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커덕 랜덤 뽑기]
겨울아침 공기가 유난히 상쾌했다.
전날 밤 창밖을 맴돌던 진눈깨비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가게 안에는 정리되지 않은 잔향들만 조용히 가라앉아 있었다.
탕비실 한켠에서 물을 따르던 나는 문이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복도 안쪽에서, 수면실 문이 천천히 열리고 사장이 걸어 나왔다.
잠에서 막 깬 듯 머리가 헝클어져 있었다.
어제와는 전혀 다른 표정이었다. 한결 개운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그녀는 조용히 싱크대 쪽으로 가더니 커피를 내리기 시작했다.
포트를 들어 올리고, 천천히 드립 주전자를 기울였다. 뜨거운 물이 곱게 갈린 원두 위를 둥글게 돌며 내려앉았다. 커피가루가 부풀어 오르며 조용히 숨을 쉬는 듯했고, 곧 진한 향이 조용한 탕비실 안을 가득 메웠다.
나는 말없이 잔을 들고 식탁에 앉았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그냥 눈치만 살폈다.
물을 홀짝이며, 그녀의 등을 조심스레 바라봤다.
그녀의 어깨는 다소 굳어 있었고, 움직임은 조심스러웠다.
무언가를 고르고 삼키는 듯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마침내 사장이 입을 열었다.
낮고 조심스러운 목소리였다.
“가끔은, 내가 이 일을 할 자격이 있긴 한 걸까 싶어요.”
그녀는 잠시 커피를 내리던 손을 멈추고, 고개를 조금 떨궜다.
원두 향이 더 짙어졌지만, 공기는 묘하게 무거워졌다.
“나는 여전히 흔들리고 완전하지 않은 사람인데, 이런 가게를 운영하는 게 과연 괜찮은 걸까. 처음엔 같은 형험을 한 사람들끼리 모여서, 조금씩 같이 나아가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지금은 모르겠네요. 완전히 길을 잃은 느낌이에요.”
조금씩 다시 물을 붓는 그녀의 손끝이 살짝 떨렸다.
커피가 다 내려지자, 김이 피어오르는 머그 두 잔을 들고 와 테이블에 앉았다.
한 잔은 내 앞에, 나머지 한 잔은 자기 앞에 놓고서 말없이 커피를 바라봤다.
머그를 감싼 사장의 손이 잠시 멈췄다.
작은 숨을 들이쉬고, 그녀는 조용히 말했다.
“걱정이었을텐데. 그날, 이성을 잃었고 선을님에게 상처를 준 거 같아요. 미안해요.”
나는 고개를 숙였다. 내 입에서도, 한참을 맴돌던 말이 천천히 흘러나왔다.
“아니에요. 걱정이란 말로 감싼 잔인함. 그것 때문에 힘들었으면서, 저도 사장님한테 그렇게 했어요. 제가, 저야말로, 죄송합니다.”
둘 다 아무 말 없이 커피를 한 모금씩 마셨다.
따뜻한 김이 천천히 올라왔다.
말로는 다 닿지 않는 것들이, 조용히 식탁 위에 놓였다.
사장이 살짝 웃으며 말했다. 어딘가 울컥한 웃음이었다.
“이 커피는… 오늘따라 좀 진하네요.”
“그러네요.”
나도 따라 웃었다.
그리고 다시 고요가 찾아왔다. 그 안에는, 말하지 못한 생각들이 조용히 흘러가고 있었다.
사장은 머그를 천천히 돌리다가, 입을 열었다.
“선을님.”
말끝이 조금 망설였고, 그녀는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일 그만두세요.”
“네?”
“이제 일 그만두시라고요.”
“왜요? 저번 일 때문에 그러시는 거에요?” 방금 화해한 것이 아니었던가, 말만 저렇게하고 복수하는건가, 그도 아니면 나 퇴근하고 구직사이트 여기저기 기웃거린 거 알아차렸나. 이유가 뭐든 쿵하고 가슴 한편이 내려 앉았다. 이런 걸 섭섭함이라고 하는건가.
사장님이 잠시 말을 멈추고, 눈길을 피하며 대답했다. “아니요.”
“그럼, 왜요?”
사장님은 잠깐 침묵을 지킨 후, 차분하게 말을 이어갔다. "선을님, 이제 사람들 눈을 보는 거 알아요?"
내가 당황해서 눈을 크게 뜨고 사장님을 바라봤다. “네? 제가요?”
“네. 그렇게 된 지 꽤 됐는데 몰랐어요? 지금도 봐봐요. 날 뚫어져라 보잖아요. 난 못 보겠는데.” 사장이 곁눈질로 힐끔거리며 말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순간 멍해졌다.
언제부터지? 아니 어떻게? 그보다 왜 인지를 못한거지?
그날 횡단보도에서부터인가.
왠지 내가 새로운 세계가 열리는 기분이 들었고, 마냥 기분이 날아갈 듯이 좋았던.
이제야 알겠다.
사장님은 그 후에 살짝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 “심지어 냥냥쭙쭙눈도 잘 보잖아요.”
“야옹” 자기 이름은 철썩같이 알아듣는 냠냠쩝쩝이 대답했다. 마치 이해한 듯한 표정을 지으며.
사장님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그 눈으로 넓고 밝은 세상을 보러 가봐요.”
저는 이 가게의 단골손님입니다.
사장님은 수년간의 은둔 생활 끝에 어렵게 세상과 다시 연결된 분입니다.
더 나아가, 자신과 같은 고립 청년들을 위해 일자리를 만들고, 함께 살아갈 공간을 만들어온 너무도 따뜻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최근, 한 손님의 보호자라는 사람이 믿을 수 없는 행동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딸이 살아 생전 단 한 번 이 가게에서 물건을 샀다는 이유만으로, 아무런 관련도 없는 사장님을 딸의 죽음과 연결짓고, 정신적, 물리적 피해 보상까지 요구하며 협박과 괴롭힘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은 온라인상에서 사장님을 “살인자”로 매도하며 수차례 협박성 메시지를 올렸고, 그 내용은 이미 캡처되어 증거로 남아 있습니다.
사장님은 현재 극심한 정신적 고통에 시달리며, 다시 은둔으로 돌아갈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고립 청년들을 위한 이 따뜻한 공간도 무너질 위기입니다.
아무런 죄도 없는 사람을 이렇게까지 몰아붙이는 일이 정당화되어선 안 됩니다. 법이 이들을 보호하지 못한다면, 고립 청년들에게 다시 사회는 공포의 공간일 뿐일 것입니다.
부디 이 청원에 동의해 주세요. 더 이상 선한 사람이 상처받지 않도록, 악의적인 협박에 법적 책임을 묻는 선례가 필요합니다.
소녀의 엄마가 인터넷에 반복적으로 올린 협박성 메시지들은 이미 여러 명에 의해 캡처되어 있었고, 이를 본 손님들 중 한 명은 분노를 참지 못하고 국민청원 게시판에 관련 사실을 올렸다. ‘은둔생활 극복하고 고립청년 돕는 착한 사장님을 살인자로 몰아가는 진상 아줌마를 고발합니다’는 제목의 청원에는 점차 공감이 모이며, 하루 만에 이십 만명이 동의하는 사태로 번졌다.
뿐만 아니라 SNS를 통해 급속도로 퍼지며 언론의 관심까지 끌었다.
지역 방송국은 “고립 청년의 희망이었던 작은 가게, 협박에 무너지나”라는 제목으로 해당 사안을 보도했고, 인터뷰 요청이 쏟아졌다.
하지만 사장은 카메라 앞에 나서지 않았다.
청원을 올린 손님은 방송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사장님은 누굴 해친 적도, 잘못한 적도 없어요. 그냥 조용히, 작게 세상과 연결되고 싶었을 뿐입니다. 그런 사람을 마녀사냥하듯 몰아세우는 건, 우리 사회가 반드시 반성해야 할 문제입니다.”
가게 앞에는 ‘응원 메시지’를 붙인 메모들이 하나둘 늘어났고, 인터넷 게시판은 그야말로 따뜻한 선플로 도배되어 여자가 올린 악의성 글들을 밀어내고 있었다.
인터뷰 이후 경찰은 사장님에게 연락을 취했고, 조사에 착수하겠다고 밝혔다.
사장은 힘겹게 알겠다고 대답했다.
며칠 뒤, 경찰은 공식 입장을 밝혔다.
“일방적 피해자의 가장이라는 이유로 반복적인 명예훼손과 협박을 가한 사례에 대해 수사를 개시했으며, 사이버범죄 수사팀이 관련 증거를 확보 중입니다.”
수사 결과, 가해자는 형법 제311조(모욕죄), 제307조(명예훼손죄), 정보통신망법 제70조(사이버 명예훼손 및 허위사실 유포), 형법 제283조(협박죄) 등에 해당하는 행위를 반복적으로 저지른 것으로 확인되었다.
경찰 관계자는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고인을 잃은 슬픔은 이해합니다. 그러나 어떠한 이유로도 타인에게 폭력을 가할 수는 없습니다. 특히 온라인 공간에서는 피해자들이 더욱 고립되기 쉬우며, 이번 사건은 사이버폭력의 심각성을 다시 일깨워주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사태가 이렇게 흘러가니 가해자 측도 반응할 수 밖에 없었다.
이전까지 SNS에서 ‘살인자’ ‘눈물값을 내놓으라’는 글을 올리던 소녀의 어머니는, 청원글이 올라온 이후에도 한동안 활동을 이어갔다.
하지만 점점 반응이 싸늘해졌다.
“죽은 딸을 팔아 억지를 부리는 거냐”는 댓글들이 붙기 시작했고, 자신이 쓴 악성글이 여러 커뮤니티에서 회자되며 논란이 확산됐다.
결국 소녀의 어머니는 자신의 계정을 비공개로 전환했고, 이후 작성한 사과문이 온라인에 올라왔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너무 많은 걸 잃고 있었습니다. 딸의 죽음을 온전히 제 안에서 받아들이지 못하고, 누군가에게 분노를 투사하고 있던 것 같습니다. 상처받으신 분들께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가해자들의 문제는 죄를 저지르는것에서 그치지 않고, 피해자에게 입으로 사과만 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법이라는 것은 감정의 해소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책임을 묻는 과정이 필요하다. 사과로 모든 것이 끝날 수 있었다면, 법은 존재하지 않을 테니까.
결국 소녀의 어머니는 법의 심판을 받고, 사회로부터 완전히 고립된 어두운 방 속으로 들어갔다. 그곳은 그녀가 한 일의 대가를 온전히 치러야 하는 곳이었으며, 이제는 그 안에서 자신이 저지른 행동의 무게를 견뎌야 했다.
사건이 정리된 이후, 냥냥쭙쭙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졌다.
소셜미디어에서는 #같이있는가게, #괜찮지않아도괜찮아,
#함께견디기 #착한가게 같은 해시태그들이 온통 냥냥쭙쭙의 계정을 태그하고 있었다.
댓글 창은 공감과 응원의 메시지로 폭주했고, 각종 커뮤니티와 SNS에는 ‘이런 가게가 진짜다’, ‘이제부터 내 전재산은 냥냥쭙쭙에 바친다’ ‘돈쭐을 내줘야한다’ 같은 말들이 쉴 새 없이 쏟아졌다.
사람들의 응원은 단순한 소비를 넘어, 한 사람의 삶을 지켜내고, 이 가게에서 다시 숨 쉬기 시작한 고립청년들의 존재를 세상에 증명하고 있었다. 정의는 여전히 살아 있었고, 모두가 함께 그 증거가 되어주고 있었다
사장말대로 세상은 아직 눈부시게 밝았다.
초록의 생명력이 움트는 초봄의 아침, 계절도, 사람도 모든 것이 다 제자리로 돌아오는 느낌이었다.
가게 문을 열자마자 냥냥쭙쭙이 가장 먼저 반겨줬다.
“밤새 가게 잘 지키고 있었어?”
고양이 턱밑을 간질이며 그렇게 말하자, 냥냥쭙쭙은 ‘응’ 하고 대답하듯 눈을 찌푸렸다.
소품들을 하나하나 정리하다 말고, 혼잣말이 절로 나왔다.
“이것도 예쁘다... 어머, 저건 또 왜 이렇게 귀여워.”
진열대 앞에서 한참을 앉아 있다가, 작은 머리핀을 들고 괜히 피식 웃었다.
그 순간, 석찬이 조심스럽게 다가와 내 옆에 섰다.
어느새 그가 냥냥쭙쭙에서 일한지 세 달이 되어간다.
그말인 즉슨 나의 출근도 이제 며칠 남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사장은 처음 그 말을 꺼낸 이후로 같은 얘기를 반복하지 않았다. 아무 말 없이 나의 느린 정리를 존중해줬다. 하루만 더, 조금만 더, 욕심을 냈던 나의 머무름을 기다려줬다.
“선을님, 차 한잔 하실래요?”
석찬의 목소리에 생각에서 빠져 나온 나는 옆 벽에 걸린 고양이 시계를 확인했다.
“아직도 시간이 이것밖에 안됐어요? 좋아요, 우리 밀크티 마셔요.”
내가 탕비실로 몸을 돌리자, 석찬도 뒤를 따랐다.
좋아하는 것들로 가득찬 초봄의 아침,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영국 왕실 문양이 그려진 포장지를 열었다.
크게 세 스푼.
컵에 듬뿍 떠 넣고, 뜨거운 물을 부었다.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며 익숙한 향이 코끝을 간질였다.
한 모금, 입에 머금자 달큰한 홍차와 부드러운 우유의 조화가 혀를 감쌌다.
따뜻한 꿀물이 목을 타고 내려가는 기분.
익숙하면서도 늘 새롭다.
처음엔 여운이 하도 맛있다며 권해서 마시기 시작했던 밀크티.
하지만 이젠 내가 좋아하게 됐고, 이렇게 석찬에게 타주고 있다는 사실이 자연스러운 흐름같으면서도 영 어색했다.
“선을님은...” 석찬이 찻잔을 내려놓으며 조심스레 묻는다.
“어쩜 그렇게 밝으세요?”
“제가요?”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런 말을 건네는 쪽은 나였던 것 같은데.
여운의 손에 들린 고양이 피규어 하나가 그녀의 하루를 눈 부시게 밝히는 걸 보며 물었었다.
‘어떻게 그렇게 작은 거 하나에 행복해요?’
그때의 나는, 살아있는 것조차 벅찼다.
그런 나였는데, 지금은 나도 모르게 이런 질문을 받게 되었다.
그 사실이 조금 이상하고, 조금 기뻤다.
나는 잠시 생각에 잠기다 조용히 입을 열었다.
“예전엔 저도 그게 이상했어요. 왜 저 사람은 저렇게까지 밝을까, 정말 히키코모리였던 사람이 맞나, 아팠던 사람이 맞을까, 그런 생각 했거든요.”
석찬이 고개를 끄덕였다. 조용히 내 말을 듣고 있었다.
“그 분이 그러더라고요. 밝아야 해서 밝은 게 아니라... 그냥, 더 이상 거짓말 안 하기로 했다고요. 스스로한테. 안 괜찮은 날은 안 괜찮다고 말하고, 괜찮은 순간엔 부끄러워하지 않고 좋아해주고. 내가 좋아하는 걸 좋아한다고 말하고... 그게 처음엔 되게 무서웠는데, 계속 해보니까 조금씩 나아졌어요.”
잠시 말이 끊겼다. 석찬이 가만히 물었다.
“그래서... 지금은 괜찮으신 거예요?”
나는 어느새 다가와 내 몸을 꾹꾹 누르고 있는 냥냥쭙쭙에 머리를 살짝 콕 찌르며 말했다.
“오늘은 괜찮아요. 내일은 또 모르겠지만.”
그리고 덧붙였다.
“근데 그런 내가, 싫진 않아요.”
“있는 그대로 좋아하기로 했어요.”
잠시 조용한 공기가 흘렀다.
석찬은 내 말을 곱씹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한동안 말없이 따뜻한 찻잔을 사이에 두고 앉아 있었다.
“아, 저 궁금한 게 있는데요. 저 뽑기 기계요. 대체 뭐예요?”
나는 피식 웃고는 컵을 내려놓았다.
“랜덤뽑기예요.”
“선을님도 해봤어요?”
“아뇨.”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주 예전에... 해보려다 말았어요.”
“왜요?”
“그냥... 겁나서요.”
“겁나요? 뽑기가요?”
그가 고개를 갸웃했다.
“네.”
내가 원하는 게 아닐까 봐. 또 실망할까 봐. 괜히 기대했다가, 별것도 아닌 거에 상처받을까봐.
정말 그랬다.
나는 원망처럼 그렇게 살았다.
원하지 않는 걸 뽑아들며, 실망과 포기를 반복하면서.
내 손엔 늘 부족한 것들만 남았고, 그건 언제나 내 탓 같았다.
남의 탓으로 돌리기도 했다.
그런데 지금은… 잘 모르겠다.
어쩌면, 원하는 걸 얻는 것보다 더 중요한 건... 그냥 해보는 걸지도.
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의자는 조용히 밀려나며 바닥을 긁었고, 손끝에 남은 미세한 떨림이 그대로 전해졌다.
심호흡 한 번.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는 사이, 발끝이 조심스레 바닥을 디뎠다.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은 걸음이었다.
스스로도 놀랄 만큼 자연스러운 움직임.
그냥, 더는 망설이지 않기로 했다.
정수기 옆, 그 뽑기 기계 앞에 다시 섰다.
과거의 나는 여기서 돌아섰다.
이번엔, 아니었다.
더 이상 결과에 휘둘리지 않기로 했다.
나는 천천히 주머니에서 코인을 꺼내 들었다.
철커덕. 철커덕.
타탁.
알록달록한 플라스틱 캡슐 하나가 굴러 나왔다.
손에 쥐었을 때, 가볍고 따뜻했다.
무엇이 들어 있든, 지금의 나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았다.
뒤를 돌아보니, 석찬이 테이블에 앉아 나를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
나는 아주 천천히, 아무도 대신 열어줄 수 없는 그 작은 세계를 열었다.
안에는...
작고 둥근 고양이 피규어가 들어 있었다.
두 눈을 감고, 뜨거운 욕탕 안에 들어가 있는 모습.
양 팔은 욕조 가장자리에 기대어 있고, 입가엔 아주 작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여운이 그렇게 가지고 싶어했던 그것이었다.
정말 웃기도록 귀여웠다.
순간, 빵— 하고 웃음이 터졌다.
이제 알겠다.
무언가를 얻는 것보다,
포기하지 않고 손을 뻗는 것이 더 어렵다는 걸.
끝날 것 같지 않았던 길었던 겨울이 끝나고, 창문 밖에 조금씩 봄의 기운이 스며들었다. 차가운 공기 속에서 미세한 온기가 느껴지며, 마치 새로운 시작을 예고하는 듯했다. 그 따스함에 몸을 맡기며, 나는 작은 고양이를 조심스레 양손에 감싸 쥐었다.
어쩌면 그게, 내가 다시 뽑아든, 다시 감싸쥔 '내 삶'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