국 결심을 내리고 말했다.
“우리 그만 만나자.”
그 순간, 그의 눈빛이 뒤틀렸다. 다음 순간, 거친 손이 그녀의 목을 움켜쥐었다. 숨이 막혔다. 그는 가까운 상가 건물로 그녀를 질질 끌고 가 벽에 세게 밀쳤다.
“헤어져? 네 까짓게 감히.”
그의 손이 매섭게 올라가려던 순간, '딩'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두어 명의 사람들이 내리며 그들 커플을 힐끔거렸다. 제이는 흐느낌을 참으려다 훌쩍거리며 어깨를 떨었고, 그는 곧장 손을 내렸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곧 억지 미소를 지으며 제이의 어깨를 다정히 감싸 안았다.
“야, 울지 마. 조용히 따라 들어와,” 그는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고, 그녀의 팔을 끌어당겼다. 제이는 저항할 힘조차 없이 끌려갔다.
그는 가장 가까운 인형 가게로 그녀를 밀어 넣었다. 이내 의심스러운 시선들이 따라붙는 것을 느꼈다. 가게 유리창 밖으로 핸드폰을 들고 서성이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들의 손이 자연스러운 척하며 카메라 위치를 조절하는 모습에 그는 눈살을 찌푸렸다.
황급히 매대를 스캔하던 그는 제일 큰 인형 하나를 집어 들었다. 커야 밖에있는 저 인간들한테 보일테니까.
말랑 쫀뜩 애착 인형
평생 함께 하고 싶은 사람에게 선물하세요.
낮에도, 밤에도 24시간 함께하는 듯한 따뜻한 존재감을 느껴보세요.
사랑하는 사람에게 이 인형을 선물하면, 두 사람의 사랑은 영원히 이어질 거예요.
그는 인형을 제이의 품에 거칠게 안겼다.
제이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품에 안긴 인형의 부드러움과 대비되는 그의 모습은 너무나 차갑고 날카로웠다.
그녀는 벽에 기대어 서 있었지만 다리가 후들거려 주저앉을 것만 같았다. 그녀의 입술 아래로 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소리를 내면 그가 더 폭력적으로 변할까 두려워, 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흐느낌을 삼켰다.
그의 목소리는 다시금 뱀처럼 그녀를 옥죄었다.
“나라고 생각하고 밤마다 껴안고 자. 하루 종일 내 생각만 해. 나만 보라고, 나만.”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그녀는 숨이 턱 막히는 공포와 함께 눈물이 흘렀다. 손에 꼭 쥔 인형의 부드러운 감촉은 그저 빈 껍데기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녀를 쳐다보았지만, 그 속엔 소름끼칠 정도로 비틀린 집착이 가득 차 있었다.
밖에서 지켜보던 사람들이 여전히 핸드폰을 든 채 움직이는 걸 눈치챈 그는 인형을 제이의 팔에 꼭 쥐어 주며 속삭였다. “웃어. 사람들이 보고 있잖아.”
제이는 떨리는 손으로 인형을 끌어안고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게 안엔 조용한 음악이 흘렀지만, 그녀의 귓가에는 그 악마의 속삭임만이 울렸다.
“넌 내 거야. 죽을 때까지.”
직접 보지 않았어도, 제이가 벗어나려 했던 그 절박한 순간들이 피부로 느껴졌다.
창 밖에서 들리는 남자의 목소리가 그녀의 과거로 잠시 들어갔던 나를 현재로 꺼냈다.
“지연아, 지연아! 여기 있어?”
아직도 긴장된 상태로 제이의 손은 덜덜 떨리고 있었다. 나는 그녀의 손이 떨리는 모습을 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럼... 저 남자가 설마...”
제이는 잠시 눈을 감고, 가슴에 손을 얹었다. 불규칙한 호흡을 가다듬으려는 듯 깊게 숨을 들이켰다. 우리는 숨죽여 그 모습을 지켜봤다. 시간이 멈춘 듯한 그 순간, 제이가 눈을 떴다. 그리고 떨어진 인형을 천천히 책상 위에 올리며 말했다.
“원래 제 이름이 지연이고, 또 목소리가 조금 비슷 하지만 다행히 그 사람은 아니에요. PTSD가 있어요. 그 사람이랑 비슷한 나이 또래에 남자만 보여도 움찔움찔해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는 사람이 심각한 사건을 경험한 후 그 사건에 공포감을 느끼고 사건 후에도 계속적인 재경험을 통해 고통을 느끼며 그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에너지를 소비하게 되는 질환으로 정의된다. 사장, 제이, 여운 그리고 나. 모양새는 다르지만 우리 가게에서 일하는 모든 직원이 가지고 있는 고통이다.
“휴... 다행이네요.” 여운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사장은 여전히 걱정스런 표정이었다.
나는 궁금했다. 폭주기관차 같은 싸이코패스를 어떻게 감옥에 집어 넣을 수 있었는지.
제이가 말을 이어갔다. 취업 준비도 다 그만두고, 그 놈을 피해 은둔 생활을 시작했다고 했다. 생수를 사러 밖에 나가는 것도 두려워, 수돗물로 겨우 목을 축이며 지냈다. 끼니는 배달로 주문한 식재료로 해결했지만, 문을 열어야 하는 순간조차 위협으로 느껴졌다. 한두 달 치의 식량을 한꺼번에 대량으로 주문해 가능한 한 외부와의 접촉을 줄였다.
주문한 물건을 받을 때마다 그녀는 늘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다. 인터폰으로 복도를 확인하는 것은 필수였고, 화면을 몇 번이고 재확인한 뒤에야 조심스레 문을 열곤 했다. 그날도 제이는 역시나 인터폰 화면을 주시하며 복도를 확인했다. 아무도 없는 걸 확신하고 몇 초를 더 기다린 뒤, 용기를 내어 문을 살짝 열었다.
순간, 문 뒤에 숨어있던 거대한 그림자가 제이를 덮쳤다. 몇 날 며칠을 인터폰이 보이지 않는 문 뒤에 숨어 기회를 노린 그놈이었다. 제이는 밀려 넘어지며 집 안으로 나뒹굴었고, 문이 쾅 닫히는 소리가 고요한 집 안에 메아리쳤다.
“네가 이렇게 숨는다고 내가 포기할 것 같았어?”그의 목소리는 섬뜩하게 낮았고, 제이를 내려다보는 눈빛엔 광기가 서려 있었다. 제이는 두려움에 떨며 뒷걸음질쳤지만, 그는 벌써 문을 잠그고 있었다.
“다시 말해봐. 헤어지자고?”
숨이 막히는 듯한 공포와 긴장감 속에서, 제이는 본능적으로 가장 가까운 물건을 손에 쥐고 그를 저지하려 애썼다. 하지만 그놈은 잔인한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마치 사냥감을 조여 오는 포식자처럼.
그 놈은 제이가 ‘헤어지자’는 말을 하고나서야 주먹질을 멈췄다. 바닥에 쓰러지듯 누워있는 그녀의 갈비뼈는 부러져 있었다.
놈은 소름돕게도 평상시엔 멀쩡했다. 아무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정한 남자친구처럼 굴었다. 그러다 제이가 다시 취직준비를 하려 전화를 안 받거나, 학원에 간다고 하면, 반복적으로 폭력을 행사했다. 혼자 죽지 않고 남의 인생까지 망쳐서 함께 죽이려는 물귀신이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여자친구의 인생을.
세 달 뒤에는 몰래 면접을 보고 돌아와 전화기를 꺼두고 자고 있던 제이의 얼굴을 주먹으로 가격해 안와내벽이 부서졌다. 그녀는 수술을 하고 몇 달을 병원에서 지내야했다.
다행히 아나운서 준비할 때 접했던 수 많은 사례들 덕분에 제이가 모아둔 증거 영상과 사진은 그 놈을 물에서 꺼내 감옥으로 쳐 넣을 수 있었다.
끝까지 버러지만도 못한 그 놈은 1심에서 받은 형량을 인정하지 않고 재항고했고, 2심에선 두 배, 최종 대법원 판결에선 그 형량이 세 배로 늘었다.
그 놈이 세상과 단절되고 나서야, 제이는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애석하게도 그녀가 나올 수 있었던 것과 원래의 삶으로 돌아가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데이트 폭력으로 입은 상처는 몸과 마음에 깊게 새겨져 있었고, 그 트라우마는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제이는 점차적으로 조금씩 자격증 공부를 다시 시작하고, 학원도 다니며 일상에 조금씩 회복을 위해 노력했다.
그런 가운데, 제이는 가끔 냥냥쭙쭙 스튜디오에 와서 영상을 만들고, 목소리를 녹음하는 일을 하곤 했다. 그 일은 그녀에게 작은 기쁨과 행복을 주었다.
“그 사람이 사준 인형은 당장 내다 버렸지만, 그 흔적이 남아서인지 침대에 눕기만 하면 잠을 못 잤어요. 어쩌다 선잠에 들어도 가위에 눌리기 일쑤였죠. 거의 몇 달을 못 잤을 즈음, 불면증에 ASMR을 들으면 잠이 온다고 하길래 선물 포장 소리를 들어봤어요. 신기하게도 그날은 아침까지 한 번도 안 깨고 잤어요. 그 이후로도 도움이 되었고요.”
제이는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
“취직을 할 수 있을지,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할 수 있을 때까지 이 일을 하고 싶어요. 영상이 누군가의 긴 밤을 끝낼 수 있도록 위로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그녀는 다시 스튜디오로 들어가 마이크 세팅을 시작했다. 스튜디오의 따뜻한 조명 속에서, 그녀의 얼굴에 조금씩 살아나는 평온함이 있었다. 그동안의 고통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지만, 제이는 이제 그 고통을 조금씩 받아들이며, 자신만의 속도로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너무 작아서, 너무 하찮아서 의미 없다고 느껴질 때가 있죠. 하지만 작은 것들도 누군가에겐 커다란 온기가 될 수 있어요. 이 포장도 마찬가지예요. 얇은 종이에 싸여도, 작은 스티커 하나로 밀봉돼도, 안에 담긴 마음만큼은 결코 작지 않아요.”
그녀는 손끝으로 살짝 밀봉 스티커를 쓰다듬었다.
“하루 종일 아무도 날 찾지 않을 때, 내 목소리를 들어주는 사람이 한 명도 없을 때, 나조차 나를 소중하게 여기기 어려울 때… 그냥 이걸 떠올려 주세요. 누군가는 당신을 위해 정성껏 무언가를 포장하고, 보내고, 기다리고 있다는 걸요.”
잠시 멈췄다가, 그녀는 마지막으로 조용히 덧붙였다.
“당신은 혼자가 아니에요.”
퇴근을 하고 나서도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그놈의 꿈이란 건, 환상이란 건 없어도 안 되고, 있어도 안 되는 존재인가. 사람을 너무 힘들게 하면서 동시에 살아갈 힘을 주기도 하고. 꿈과 현실에 적정선, 적당하게. 알아서 잘 깔끔하고 딱 센스있게. 그게 도대체 얼마만큼인데?
뭐, 무게를 달아? 자로 재? 어떻게 알아.
그 적당을 몰라서, 아니 알아도 도무지 타협이 안돼서 아픈 건 또 어떡하라고.
열어서 연고라도 발라? 밴드라도 붙여?
아무리 생각을 해도 무한대 기호 위를 걷는 것처럼 답이 나오질 않는다.
너무 많은 시도와 너무 많은 실패.
기회는 적은데 인재는 많은 나라.
치열한 경쟁을 생활화시키고, 소수 합격자를 제외한 다수 탈락자에게 루저라는 이름표가 붙는 나라.
열심히 했지만 나도 열심히 했는데 정말 노력했는데 오랜 시간 기다렸는데 한 번쯤은 기회가 와야 하는 게 아닐까.
실패의 상처가 생긴 자리엔 연고를 붙일 새도 없이 또 다른 상처가 생겨 덧난다. 눈에 보이지 않을뿐 반복되는 좌절로 살갗이 너덜너덜하다.
자기일치? 자기 수용? 그렇게 어려운 심리학 용어 다 모르겠고.
성공하고 싶은 마음이, 잘되고 싶은 마음이 포기가 안 된다.
또 다시 통증을 만들어낸다. 아프다.
빨리 가기 위해 들어선 길이 성공으로 향하는 지름길이 아니었나 보다.
돌고 돌아 한참 잘못된 길로 걸어온 게 아닐까.
생각에 잠겨 발걸음을 옮기던 중, 눈앞에 낯선 길이 펼쳐졌다. 돌고 돌아 한참 잘못된 길로 걸어온 것이었다.
횡단보도에 서서 신호를 기다린다.
여름이라 낮이 길어 해가 아직도 쨍쨍이다. 옆동네 구청에서 만들어놓은 그늘막 덕분에 신호를 기다리는 시간이 괴롭지 않았다.
우리동네에는 이런거 없던데...
그러다 순식간에 해가 구름 뒤로 숨어버리더니, 매서운 바람이 쌩쌩 불었다.
그때였다. 자동 개폐기가 작동하며 그늘막이 스르륵 접혔다.
“뭐야? 어떻게 된거야?”
호기심에 그늘막 뒤로 돌아가 보니 이렇게 적혀 있었다.
이 제품은 온도와 바람에 반응하여 안전하게 자동 개·폐되는 스마트 그늘막입니다.
일출 후 기온이 15도 이상 되면 자동으로 펼쳐지며, 풍속이 초당 7m 이상 2초간 지속되면 자동으로 접힙니다. 일몰 후에는 그늘막이 접히며, LED 조명이 점등됩니다.
나는 문득, 이 똑똑한 그늘막이 내 마음에도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타 죽을 것 같은 햇빛이 내려쬐면 알아서 그늘을 만들어주고, 마음에 폭풍 같은 바람이 불면 자동으로 접혀 보호해 주고, 어두워지면 스스로 불까지 밝혀줄 테니까.
그렇게 된다면, 아직도 포기가 안 되는 그 환상도, 그게 만들어낸 통증도, 잠시 쉬어갈 곳이 생길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