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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환상 통증 07화

6. 화이트 스노우볼

by 최소망

[화이트 스노우볼]


몸은 멀쩡했다. 너무 멀쩡해서 어이가 없을 정도였다.

입 안은 텁텁하고, 속이 살짝 메스꺼웠지만, 그 외엔 이상 없었다.

정말 어제, 약을 먹긴 했던 걸까?

기억이 정확하지 않았다.

분명히 병 안에 남아 있던 약들을 손바닥에 쏟았고, 하나하나 집어 삼켰다.

그랬던 것 같은데.

중간에 멈췄던 건지, 아니면 원래 치사량까지도 아니었던 건지...

아니면, 무의식적으로 스스로를 살리려고 했던 건지.

‘살고 싶었던 걸까?’

어쩌면 난 한 번도 죽고 싶은적이 없었겠다. 그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바뀐 신호에 버스가 횡단보도 앞에 멈췄다.

사람들이 저마다에 모습으로 하루를 시작하고 있었다.

살아 있었다.

나도 살아있다.

분명히 살아서 걷고 있었다.

그리고 여느때와 다름없이, 아무일 없었다는 듯이 이 길을 걷고 있었다.

신호가 파란불로 바뀐다.

마침 맞은편에서 걸어오던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가 싱긋 웃었다.

어쩜 눈이 저렇게 맑고 예쁠까.

발 밑에 놓인 유모차가 뒤늦게 시선을 잡아끌었다. 안에 앉은 아이가 이쪽을 향해 빤히 고개를 들고 있었다. 크고 동그란 눈이 꼬마 특유의 호기심으로 반짝였다. '왜 이렇게 나를 뚫어져라 볼까?' 속으로 중얼거리며 한쪽 손을 주머니에 넣었다. 혹시 내 얼굴이... 동그래서 그런가? 만화책에서 튀어나온 캐릭터라고 생각하는 걸지도 모른다.

왠지 오늘 출근길은 뭔가 다르게 느껴진다.

뭔가 재밌어. 마치 새로운 세계를 발견한 느낌이야.

날씨 때문일까? 아니면 사람들의 미소 때문일까?

나에게 일어난 변화가 뭔지 전혀 눈치 채지도 못한채 그냥 기분이 좋았다.

이상하게도.

출근해서 제일 먼저 한 일은 한껏 먼지가 쌓인 선반들 속에서 눈꽃처럼 반짝거리는 스노우볼을 꺼내는 것이었다.

후우―. 콜록콜록.

호흡으로 일으킨 먼지가 기관지를 간지를걸 알면서도 꼭 하게되는 행동을 한다.

선반 한편에 쌓인 재고는 1년 내내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겠지. 겨울이 오고 나서야,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타고 하나둘 팔리기 시작했다. 주문이 계속 늘어날 것을 대비해 커다란 박스 하나를 통째로 꺼내 작업대로 가져온다. 보드라운 천과 붓으로 살살 먼지를 걷어내고 요리조리 돌리며 하얗고 작은 세상 속을 살펴본다. 고요한 눈이 떨어지고, 안에서 조용히 춤추는 조그만 고양이들의 무도회. 마치 다른 세계에 있는 듯했다.

스노우볼 속에서는 고요한 눈이 내리고 있었지만, 가게 안 공기는 무겁고 어색했다. 선반 위에 오래도록 남아 있던 스노우볼들이 겨울을 맞아 드디어 빛을 보기 시작했지만, 정작 사장과 나의 마음은 여전히 암흑속에 묶여 있는 듯했다.

반대편 작업대에는 사장이 서 있었다. 손가락 끝으로 영수증 가장자리를 접었다 펴는 움직임만이 조용히 이어졌다. 작업대 위에는 충전 케이블에 간신히 연결된 사장의 핸드폰이 있었다. 화면이 계속 깜박이며 울리고 있었다. 협박 글이 게시판에 올라온 이후로 사장의 핸드폰은 단 한순간도 조용할 틈이 없었다.

그 사건 이후, 우리는 꼭 필요한 이야기가 아니면 전혀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나뿐만 아니라 모든 직원들이 홈페이지 관리 권한을 잃었고, 이제 모든 결정은 사장 혼자의 권한으로 전환됐다. 직원들에게는 그저 열람만 가능한 게시판에, 협박성 글들이 여전히 꾸준히 올라오고 있었다. 경찰에 신고하지 않고, 도대체 왜 참는 걸까? 연말연시를 맞아 마음이 추운 이웃에게 따뜻한 온기를 전하는 중이라고 생각하는 건가? 아니면 그저 무기력해서일까? 아무튼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 사건 이후, 퇴근 후 탕비실에 머무는 일도 자연스럽게 하지 않게 됐다. 사장이 나가라고 한 적은 없지만, 내가 불편해서 그 공간에 있을 수가 없었다. 대신 자주 가던 공원을 걸으며 한 시간 정도 음악을 들었다. 공원의 반대쪽 출구로 나가면 스터디카페가 하나 있었다. 3시간에 6,000원이라는 꽤 괜찮은 가격. 거기서 책을 읽는 것이 요즘 나의 새로운 루틴이 되어가고 있다.

어제는 처음으로 구직 사이트에도 들어가 봤다. 더는 이렇게 불편하게 일할 순 없으니까. 생각해 보면 3년 동안 새로운 일을 찾겠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던 내가, 드디어 이런 클릭을 할 용기가 생긴 건 조금은 놀라웠다. 물론 여전히 사장이 이해되지 않고 미운 마음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고마운 마음도 들었다.

냥냥쭙쭙이 긴 시간 굳어있던 용기를 녹여준 용매제가 되어준격이니.

처음으로 무겁게 닫혀 있던 마음에 작은 틈이 생겼다. 여전히 나와 사장 사이의 공기는 어색하고 차갑지만, 나는 이 어색함을 견디는 대신 어딘가 새로운 곳으로 발을 내딛기 시작한 셈이었다. 앞으로 더 나은 무언가가 나를 기다릴 거라는 기대는 아직 들지 않았지만, 적어도 지금 내가 하는 한 걸음 한 걸음은 더 이상 멈춰 있지 않았다.

다시 한번 스노우볼을 세차게 흔들어 음악이 꺼진 무도회에 열기를 불어 넣는다.

왠지 모르게 흩날리는 눈송이를 다시 보니, 마음이 차갑게 식어가는 기분이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하얗고 깨끗한 눈처럼 살고 싶어도 검은 패딩을 입은 사람들이 개떼처럼 몰려와 흙투성이로 만들어 놓거든. 더러워진 잔해와 축축하고 미끌거리는 이물감만 내 안에 남을뿐이야.

눈에게 물어보자.

“그만해. 어차피 저 인간들한테 밟힐건데 뭐하러 새하얀 마음을 쌓일 때까지 뿌려? 그것도 아주 조금씩 정성을 다해서?”

투명한 유리 구슬 안에서 내리는 눈이 이렇게 대답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아주 잠깐이라도 착해지라고.”

“뭐?”

“미끄러울까봐 천천히 가니까 누굴 앞지르겠다 서두르지 않을거고, 누군가 만들어놓은 누사람이나 눈오리를 보면서 잠시나마 멈춰서 동심으로 돌아갈 수 있을테니까.”

“그딴거 다 무시하고 원래대로 행동하는 사람도 있을 거 아냐.”

“그럼 미끄러져서 창피를 당하겠지.”

“그래서 계속 하겠다고? 그 잠깐을 위해서?”

“행복은 원래 잠깐이야.”

어색한 공기가 감도는 가운데, 나는 혼자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있었다. 오늘은 이상하게 시간이 더디게 흘렀다. 손님이 뜸한 틈을 타 선반을 정리하고 있는데,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니, 환한 얼굴로 서대표님이 들어오는 게 보였다.

그는 숨마루라는 쉐어하우스를 운영하고 있다. 쉐어하우스라고 하기엔 조금 특별한 공간인데, 운둔 생활을 끝내고 세상 밖으로 나온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며 자립을 준비하는 곳이다. 그러고보니 낯선 남자가 그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사장님, 주문 많아 바쁘시죠? 얼굴이 반쪽이 되셨네요.” 서대표님이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사장은 겸역쩍은 미소를 지으며 얼굴 한쪽을 손으로 가릴뿐이었다.

“같이 오신 분은…?” 사장님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 인사하시죠.” 서대표님이 뒤에 서 있던 남자를 앞으로 살짝 밀며 소개했다.

그가 한 발 앞으로 나왔다.

“안녕하세요. 김석찬이라고 합니다,” 낮은 목소리로 인사하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석찬은 보기에도 긴장한 게 느껴졌다. 직접 자른 것 같은 삐죽삐죽한 머리, 오래된 두꺼운 안경, 체크무늬 셔츠에 헐렁한 바지를 입고 있었다. 스타일이 어딘가 어긋난 것 같지만, 그보다 더 눈길을 끈 건 그의 얼굴이었다. 나이는 분명 40대라고 들었는데, 동안이라 믿기 어려웠다. 무엇보다 그의 눈빛이 참 맑고 선했다.

나는 그가 얼마나 오랜 시간을 방 안에서 보내왔을지, 그리고 세상 밖으로 나오는 데 얼마나 큰 용기가 필요했을지를 생각하니 마음이 묘하게 짠해졌다.

“무려 12년 동안 집 밖으로 안 나왔대요,” 서대표님이 설명을 덧붙였다. “그래도 요즘은 굉장히 잘 적응하고 있어서 오늘은 직접 소개도 시켜드리고 싶어서요.”

나는 그 말을 듣고 조심스럽게 미소 지으며 석찬을 바라봤다. 그는 여전히 어색한 듯 고개를 숙인 채 손가락을 꼼지락거리고 있었다. 어쩌면 나도 처음 이 가게에 왔을 때 이런 모습이었을지도 모른다.

서대표님은 밝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이어갔다. “여긴 사장님 가게고, 앞으로 석찬님이 배우면서 일할 곳이에요. 가게 분위기 정말 좋죠? 어때요?”

“아, 네… 정말 좋아 보입니다,” 그가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는 게 눈에 띄었다. 낯선 공간에 대한 긴장감, 새로운 사람들과의 만남. 모든 것이 그에게는 큰 부담으로 다가올 것이다. 내가 그랬으니까.

사장님과 서재현 대표님이 대화를 나누고 있는 동안, 나는 석찬을 조심스레 살폈다. 첫인상은 어딘가 쑥스러워 보였다. 안경 너머로 보이는 눈빛은 맑고 선했지만, 긴장으로 인해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서 아침에 횡단보도에서 마주쳤던 누군가가 떠올랐다. 뭔가 익숙한 느낌이었지만, 기억이 또렷하지 않았다.

사장 옆에서 그의 어깨가 살짝 움찔거리는 게 느껴졌다. 대표님 역시 살짝 동요한 듯했지만, 곧 평정심을 찾고는 나를 향해 말했다.

“여기 내부를 석찬님에게 한번 안내해 주시겠어요?”

나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석찬을 가게 내부로 안내했다.

“물건을 정리하거나 분류할 때 주로 여기를 사용해요. 모든 재고는 여기에 있어요.”

그 외에도 창문과 스튜디오의 용도 등 가게 내부의 동선을 하나하나 설명해나갔다.

초반에 석찬은 큰 목소리로 “네, 알겠습니다,” “좋네요,” 하고 대답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의 말수가 점점 줄어들기 시작했다.

10분쯤 지났을 때, 석찬의 얼굴에 이상한 기색이 감돌았다. 눈동자는 점점 흐릿해지고, 숨소리가 미묘하게 거칠어졌다. 나는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나도 그랬으니까. 새로운 환경이 주는 압박감과 불편함, 그리고 낯선 사람들 사이에서 느끼는 긴장감이 그를 점점 옥죄고 있었다.

“괜찮으세요?”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는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괜찮습니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는 힘이 없었고, 표정에는 불안이 가득했다.

‘괜찮긴. 참는 거겠지.’ 나는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첫날부터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아서 애써 버티는 모습이었다.

나는 한 걸음 더 다가가, 더 부드럽게 말했다.

“정말 괜찮으세요? 첫날인데 너무 무리하지 않아도 돼요. 잠깐 쉬셔도 괜찮습니다.”

“아니요… 괜찮아요,” 그가 고개를 저었다. “할 수 있습니다.”

시간은 11분, 그의 얼굴은 점점 창백해졌다.

12분, 입술이 파래지고 뭔가 말을 하려다 멈추는 모습이 보였다.

13분, 몸이 미세하게 흔들리고 눈은 초점을 잃어갔다.

14분, 숨소리가 거칠어지고 과호흡 증상이 나타났다.

시계바늘은 15분을 향해 빠르게 달리고 있었다.

나는 시계와 선반을 번갈아보며 말했다.

“요즘엔 스노우볼이 제일 잘 나가요.”

작고 투명한 유리 구 속에 펼쳐진 아기자기한 세상들. 눈송이가 흩날리는 풍경, 반짝이는 나무들, 작고 귀여운 집들. 나는 하나를 집어 들며 설명을 이어갔다.

“이건 겨울 느낌의 디자인이고요, 여기 보시면 바닥을 돌리면 음악도 나와요. 이걸 흔들면 눈이 마치 진짜처럼 내리죠. 신기하지 않으세요?”

스노우볼 속 세상을 손으로 빙그르르 돌리며 설명하던 내 시선이 그에게 닿았을 때, 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정말... 괜찮으세요? 너무 힘드시면...” 나는 얼른 손에 들고 있던 스노우볼을 내려놓았다.

“아, 네. 괜찮습니다.” 그는 억지로 미소를 지었지만, 그 미소가 어색했다. 그의 손은 주먹을 쥔 채 떨리고 있었고, 숨소리가 점점 불규칙해지고 있었다.

“이건 제가...좀.” 그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나는 더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이거 보기 불편하세요?”

“아니요, 그냥... 너무...” 말을 다 끝내지 못한 석찬이 눈을 꼭 감더니, 갑자기 비틀거리기 시작했다.

“석찬님!” 나는 재빨리 그의 팔을 붙잡았다. 하지만 그는 이미 균형을 잃고 있었다. 그의 다리가 풀리며 바닥으로 주저앉았다. 숨이 거칠어지고, 손으로 가슴을 움켜쥐며 헐떡였다.

나는 당황스러운 마음을 억누르며 주변을 둘러봤다.

서대표가 깜짝 놀라며 달려왔다.

“괜찮으세요, 석찬님? 천천히 숨 쉬세요. 괜찮아요. 괜찮으니까...”

누군가의 첫걸음이 이렇게 무너지는 걸 지켜본다는 것은 결코 가벼운 일이 아니었다.

한 시간이 흘렀지만, 석찬은 아직 수면실에 있었다.

“아무래도 병원에 가는게 어떨까요??”

사장이 조심스럽게 묻자, 서대표가 고개를 저었다.

“석찬 씨는... 좀 복잡해요. 잘 아시겠지만 대인기피에 낯선 공간을 극도로 불안해하죠. 지금 정신을 잃은것도 그때문이고요. 더구나 폐쇄공포증도 약간 있어서 갑자기 응급실 같은 곳에 가면, 오히려 더 큰 혼란이 올 수도 있어요.”

“폐쇄 공포증요?” 사장님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12년 동안 은둔 생활을 했다고 들었는데, 폐쇄증후군이 아닌 공포증이라니, 왠지 어색하게 느껴졌다.

서대표는 한숨을 쉬며 설명을 이어갔다.

“최근에 생긴 공포증이에요. 자립심이 어느 정도 생기고, 세상에 적응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여전히 방 안에 갇힐까 봐 두려워했나 봐요. 그게 다시 상처로 이어질까 봐 두려운 거죠. 그게 실패라는 이름의 그림자처럼, 계속 따라다니는 거예요.”

석찬의 상황을 이해하려 하자, 나는 잠시 고개를 들고 가게 안을 둘러봤다. 포근하게 느껴졌던 가게가 갑자기 답답하게 다가왔다. 냥냥쭙쭙이라는 귀여운 고양이 소품들, 그리고 익숙한 가게의 분위기가 이제는 내게도 좁고, 고립된 공간처럼 느껴졌다.

‘여운이 말했던 게 그걸까? 장소만 옮긴 히키코모리로 남고 싶지 않다고 했던 그 말…’

나는 마음 한켠에서 그것이 점점 더 현실이 되어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내게도 그 시간이 다가왔나 보다. 이곳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마음이 점점 더 커지고 있었다. 석찬처럼, 나도 한때는 방 안에 갇혀 있었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 좁은 공간이 아닌, 조금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그게 정말 가능할까? 석찬처럼, 나도 또 다른 실패의 그림자가 내게 다가오지 않을까 두려웠다. 그럼에도, 내가 할 수 있다면, 그 실패의 그림자와 맞서 싸워야 할 것이다.

“죄송합니다... 저 진짜 죄송해요...”

사장은 찻잔을 들고 있다가 고개를 들었다.

언제 나왔는지도 모르게, 석찬이 수면실 문 앞에 서 있었다.

고개는 숙인 채였고, 두 손은 불안하게 맞잡은 채 떨리고 있었다.

“이렇게까지 폐 끼칠 줄은 몰랐어요. 밖에 나오지 말았어야 했는데...”

사장은 찻잔을 내려놓고는 조용히 말했다.

“괜찮아요, 석찬 씨.”

사장이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 “그럴 수 있어요.”

서대표도 고개를 끄덕이며 잔잔히 미소 지었다.

“용기내어 나와준 것만으로도 고마워요. 우리, 그냥 같이 차 한 잔 마시려고요.

편하게 앉으세요.”

석찬은 조심스럽게 걸어와 세 사람 사이에 놓인 탕비실 의자에 앉았다.

김이 희미하게 오르는 찻잔들 사이로 짧은 침묵이 흘렀다.

잠시 후, 서대표가 사장을 향해 웃으며 말했다.

“석찬님이 여기서 일하고 싶다고 저한테 얼마나 조르던지요.”

사장의 얼굴에 흥미롭다 꽃이 피었다.

“왜요?”

그 질문에 석찬은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입술을 달싹이던 그는 고개를 살짝 떨군 채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손끝이 안쪽을 더듬다가 멈칫하더니, 천천히 무엇인가를 꺼냈다.

작게 접힌 종이 한 장.

그는 그걸 한 손에 쥐고 망설였다.

크게 들숨을 한번 삼킨 뒤에야, 조심스럽게 사장에게 내밀었다.

사장은 종이를 받아들고 펼쳤다.

그리고, 숨이 살짝 멎은 듯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이건... 내 글씨인데...”

그저 따뜻한 마음을 상자에 담을 수 없어 대신 담아 보냈던 편지.

그 한 장이 누군가에겐 이곳까지 오게 한 이유였다.

사장의 손끝에 잡힌 낡은 편지가 조용히 흔들렸다.

그 흔들림을 바라보던 석찬의 눈동자도, 천천히 과거로 기울어졌다.

삶은 더 이상 앞을 향해 나아가지 않았다.

하루는 밤이 되고, 밤은 다시 낮이 되었지만 그는 침대에서 내려오지 않았다.

기지개조차 없이 스마트폰을 든다.

화면 속 세상은 찬란했다.

서른에 자가를 마련한 동창, 세 아이를 안고 웃는 부부, 퇴사 후 창업에 성공했다는 선배, ‘오전 5시 기상! 루틴 공유합니다!’라는 짧은 영상은 땀에 젖은 웃음으로 마무리된다.

석찬은 아무 말 없이 화면을 내렸다.

아무리 내려도 끝이 없는 타인의 성공과 행복.

그 속에 석찬이 들어갈 자리는 없었다.

28살 사회 초년생이었던 석찬.

비흡연자였던 그를 제외하고, 팀장은 팀원들은 모두 옥상으로 끌고 올라가 담배 태우길 즐겨했다. 중요한 업무 이야기는 모두 그곳에서 이루어졌다.

그 자리에 있지도 않았는데, 듣지 못한 걸 왜 못 챙기냐며 몰아세웠다. 마치 옥상에 없던 것이, 담배를 피우지 않는 것이 석찬의 죄라고 말하는 것처럼.

“저번에 똑바로 안 듣고 뭐했어?”

한숨과 비웃음이 쏟아졌고, 이어진 건 욕설이었다.

“씨발, 이것도 못 알아들으면 어쩌자는거야.”

팀장은 동기들보다 한참 늦게 받는 석찬의 대리 승진도 달갑지 않게 여겼다.

성과 평가 시즌이면, 팀장은 항상 석찬의 점수를 낮게 매겼다.

“네 그 태도가 맘에 안들어.”

팀장의 태도는 곧 동료들의 태도로 이어졌다.

누구도 석찬에게 인사를 먼저 건네지 않았고, 질문을 해도 대답은 형식적이었다.

회의에서 그의 아이디어는 곧잘 묵살됐고, 잔심부름과 보고서 정리는 자연스레 그의 몫이 되었다.

그냥, 사람 하나를 조용히 내보내고 싶었던 말과 태도.

그때부터였다.

세상은 자신을 원하지 않는다고 믿기 시작한 건.

그 후로 그는 하나씩, 사회의 문을 닫아걸었다.

사람은 무서웠고, 세상은 고통이었다.

그는 그렇게 스스로 ‘방’이라는 섬에 걸어 들어갔다.

처음에는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사람들의 이야기라도 읽으며 바깥을 엿보려 했다.

하지만 그조차 오래가지 않았다.

타인의 일상은 점점 비교와 자책의 기준이 되었고,

누군가 ‘나이 먹고 뭐하냐’ 는 댓글을 남길 때마다 가슴은 철썩하고 굳어졌다.

‘맞네. 나 뭐하냐 지금.’

자기혐오는 감정이라기보다, 몸에 붙은 그림자 같았다.

하루하루 그림자는 짙어졌고.

그는 침대에 누워, 빛이 없는 천장을 바라보다 잠드는 법을 익혔다.

그런 그의 유일한 안식처는 ‘소리’였다.

무언가가 포장되는 소리, 테이프가 착 감기고 박스 안에 충전재가 부풀어 오르는 소리.

그건 사람의 말보다 훨씬 부드럽고, 예측 가능하고, 공격하지 않는 음성이었다.

어느 날 우연히, ‘냥냥쭙쭙’이라는 이름의 포장 ASMR 영상을 보게 되었다.

손이 포장을 하고, 바스락거리는 소리로 가득한 영상, 거기에 아나운서 수준에 나래이션.

“누군가는 당신을 위해 정성껏 무언가를 포장하고, 보내고, 기다리고 있다는 걸요.

당신은 혼자가 아니에요.”

그날 이후, 석찬은 잠들기 전마다 그 영상을 들으며 눈을 감았다.

가끔은, 포장된 물건들이 실제로 존재하는지 궁금해졌다.

호기심은 수행을 파생시킨다.

첫 주문은 충동이었다.

어쩌면 무의식에 가까웠다.

누구에게 보이려는 것도 아니고, 무언가 필요했던 것도 아니었다.

모니터 속 손이 고른 물건 하나.

깔끔한 비닐봉지에 들어간 작은 메모지 세트.

너무 작고 쓸모없어 보였지만, 어떤 물건이든 정성스레 다뤄주는 그 손이 마음에 남았다.

결제를 마친 후에도 한참을 모니터를 바라봤다.

‘내가 뭘 한 거지?’

아무도 축하해주지 않았지만, 지난 십 년동안 했던 일 중 가장 능동적인 행동이었다.

며칠 후, 초인종 소리 없이 도착한 작은 박스.

현관에 초인종은 울리지 않았다.

누군가 다녀갔다는 흔적은, 조용히 놓여 있는 작은 박스 하나.

석찬은 문 앞에 서서 한참을 망설였다.

현관문을 여는 일이 이렇게까지 어려울 줄은 몰랐다.

몸이 아니라 마음이 문제였다.

문틈 사이로 바깥 공기가 스며들 것만 같아, 손이 쉽게 움직이지 않았다.

‘아주 잠깐이면 돼... 물건만 가지고 들어오는거야.’

그렇게 수십 번 스스로를 설득하고 나서야,

덜컥.

문이 열렸다.

빛이 들어왔다.

희미하게나마 햇살이 바닥을 훑고 지나갔다.

눈이 시렸다.

이 공간 너머를 마주하는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그리고 그 빛 한가운데에, 작은 박스 하나가 놓여 있었다.

핑크색 박스. 네 귀퉁이엔 앙증맞은 고양이 발자국 무늬.

그 위엔 반듯하게 붙은 스티커— 냥냥쭙쭙 �

석찬은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머릿속이 하얘졌다.

내 나이 38살.

지난 10년간 햇빛도, 시선도 피하며 살아온 내 손에 들려 있는 건 분홍색과 귀여움이 한껏 뒤섞인 상자였다.

“...이건 좀...”

현관문을 급히 닫고, 괜히 커튼을 한 번 더 치고, 누가 본 것도 아닌데 두 뺨에 열이 올랐다. 재빨리 방으로 돌아와 문을 잠궜다.

컵라면 용기들이 층층이 쌓인 책상 한켠을 겨우 비우고, 그 위에 택배 상자를 조심스레 올려놓았다. 스티커를 한참 바라보다가 손끝으로 천천히 테이프를 떼어냈다.

상자를 열자마자 향긋한 종이 냄새와 함께 감각적으로 배치된 포장이 눈에 들어왔다.

무언가... '이상하게 정돈되어 있다'는 느낌.

오래 닫힌 창과 뒤엉킨 쓰레기들 사이, 그 물건들은 이 방에 어울리지 않는 단정함과 온기를 갖고 있었다.

그 낯설지만 묘한 안정감이, 며칠이고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식지 않는 여운이 두 번째, 세 번째, 그리고 네 번째 주문을 낳았다.

다만, 한 가지 이상했던 건 택배가 점점 멀리 떨어진 곳에 놓이기 시작한 것이었다.

처음엔 현관 앞, 그다음은 두 걸음, 또 그다음은 복도 중간, 그리고 복도 끝.

마치 누군가 일부러 그를 더 멀리 끌어내려는 것처럼.

다섯 번째 주문.

그날도 어김없이 택배는 문에서 꽤 떨어진 곳에 놓여 있었다. 이번엔 복도 구석, 가장 먼 벽 아래에.

“아 진짜! 왜 점점 멀어져...”

투덜거리며 문을 열었고, 슬리퍼가 질질 끌리는 소리를 내며 바닥을 훑었다.

복도 끝에 다다를 즈음, 석찬은 문득 자신이 지금 바깥 공기를 아주 자연스럽게 들이마시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바깥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생각보다 무겁지 않다는 것도.

상자를 열자, 익숙한 종이 냄새와 정성스럽게 구성된 소품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 낯선 무언가가 눈에 들어왔다.

작고 정갈한, 손글씨가 담긴 한 장의 편지.

냥냥쭙쭙을 사랑해주시는 고객님께,

안녕하세요.

다섯 번째 주문까지 저희를 찾아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포장을 마친 뒤, 문득 손이 멈췄습니다.

당신께 무언가를 더 전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작은 상자 안에 담긴 건 소품 몇 개뿐이지만, 그 안에 담긴 시간과 마음까지 전해지면 좋겠어요.

하루하루가 마치 같은 장면의 반복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 안에서 '뭔가를 선택한다'는 게 생각보다 큰 용기라는 걸,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이 조그마한 상자를 들어 올려주셔서,

택배를 향해 몇 걸음을 걸어주셔서,

그리고 저희를 다시 찾아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살면서, ‘누군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고 느낄 수 있는 순간은 드물지만

저는 고객님이 이 편지를 읽는 지금,

그 드문 순간의 한가운데에 계시길 바라는 마음으로 이 글을 씁니다.

늘 같은 공간, 같은 하루에도 따뜻한 변화가 일어나길.

언제나 당신 편에서 기도하고 있겠습니다.

소박한 진심을 담아,

고양이 소품 가게 냥냥쭙쭙 드림.

그는 몇 초간, 그 글귀만을 바라보았다.

처음엔 어색했다. 당황스러웠다.

'이런 걸 왜 넣지?'

하지만 편지를 내려놓기가 쉽지 않았다.

누군가가 나에게 말을 건 느낌이었다.

한 글자 한 글자 꾹꾹 눌러 쓴 손글씨.

인간적이었다.

컴퓨터처럼 획이 일정하지 않아서, 정말 누군가가 직접 나를 떠올리며 쓴 것 같아서.

편지를 들고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었다.

몇 번이고 다시 읽고나서야 비로소 상자 안을 살펴볼 마음이 들었다.

포장재를 치우던 손 끝에, 무언가 얇은 종이가 스치듯 걸려왔다.

� 쉐어하우스 ‘숨마루’

숨마루는 아무것도 강요하지 않아요.

문을 닫아도, 대답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그저 함께 숨 쉬며 살아가는 것부터 시작합니다.

누워 있어도, 게임만 해도, 산책만 해도 괜찮아요.

먹고 자고 웃고, 그러다 보면 어느새 조금 편안해져요.

혼자지만 혼자가 아닌 공간.

누군가 옆방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숨이 놓일 수 있다면—

운영: 은둔 생활 경력 10년, 서○○ 대표

※ ‘냥냥쭙쭙’ 구매 고객 대상 입주 상담 무료

※ 비대면 상담 신청 가능

� contact@soommaru.kr

� www.soommaru.kr

� 고양이 소품 온라인 가게 ‘냥냥쭙쭙’

출근? 하고 싶을 때!

일? 15분 단위면 충분해요.

대면? 안 해요. 절대.

� 포장, 업로드, 사진 찍기

— 조용히 혼자 할 수 있는 일들만 모았어요.

직접 오는 손님?

작은 창문 너머로 고양이 장갑 낀 손으로 살짝 쓱.

말은 안 해도 괜찮아요.

고양이 좋아하시는 분 대환영

집사 사장님이 운영중

� nyang@nyangnyangmall.kr

� www.nyangnyangmall.kr

전자포트는 여전히 조용히 김을 내뿜고 있었고, 테이블 위엔 고양이 장갑 그림이 찍힌 광고 전단지가 한 장, 물기 어린 컵 아래 눌려 있었다.

석찬이 전단지가 잘 보이도록 컵을 옆으로 밀어냈다. 손끝이 살짝 떨리고 있었다.

“편지 밑에 이런게 있을줄은 몰랐거든요.”

작은 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처음엔 버리려 했어요. 괜히 기대했다가 또 실망할까봐.”

서대표와 선을이 숨을 죽인 채 그의 말을 들었다.

“그런데... 혹시, 혹시나 하는 마음이 들었어요. 세상이 나를 필요로 할 수도 있다는 그런... ‘여기 가보면 그런 세상을 다시 만나게 해주지 않을까. 제발 그랬으면 좋겠다.’ 그렇게요.”

그는 한순간 말을 멈췄다.

앞에 놓인 전단지를 바라보며, 조금은 멍하니.

그리고 이윽고, 조심스럽게 시선을 들어 사장을 바라보았다.

“... 그 편지요. 사장님이 쓰신 거죠?”

그는 작게 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그거, 저한텐 좀... 이상하게 남더라고요. 그 편지 읽고 나서부터였나봐요. ‘밖에 나가봐야겠다. 살아봐야겠다.’ 마음 먹은 게.”

맞은편에 앉아 있던 사장이 갑자기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아, 진짜...”

작게 떨리는 목소리.

눈물은 이미 손가락 사이로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석찬은 잠시 망설이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사장을 향해 깊게 고개를 숙였다.

“그러니까... 고맙습니다.”

그녀의 어깨가 조용히, 하지만 격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서대표가 조용히 물컵을 내밀었지만, 사장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괜찮아요. 그냥... 그냥 조금만... 잠깐만요...”

죄책감으로 짓눌렸던 마음의 울부짓음이 소리로 터져 나왔다.

석찬은 내일 뵙겠다는 짧은 인사를 남기고 먼저 나갔고, 서대표는 조용히 말을 건넸다.

“사장님... 잘 좀 부탁드려요.”

무슨 말을 더 하고 싶은데 삼키는 사람의 얼굴, 서대표의 표정이 그랬다.

걱정과 애틋함이 그대로 묻어나는 눈빛이었다.

마치 지금 당장이라도 다시 돌아가 그 사람 옆을 지켜주고 싶은데, 그럴 수 없다는 걸 너무 잘 아는 사람처럼.

선을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고, 서대표는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수면실 쪽을 돌아보더니, 조용히 발걸음을 옮겼다.

남겨진 건 미지근한 커피 향, 느슨한 정적, 그리고 사장과 나.

나는 수면실 문틈으로 조심스레 고개를 들이밀었다.

낮은 침대에 구겨지듯 누운 사장이 보였다.

탈진한 얼굴. 괴로운 표정.

그렇게까지 해야만 했을까 싶다가도, 아마 누가 말렸어도 그대로였겠지 싶었다.

사장은, 그 아이를 보며 어쩌면 자기 자신을 본 건지도 모른다.

한때 자신도 그랬으니까. 학교폭력, 고립, 그리고 끝내 닫아걸었던 문.

그 아이가 겪은 고통이, 너무나도 익숙했을 것이다.

그래서였을까. 말도 안 되는 생각인 줄 알면서도,

‘내가 먼저 사라졌더라면, 그 애는 남아있지 않았을까’

세상에 머물 수 있는 자리가 정해져 있는 거라면, 그 자리를 내가 대신 비워줬더라면—

그 애는 지금도 살아 있었을까.

말도 안 되는 상상인 줄 알면서도, 그런 식의, 가혹한 상상을 멈추지 못한 거다.

사장은 여러모로 미안했던 거다.

그 아이가 살아 있을 때 우리 가게 물건을 자주 샀었고, 죽었을 땐 내가 보낸 편지를 손에 꼭 쥐고 있었다.

도움이 될 수도 있었던 사람이었으니까.

그 손 하나 더 뻗었더라면, 그 마음 한 번 더 알아줬더라면, 결말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고.

그래서 스스로를 가장 가혹하게 벌하고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석찬이 그런 말을 했을 때, 사장은 고맙기보다... 더 아팠을지도 모른다.

자기 손이 누군가에겐 희망이었다는 말이,

되려 또 한 번 그 아이에게 닿지 못했던 사실을 떠올리게 했을 테니까.

사장은, 그 소녀에게도 석찬에게도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 했다.

비록 결과가 바뀌지 않았더라도 충분히 애썼다.

…그런데 나는

곁에 있으면서도 사장에게 아무것도 해주지 못했다.

사장이 그 소녀에게 그랬던 것처럼.

사장이 석찬에게 그랬던 것처럼.

그 따뜻한 말 하나, “괜찮아요”, “당신 탓 아니에요”—

그 한마디를 왜 나는 끝내 건네지 못했을까.

어쩌면 알고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사장이 그 괴로움을, 그 죄책감을, 말이 아니라

입 안 가득 밀어넣는 음식으로—

그러면서도 아무것도 풀리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그렇게라도 버티려 하고 있다는 걸.

근데 나는... 왜 세상이 나에게 했던 것처럼, 내 부모가 그랬던 것처럼— 걱정이란 핑계로 윽박지르고, 좋아지라고 강요하고, 그 사람의 마음을 몰아세우기만 했을까.

정말 걱정했는데. 정말 좋아졌으면 했는데. 그게 다였는데…

그 모든 말들이, 사장에게는 2차, 3차 가해가 되었을 것이다.

아직 완전히 가라앉지 않은 사장의 숨결.

나는 아주 작게, 혼잣말처럼 말했다.

“...좀 쉬어요, 사장님.”

그 말이 닿았을까.

사장은 미동도 없이 숨만 내쉬었다.

나는 조심스레 문을 다시 닫았다.

조금이라도 더 고요하게, 사장이 쉴 수 있도록.

그리고 문 앞에 선 채, 아주 오래 멈춰 있었다.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이, 가슴 한가운데 무겁게 내려앉았다.

“...미안해요.”

사장에게 들리지 않을 걸 알지만 남겨보는 말.

마치 허공에 녹아 사라지는 입김처럼, 닿지도 못한 채 공중에 맴돌다가 조용히 꺼져갔다.

그 자리에서 한참을 서 있다가, 창가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커튼을 열고 슬쩍 밖을 바라본다.

오전부터 내리던 진눈깨비 같은 가는 눈이 여전히 흩날리며 떨어진다.

사람과 차들이 오가며 만든 마찰로 달구어진 도로 위에 닿자마자, 눈송이들은 속절없이 녹아 사라진다. 문득, 머릿속에 이런 생각이 스쳐간다.

사람의 감정은 어째서 저 눈처럼 쉽게 녹아 사라지지 않는 걸까? 아니면 참기 어려운 통증만이라도 마법처럼 없애줘야 하는 거 아닌가?

어느 쪽이든 가능해야 우리도 살 것 아닌가.

눈길을 떼지 못한 채, 계속해서 혼잣말을 흘린다.

밖에 나가 눈사람이라도 만들어볼까?

아니면, 우리 가게에 있는 눈고양이 틀을 가지고 나가 고양이 무도회를 재연해볼까?

그냥... 가게 앞을 지나는 사람들이 조금 착해지라고, 잠깐 행복하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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