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몇 달, 윤은 자주 목뒤가 아프다고 했다.
표현은 정확했다. 머리가 시작되는 지점을 짚으며, 뜨겁다거나 당긴다고 하니 엄마로서 대충 넘길 수만은 없는 일이었다. 어떤 날은 자지러지게 울었고, 어떤 날은 연신 짜증이었다. 어쩌다 한 번 그래도 신경이 쓰이는데, 하루에도 몇 번씩 그러니 걱정이 되다가도 받아주기 어려웠다. '괜찮아? 그럴 수 있지. 금방 나아질 거야.' 이건 <엄마의 정석> 같은 책에서나 나올 만한 물음이다. 현실 속 엄마는 인내심을 다 쓴 만큼 폭발하니까. '왜 그래. 뭐가 문제야 도대체. 어? 그래서 어떻게 할까?' 순식간에 차가워져선 방금 전 말을 후회한다. 자신의 상태를 기민하게 알아차리는 건 어른에게도 어려운 일이다. 네 살 아이는 오죽할까. 그렇게 따진다고 알게 될 리가 없었다. 그걸 아는데도 나는 그 말을 무기처럼 날카롭게 꺼내 보였다.
규모가 있는 소아 병원을 두 번 찾아갔다.
아이가 진료실에 잠깐 앉아있는 모습만으로도 선생님은 별 이상이 없다고 판단했다. 엑스레이라도 찍으면 마음이 좀 편할까 싶었건만 소아과에서 실시하는 엑스레이로는 근골격계를 볼 수 없다고 했다. 현실적으로는 성장통일 가능성이 크고, 지금으로서는 기다리는 것이 최선이고, ct 혹은 mri를 생각한들 아직 아이가 어려서 쉽지 않을 거라는 것. 하나같이 맞는 말이었다. 마냥 기다리기 힘든 거. 그거 하나 때문에 여기를 다시 찾아온 나로서는 답답함만 커지는 대답이었다. 눈여겨볼 지점은 아이의 그 말이 현실을 벗어나서도 계속되는지, 그도 아님 마음의 문제인지 살펴봐야 한다는 것이었다. 언니랑 같이 유치원을 다니면 안 아플 거예요. 나는 아파서 낮잠 시간에 안 자요 등등. 진짜 아픈 것 같다가도 그 말은 또 예상치 못한 순간에 튀어나왔다.
어제도 그랬다. 일어나서 잘 놀다 말고 윤은 다리와 목뒤가 아프다며 울었다. 출근과 등원 준비를 동시에 하느라 나는 아이를 받아줄 여력이 없었다. 오히려 예민했다. 그럼 챔프 먹자, 아니면 누워 있어. 두서없이 얘기하고, 정신없이 짐을 챙기느라 바빴다. 등원할 때 짜증이 많았던 윤은 하원 길에 더 심해졌다. 집으로 돌아와선 언제 그랬냐는 듯이 놀다가 추워하기를 반복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아이가 아픈지 몰랐다. 부랴부랴 잘 준비를 마친 뒤 방에서 홀로 서러운 윤을 가만히 보다가 그제야 아이 마음이 보였다.
"윤아. 많이 아파?
"응."
"엄마가 어떻게 해줄까?"
안아줬으면 좋겠다고 했다. 윤을 서서 안아주었다. 평소와 달리 금세 잠들었다. 어지간히 피곤했구나. 몸이 정말 안 좋았구나. 힘들어서 짜증 나고 울음이 났구나. 그제야 깨달았다. 손끝 발끝이 차가웠다. 열이 오를 때 찾아오는 증상이다. 손발을 주물러주니 머지않아 따듯해지면서 온몸이 뜨거워졌다. 아이에게 가장 미안한 건 이런 순간이다. 대책 없는 울음과 짜증이라고만 여겼지, 아픈 줄 알았다면 조금 더 친절했을 텐데. 목뒤가 유난히 홧홧하다. 멈머(애착인형)가 떨어져서 잠시 깬 아이를 다시 불렀다.
"우리 윤이 피곤했구나. 오늘 많이 힘들었어?"
"응."
"그랬구나. 우리 윤이가 오늘 그런 줄도 모르고 엄마가 다그쳐서 미안해.
우리 아기 오늘 많이 힘들었겠네. 엄마가 계속 안아줄게. 푹 자."
"..... 응."
아이가 대답하며 울먹거린다.
옳은지 아닌지에 꽂히면 이미 대화의 문이 닫혀버린다. 무엇보다 마음은 알아줘야 풀린다. 나의 마음이든 아이의 마음이든. 그렇게 생각하면 스쳐 지나가는 사람이 하나의 마음으로 보이고, 그 마음들 각자 안아줘야 하는 존재로도 보인다. 마음을 마음으로 안아준다는 건 진심으로 고귀한 일이구나. 온몸을 맡긴 채 엄마 품에서 잠든 아이를 통해 깨닫는다. 상대방의 말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는지 스스로 자각하는 게 더 중요하다는 것. 눈에 보이는 곳보다 보이지 않는 곳. 거기에 항상 더 소중하고,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