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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렘 반, 두려움 반

귀향

by kseniya


드디어 천신만고 끝에 키보드 키를 눌렀다. 3주 동안 고민 끝에 내린 결단이었다. 이제 출발하는 일만 남았다.




팬데믹이 터지기 직전 라스베이거스에서 큰 형님의 환갑을 겸한 온 가족의 모임이 있었다.

서부에 둥지를 튼 다른 세 형제를 떠나 우리 가족만이 혈혈단신 아무도 없는 이곳 남부에 둥지를 틀었었다.

형님은 내가 오지 않으면 보지 않을 거라는 으름장을 놓으면서 나를 심난하게 만들었다. 공황장애가 한창 진행 중일 때라 더욱 결정하기가 쉽지 않았었다.

이미 표를 구하라고 돈까지 보내진 상태였다. 아직 어렸던 아이들은 엄마 없이 움직이기 싫다고 떼를 쓰기 시작했다. 눈 딱 감고 , 한 번 시도해 보자는 남편의 말도 위로가 되지 않았다. 집 앞 오분 거리의 슈퍼도 차를 타고 갈 수 없었던 상황이었다.


일단 표를 끊고 가보기로 했다.

만반의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남들이 보면 참 호들갑도 유난이라고 할 광경이지만 , 이 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의 심정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두려움이 존재하고 있었다.

만일을 대비해 수면제와 신경안정제를 처방받아 놓았다.

라스베이거스로 가는 당일이 되자 마음은 더욱 콩닥콩닥 뛰기 시작했다.


가보자!


이제는 낯선 곳이 되어버린 공항입구에 도착하자 손발이 경직되기 시작했다.

양손에는 나만이 알고 있는 만발의 준비가 되어 있었다.

한 손엔 물. 다른 한 손엔 책.. 그리고 가방 안에는 신경안정제가 들어있고, 음악이 다운로드되어 있는 컴퓨터 등등…. 모든 신경을 분산 시 킬 수 있는 것들로 준비가 되어 있었다. 탑승시간이 다가오자, 머릿속으로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정신없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

앉지도 못하고 서 있지도 못한 채 게이트 끝과 끝을 수 없이 왕복해서 걸어 본다..


게이트 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들어가기 시작한다.

순간 머릿속으로 되네인다.

괜찮아 , 아무 일도 없을 거야!

이트를 통과하고 자리에 앉자마자 눈을 감았다. 그리고 남편의 손을 꽉 잡고 비행기가 이륙할 때까지 눈을 감은채 비행기가 이륙하기를 기다렸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무사히 약을 먹지도 않았고, 책도 읽지 않은 채 무사히 도착했다.



공황장애의 신기한 현상은 처음 한 번이 어렵지 같은 현상이 두 번째 반복될 때는 일상적인 생활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때의 기억으로 나는 오늘 한국 가는 길을 마음먹었는지도 모르지만, 문제는 그때는 국내선이고 지금 비행시간이 열여섯 시간에 육박하는 긴 장거리 노선이었다.

게다가, 가족들의 동행 없이 오로지 나 혼자만의 여행이라 불안감은 배로 늘어나는 상황이다. 어찌어찌해서 한국에 도착했어도 가장 나를 불안하게 했던 이유는 한국에 있는 동안 이동수단인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것이었다.




나는 오늘도 만반의 준비를 한다.

수면제와 신경안정제를 처방받아놓았다.

아들 내미의 친구 엄마인 티파니가 나의 생일날 내가 읽고 싶어 하던 한강 작가의 책을 선물로 가져왔다.

그 책을 받아 들고 나는 지금껏 읽지 않고 곳간에 숨겨놓은 곶감처럼 고이 아껴두고 있다. 드라마도 다운로드하여 놓고 음악도 셀폰에 저장해 놓았다.

만반의 준비를 해 놓았다.

남은 건 기도뿐이었다.

무사히 갈 수 있기를…

여행의 반은 준비할 때의 설렘….

나는 그 설렘에 두려움도 같이 섞어 넣어야 했다.

그러나 나는 또 한 번 도전해 보고 싶다. 두려움을 극복하고 설렘만 남은 여행을 위하여…

앞으로의 내 인생의 전환점이 되어 줄 한국행… 너무너무 가고 싶은데 너무 가기 싫은 아이러니!

서울 도성 성곽길을 꼭 걸어보고 싶은 나의 바람이 이루어지길 간절히 바라며 나는 공항에 도착했다.




평일 오후 남편과 아이들은 나를 위해 학교에서 바로 집으로 달려와 아빠와 함께 나의 불안감을 덜어주기 위해 공항을 함께 가 주었다. 평일 오후라 예상과는 달리 공항은 한적했고, 긴 기다림 없이 바로 수하물 처리가 되자마자 항공권 티켓이 나왔다.


미국의 가장 큰 허브 공항이라고 하기엔 너무나도 소박한 공항검색대를 지나자 아이들과 작별인사를 하고 나는 이제 혼자가 되었다. 두려움은 온전히 나의 몫이 되었다. 공항 검색대에 짐을 올려놓고 신발을 벗어 놓고 공항 검색대 안으로 들어서자, 무사히 통과되었다는 표시와 함께 나의 짐이 동시에 나오기 시작했다.


모두 것이 순조롭게 너무 , 평안하게 진행이 되어가고 있었다. 공항 검색대를 빠져나오자마자 게이트 번호를 검색해 보니 티르키에 항공은 공항 열차를 타지 않아도 될 정도로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기분이 좋다. 나의 불안감이 조금이라도 덜어줄 안전한 거리에 나의 목적지를 태우고 갈 게이트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안정이 되기에 충분하기 때문이다.

몇 시간이 일찍 도착한 덕에 게이트 주변 좌석이 텅 텅 비다시피 여유로웠고, 나를 태우고 갈 티르키에 행 비행기는 이미 게이트 밖에서 여유롭게 승객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참 이상하다.

나의 마음이 불안하기는커녕 몸이 기억하듯, 젊은 시절 여행을 할 때마다 느꼈던 그 익숙한 감정, 그 설렘이 다시 살아 내 온몸 안으로 들어왔다.

평화로움, 설렘, 어디론가 향한다는 그 자유로움… 분명 이 감정은 두려움이 배제된 단순한 설렘이다.


조용히 게이트 안의 빈 좌석을 찾아 앉았다.

더 이상 주변을 배회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불안하지도 않았다. 한편으론 당황스러웠다.

마치 거짓말쟁이가 된 것처럼 당혹스러웠다.

너무나도 아무렇지 않았다. 이래도 뒈나?

내가 정말 공황장애를 앓고 있었나?

나는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건가?


주변을 돌아보았다. 얼굴이 화끈거리기 시작했다. 거짓말을 하고 난 후 들킬 것이 걱정되어 주변 눈치를 살피는 어린아이처럼 주위를 두리번거려 보았다. 당연하지만 아무도 나의 상태를 모르는 일면식도 없는 그들의 시선은 나를 향해 있지 않았다. 아무도 나에게 시선을 주지 않았다.

아무도 나의 당혹감에 관심도 없었다. 당혹스러우면서도 이상한 승리감이 들었다. 앞으로의 여행도 아무렇지도 않을 것 같은 기대감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이 자유로움을 조용히 내뱉었다.

나는 지금 거대한 산을 넘어 새로운 자유를 향해 한 발작 내 디딘 것이다. 이 산을 성공적으로 넘어가면 이제 두려움이란 감정을 극복할 것이다. 내 맘속 동경과 자유를 향해 넘을 수 없을 것 같았던 암흑 같은 거대한 돌이 흔적 없이 치워질 것이다. 이 거대한 장애물이 사라지는 순간 나는 또 다른 경험하지 못했던 자유를 얻을 것이다.


게이트가 열리는 방송이 나가자 사람들이 모여들며 긴 줄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 수많은 군중 속에서 나만이 아는 승리의 쾌감을 느끼며, 조용하 게이트 밖을 빠져나가 무사히 비행기 안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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