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대학신문 기고문
“대학이 배출하는 인재는 더 이상 기업에서 쓸모가 없습니다.”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는 『부의 미래』에서 사회 각 부문의 변화 속도를 자동차 속도에 비유했다. 그의 분석에 따르면 기업은 시속 100마일로 달리는 반면, 학교는 시속 10마일에 불과하다. 토플러는 이러한 ‘속도 비동기화’가 사회 전반의 불협화음을 초래한다고 경고했다. 속도 10의 학교가 배출한 인재를 속도 100의 기업이 받아들이니, 기업은 “대학 4년 동안 무엇을 배운 것인가”라는 의문을 품게 된다. 이 지적이 나온 것이 벌써 2006년의 일이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지금, 격차는 오히려 더 벌어졌다. AI가 촉발한 4차 산업혁명은 일차함수의 그래프를 급격히 지수함수로 꺾어 올렸다. 신기술의 반감기는 짧아졌고, 기업조차 변화 속도를 따라가기에 숨이 찬다. 그런데 뒤를 돌아보면 여전히 대학은 느린 걸음을 걷고 있다. 이대로라면 상당수 대학의 존립 자체가 위태로울 수 있다.
최근 오픈AI CEO 샘 올트먼은 한 팟캐스트에서 “내 아이는 아마 대학에 보내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미래 세대는 ‘AI 없는 세상’을 전혀 경험하지 못할 것이라는 전망과 함께다. 그는 대학이라는 제도가 “의미 있는 프로젝트에 헌신하거나 야심 있는 사람들과 연결될 수 없다면 굳이 갈 필요가 없다”고 강조했다. 이는 대학 교육의 가치 자체를 부정한다기보다, 기존 대학 모델이 변화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는 현실을 지적한 것이다.
국내 현실을 보자. ‘서울대 10개 만들기’ 정책 과정에서 대학별 학생 1인당 교육비 격차가 뚜렷하게 드러났다. 이는 정부 지원금 없이는 본래 취지대로 대학을 운영하기 어렵다는 뜻이기도 하다. 정부 눈치를 보느라 누가 봐도 표절인 학위 논문 취소하는 데 3년이나 걸린 것이 이해가 될 정도다. 그렇기에 큰 예산이 들지 않으면서도, 전공과 무관하게 AI 시대가 요구하는 인재상을 제시하고자 한다. 그것은 바로 ‘Why형 인재’다.
AI가 모든 분야에서 인간의 지능을 능가하고 있는 지금, AI가 대신할 수 없는 인간의 두뇌 영역은 어디일까. 그것은 뇌에서 가장 늦게 발달하는 전전두엽(Prefrontal Cortex, 이하 PFC)이다. PFC는 ‘뇌 속의 뇌(Brain of the Brain)’, ‘뇌의 CEO’라 불리며, 공감 능력·도덕성·감정 조절·직관·통찰·문제 해결을 총괄한다. 무엇보다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왜(Why)를 묻는 사고’를 가능하게 한다. 동물과 구별되는 이 고차원의 실존지능은 모든 인간이 언젠가는 죽는다는 사실 앞에 ‘나는 왜 존재하는가?’를 물으며 발달했으리라. AI가 학습한다고 재현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지난해 말, 이 부분의 뇌 기능이 결여된 지도자의 잘못된 판단이 국가적 재앙을 몰고 올 뻔했다는 걸 부인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면 ‘Why형 인재’의 특징은 무엇일까?
첫째, 이중언어 능력이다. 연구에 따르면 이중언어자는 단일언어자보다 PFC 활성도가 높다. 대학은 최소한 졸업할 때 영어로 사고하고 토론할 수 있는 수준의 언어 능력을 길러줘야 한다. AI는 전세계 모든 언어를 구사할 수 있으나 그 ‘모국어’는 영어다. 고등학교 때까지는 영어가 아닌 ‘입시 영어’에 매몰되어 있었다 하더라도, 대학교 과정에서는 영어 하나만이라도 제대로 하게 해서 졸업시켜야 한다. 전 세계에서 1인당 영어 공부에 가장 돈을 많이 쓰고도 영어로 자기소개 하나 못하는 불명예를 대학이 이쯤에서 종식시켜 줬으면 좋겠다. 졸업 요건으로 설정한 형식적 공인 영어 시험 점수는 의미가 없다.
둘째, 월등한 독서량이다. 적극적으로 사고하며 읽는 사람과, 수동적으로 영상을 소비하는 사람은 PFC의 회백질 밀도부터 다르다. 두뇌의 회백질에는 뉴런과 시냅스가 밀집해 있다. 대학은 고등학교까지 이어진 ‘주입–암기–평가’의 순환을 끊고, 깊이 읽고 토론하는 문화를 만들어야 한다. 미국 세인트 존스 칼리지의 Great Books Program이나 컬럼비아 대학의 Core Curriculum처럼, 단순 교양을 넘어 AI 시대에는 인간만이 발휘할 수 있는 사고의 깊이를 기르는 전략이 더더욱 요구된다. 지금과 같이 예측하기 어려운 상황에서는 ‘왜’를 묻는 전전두엽이 발달한 인재가 필요하다. 문제를 풀기 이전에 문제를 규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하나를 더 보태고 싶다. 그것은 사회문제에 대한 감수성이다. 기업이 새내기 인력을 채용할 때 기대하는 ‘젊음’에는 에너지와 함께 사회 변화를 이끌겠다는 ‘열정’이 포함된다. 그러나 현실에서 많은 대학생이 사회문제에 무관심하거나 이를 개인적 선택의 문제로만 여긴다. 그 결과, 필요한 변화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하고 무기력한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이제 기업은 전문 지식뿐 아니라, 사회문제의 맥락을 읽고 공감하며 행동할 수 있는 인재를 원한다. 대학은 학생들이 사회문제에 대한 민감도를 높이고, 다양한 시각에서 이를 토론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해야 한다.
AI 시대, 빠른 기업과 느린 대학 사이의 속도 격차를 줄이는 길은 단순 지식의 속성 전달이 아니다. 깊이 생각하고, 타인과 협력하며, 문제를 정의하고 해결하는 인간 고유의 역량을 길러주는 교육이다. PFC를 단련하는 이중언어 교육, 독서와 토론, 그리고 사회문제 감수성 교육이야말로 대학이 기업과 사회에 동시에 기여하는 길이다.
기고문 링크: https://news.unn.net/news/articleView.html?idxno=5824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