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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부인과를 거치는 시간들

by 오호라

난임 병원에서 진료를 접수할 때였다. 모자를 푹 눌러쓴 여성이 들어와서 내 옆에서 조급한 듯한 어조로 말했다.

“사후 피임약 처방받으려고요”

그 목소리에서 약간의 떨림이 느껴졌다. 그 여성은 아마도 이곳이 난임 전문 산부인과라는 것을 몰랐을 것이다. 그저 집에서 가장 가까운 ‘산부인과’를 온 것일 테다.


무슨 사연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사후 피임약을 처방받는다는 것은, 혹시나 사고처럼 생겨날지도 모르는 ’ 임신‘이라는 불상사를 미연에 방지한다는 의미다. ’ 임신‘, 그것은 인생의 어느 시기를 지나고 있느냐에 따라 여성 당사자에게는 크나큰 불행이 될 수도, 크나큰 축복이 될 수도 있는 것이었다. 지금은 사후 피임약을 처방받는 저 여성은 다시 산부인과를 찾게 될 때 어떤 이유로 오게 될까.


진료실 앞 의자에 앉아 있는데, 어렴풋이 앞사람이 진료받는 소리가 들려왔다. 초음파실에서 빠르게 쿵쿵 쿵쿵하는 소리가 그렇게나 크게 들려올 줄은 몰랐다. 혹은 나에게만 유독 크게 들려온 소리였는지도 모르겠다. 그건 분명 태아의 심장소리였다. 유튜브에서 다른 사람들의 임신 출산 브이로그를 워낙 많이 보았던 터라 단번에 알아들을 수 있었다. ‘내 앞사람은 성공했구나…‘ 하는 생각이 스쳐감과 동시에 부러움과 질투가 일었다. 그건 자동적인 반응이었다. 그리고 이내 꼬리처럼 다른 생각이 따라온다. 내 앞사람이 어느 정도의 시도 끝에, 얼마만큼의 고통과 슬픔 끝에 성공했는지 모르니까 그저 질투하면 안 된다고. 마음을 착하게 먹어야 한다고. 다른 이들의 기쁨을 축복할 수 있어야, 나에게도 축복이 찾아올 거라고 나답지 않은 생각을 하려고 했다. 문 안쪽에서 의사의 작게 목소리가 들려왔다.

’ 2주 후에 오세요… 7주에서 8주쯤…‘

몇 가지 들려오는 단어만으로 그 내용을 유추할 수 있었다. 내 앞의 여성은 이제 막 태아의 심장소리를 들었고, 지금은 5주 정도 된 거구나. 아직은 완전히 안심할 수 없는 임신 초기여서 호르몬제를 계속 맞고 있을지도 모른다. 시험관 시술을 한 경우에는 자궁을 두텁게 하여 임신을 유지시켜 주는 호르몬이 자연적으로 나오지 않기 때문에, 임신 10주 정도까지 계속 호르몬제를 투여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얼마 전 알게 된 터였다. 난임의 졸업은 임신테스트기 두 줄, 그것만으로 끝나는 게 아니었다. 유산의 위기가 크다고 하는 임신 초기, 12주까지는 마음을 놓을 수 없다. 어쩌면 출산을 할 때까지도 안심을 할 수 없어 기다림과 불안의 연속인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면 산부인과는 임신과 출산을 둘러싼 다양한 여성의 삶이 집약된 곳이었다. 임신을 피하고 싶은 여성도 이곳에 와있고, 임신을 하고 싶은 여성도, 임신이 되었어도 내내 불안한 여성도, 이윽고 난임병원을 졸업하여 한 시름 놓고 일반 산부인과로 전원 하는 여성도 볼 수 있었다. 어떤 여성들의 가방에 달린 상큼한 핑크빛의 ‘임산부 배지’가 빛나는 합격증처럼 느껴진다. 고생 끝에 낙이 있을까. 설레는 마음으로, 행복한 기대감으로 부푼 배를 안고 산부인과 문을 여는 미래가 나에게는 언제쯤일까. 나도 해피엔딩을 꿈꾸며 자꾸만 다른 여성들의 기록을 기웃거린다.


난임 브이로그로 시작한 영상은 임밍아웃 영상으로 이어지고, 임신 초기 증상들, 점점 배가 불러오는 일상, 태교 여행 같은 행복하고도 부러운 일상에서 출산, 산후조리원 브이로그로 이어진다. 육아 브이로그까지 꾸준히 올리는 채널도 꽤 있다. 굳이 모든 영상을 시청하지는 않지만 그 여성의 삶이 결국 아이와 함께 하는 행복한 일상으로 이어지는 모습을 보면 왠지 안심이 된다.


공원에서 아이를 보면 이제는 그런 생각도 하게 된다. 저 아이도 어쩌면 인공수정을 통해서 태어난 거 아닐까, 시험관 시술을 통해 태어난 거 아닐까. 저 아이가 세상에 태어나 살아온 시간보다 아이를 기다렸던 부모의 시간이 훨씬 길었을지도 모른다고. 그렇듯 아이와 함께 공원에서 노니는 평범한 듯 보이는 일상은 지금의 나에게는 결코 평범해 보이지 않는다. 아직 내가 이루지 못한 어떤 성취 그 자체다. 그 모습이 해피엔딩처럼 여겨지지만 사실 그것이 ‘엔딩’이 아니라는 것은 안다. 그것만이 해피엔딩인 건 아니라는 것도 안다. 하지만 아는 것과 느끼는 건 참 다른 문제다. 난임과 관련된 영상에서 종종 보이는 응원댓글을 보며 나도 그런 응원댓글을 달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바란다. ‘저도 많이 힘들었는데, 지금은 건강한 아이를 낳아 잘 기르고 있어요.’ 하고 이 시기를 겪었던 나를 돌이켜보며 또 다른 누군가에게 위안이 되고 싶어 하는 나. 그게 지금의 내가 바라고 있는 상투적인 해피엔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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