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명해 줄 누군가가 필요했어
대학 병원에 가는 길이었다.
14살이었던 나는 지하철을 타고, 평소 그다지 갈 일이 없었던 대학 병원을 향해 터벅터벅 혼자 걷고 있었다. 뜨거운 햇살이 내리쬐고, 낯선 골목길을 지나 길을 물어 물어 그렇게 병원을 찾아갔다.
많은 의사, 간호사, 직원들과 환자들 그리고 그 보호자들을 지나치고 도착한 입원실.
나는 자연을 좋아하고, 마음껏 뛰어놀기를 좋아했지만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것이나 주목받는 것을 어린 시절부터 딱히 좋아하진 않았고, 민감한 오감으로 그리고, 적고, 만드는 것을 좋아했다. 내성적이라 주로 다가오는 친구들과 함께 시간을 보냈고, 학업은 열심히 이어가고 있었던 터라 친구들이 다가오면 모르는 문제나 질문들에 대답하고 알려주면서 관계를 이어나갔다.
어느 날 수업을 모두 마치고 집에 돌아오니 현관에 아무렇게나 놓인 신발들이 보였다. 왜인지 느낌이 좋지 않았다. 맞벌이를 하고 계셨던 부모님이 이 시간에 두 분 다 집에 계시다니? 무슨 일일까?
" 엄마, 아빠, 갑자기 무슨 일인 거예요? "라고 물을 생각에 안방 쪽으로 걸어가는 데, 엄마는 무슨 일인지 누운 채로 처음 보는 서러운 얼굴로 울고 계셨고, 아빠는 엄마를 안고 함께 울고 계셨다. 무언가 심각한 일이 벌어졌다는 걸 직감한 나는 안방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심각한 분위기를 보니 이 상황에 내가 들어가면 안 될 것만 같았다. 처음 보는 부모님의 모습이었다. 그렇게 나는 더 이상 묻지 않은 채 내 방으로 돌아와 책상에 앉아 누군가 상황에 대해 먼저 이야기해 줄 때까지 온갖 생각들을 하며 기다리고 있었다.
어떤 상황인 지 모른 채 얼마 뒤 엄마와 아빠는 부산으로 여행을 다녀오셨고, 할머니께서 우리 집으로 오셨다. 곧이어 외할머니께서도 우리 집으로 오셨다.
어른들의 대화를 엿들어보니, 엄마에게 암이라는 병이 찾아왔고 3-4기 정도로 진행이 된 상태라서 치료 기간도 꽤 길게 걸린다고 한다. 초기가 아니기 때문에 이후의 삶도 어느 정도로 이어질 수 있을지 전이가 될지 안 될지 알 수 없는 상태였다고 한다.
엄마는 수술과 긴 항암치료를 시작하게 되었고, 할머니와 외할머니께서 멀리서 번갈아 오시면서 우리에겐 별다른 말씀 없이 우리들을 묵묵히 챙겨주셨다. 할머니 두 분 께서는 교복을 깨끗이 빨고, 음식을 챙겨주시고, 아빠는 병원비를 위해 단단히 마음을 먹고 회사를 가셨다.
내성적인 성격에 내 이야기들을 다른 친구들에게 쉽게 하지 않았던 나는 아무에게도 이 일들을 이야기하지 않은 채 매일 암에 좋다는 음식들을 검색해 봤다.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적은 용돈으로 버섯도 사고, 브로콜리도 사고, 과일도 사곤 했다.
기나긴 항암 치료를 받으러 다니시면서 엄마는 집에 오시면 부작용에 시달리며 피를 토하고, 온 입에 염증이 생겨 음식은 드시지 못했다. 매일 출근 전 부지런히 손질하시던 머리카락도 모두 빠지고 없었다.
고등학생이었던 언니와 중학생의 나는 무언가 무겁게 가라앉은 집안 분위기 속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들을 찾아야 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공부였다. 공부를 열심히 해야만 부모님의 걱정을 덜어드릴 수 있었고, 그래야만 부모님도 작은 희망이라도 가지실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학교에서 마냥 밝게 까르르 웃는 친구들 속에서 나는 어딘지 모르게 그늘진 모습들이 많아졌고, 그런 조금은 달라진 나와 보내는 시간을 지루해하고 멀어져 가는 친구들이 생겨나기도 했다. 그럼에도 묵묵히 나는 공부를 해야 했다.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걱정, 불안, 우울함, 무기력을 떨쳐낼 방법이었다. 지독히 몰두할 무언가가 필요했다. 가장 좋아했던 그림과 디자인이라는 꿈은 저 멀리 보이지 않게 밀어두었다.
뜨거운 여름 혼자 터벅터벅 엄마가 누워 계신 입원실을 향해서 걸어가면서 생각했다.
엄마가 왜 거기 있는 거야? 어디가 얼마나 아픈 거야? 언제 괜찮아지는 거야?
치료를 하면 괜찮아지기는 하는 거야...?
그랬다.
나에게는 "괜찮아, 엄마는 이러이러한 걸로 아픈 상태이지만, 열심히 치료를 받으면서 나아지고 있고 언제쯤이면 치료가 끝날 거야. 그 후엔 함께 회복할 수 있도록 서로 도우면서 이겨내 보자." 이런 누군가의 설명과 희망이 담긴 한 마디가 절실했다.
나는 그때 내 할 일을 열심히 하는 것 말고는 누군가를 쉽게 위로하기도, 나 자신을 위로하기도 어려웠고, 방법도 몰랐다. 쉽사리 안도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도 하루에 수만 가지 생각을 하던 내 마음속에는 작은 안심이라도 필요했다. 그래서 누군가 좀 더 상황을, 엄마의 상태를 자세히 알려주기를 바랐다. 단지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어른들의 분위기를 읽고, 표정을 읽으며 심각성을 느끼고, 어떻게 되어가는 것인지 추측할 뿐이었다.
부모님, 언니, 할머니, 외할머니는 모두 각자 묵묵히, 조용히 별다른 말 없이 이 힘든 시간들을 견디어 내고 있었다. 그 분위기 속에서 내가 가장 어리다고 해서 나 혼자 힘들고 무섭다고 차마 말을 꺼낼 수 없었다. 모두가 위태 위태한 상황들 속에서 자신들의 할 일을 꼭 붙잡고 매일을 살아가고 있었다. 그래야만 오늘 하루를 지킬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을 것이다.
그렇게 함께 열심히 버텨온 시간이 감사하지만, 어른이 된다면 아이들이 생각보다 많은 부분을 추측하고 걱정하고, 불안해한다는 것을 알고 조금은 더 상황을 자세하게 설명해 주고, 앞으로 다가올 상황들을 예측할 수 있게 해 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14살 소녀였던 나는 이 세상에서 한 사람의 삶이 그다지 길지 않은 시간일 수 있다는 것, 죽음은 생각보다 일상과 가까이에 있다는 것, 가족과의 평화로운 일상은 정말 소중한 순간순간이라는 것을 일찍 깨달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함께 할 수 있는 평범한 나날들'이었다. 그때부터 나는 '왜 사는가, 왜 일하는가, 무엇을 위해 사는가, 가족이란 어떤 의미인가' 많은 부분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우리를 보며 하루하루 이겨내고, 열심히 관리를 하신 엄마는 내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다시 일을 하는 지금까지 건강히 지내고 계신다.
성인이 되어 알게 되었다.
엄마는 삶을 열심히 살아오셨지만 그 어떤 이유들보다 언니와 내가 10대일 때 너무 아이들이 어려 보여, 차마 먼저 떠날 수 없다는 생각으로 생의 의지를 다지고, 또 다져오셨다고 한다.
"삶과 죽음은 한 끗 차이이더라. 포기하고 싶은 순간이 많았어. 매일 잠들 때마다 기도 했지, 너희가 대학생이 될 때까지만. 아니 결혼할 때까지만. 아니다. 손자 손녀가 태어날 때까지만, 손자 손녀가 자랄 때까지만.... 하면서 그렇게 매일 기도했다. "
이 말을 듣기 전에는 너희 덕분에 살았다는 말이 가끔은 무겁고 부담스러울 때도 있었다. 모범생이라는 삶에서 한치도 어긋나지 않게, 어디서든 문제없이, 두드러지지 않게, 부모님의 기대나 희망을 꺾지 않게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늘 부모님을 걱정을 하면서도 항상 나는 왜 이른 나이부터 이렇게 부모님을 걱정하며 살아야 하는지 답답하기도 했다. 그런 답답한 마음을 부모님께서 느끼셨을 것만 같아 죄송스럽기도 하다.
그런데 이젠 그 마음을 나도 알겠다.
나 또한 건강검진을 받으면서 조금만 어디가 아파도 설마 아니겠지, 아이가 클 때까지,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할 때까지, 손자 손녀가 자랄 때까지 그렇게 건강하길 바라는 마음이다. 내 아이가 어느 정도 자라 스스로 많은 것을 할 수 있을 때까지 건강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잠든 아이의 얼굴을 보고 있는 내 모습에서, 투병 중이었던 40대의 젊었던 엄마의 모습이 이제 보인다.
이 세상에서 내 삶이 어디까지 이어질지 알 수 없다. 다만 그 시절 엄마의 마음처럼, 나 또한 이젠 아이가 성인이 될 때까지 건강한 몸과 정신으로 살고 싶다. 어려움이 다가오더라도 버텨내고 싶다.
다만 아직은 너무나 어린아이처럼 보이는 내 아이에게도 많은 부분을 좀 더 설명해 주어야겠다고, 아이가 모든 것을 이해하긴 어렵더라도 아이의 눈높이에서 안심시켜 주어야겠다고, 삶과 죽음의 의미를 잘 알려주어야겠다고 생각해 본다.
인생사 모든 것을 알 수 없지만,
다만 내 아이가 성인이 될 때까지 건강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