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향
알 수 없는 미로로 연결되어, 좁은 골목을 굽이굽이 올라가야 집에 다다를 수 있는, 서울 한 복판에 있는 북아현동이다. 일명 굴레방다리라고 부르는 곳이었다.
지금은 아현동 가구거리로 더 잘 알려진 그곳에서, 나는 어린 시절부터 성인이 되고 난 후까지 거의 20년을 살았다.
내가 해외로 나가 살기 시작한 90년대 중반까지 자라고 살았던 내 젊음의 일부이자, 그 삶이 그대로 추억으로 남아있는 동네다.
외국살이를 하다 보면 이상하게도, 그 시절엔 으슥하고 낡아빠진 골목길이 싫증 나고, 야간자율학습을 마치고 늦은 밤 지친 몸을 이끌고 걸어 올라가다, 다리에 힘이 빠져 하루라도 빨리 벗어나고 싶은 날들이 허다했던 그 낡고 으슥한 골목길이 그렇게 그리울 수가 없었다. 드라마를 보다가도 익숙한 동네의 골목길이 보이면 나도 모르게 한국이 그리워지곤 했다.
지금은 세상이 좋아져서 먼 타국에서도 유튜브만 틀면 어릴 적 살았던 동네를 볼 수 있었다. 우연히 서울길을 걷는 유튜브 속에서 우리 동네가 나왔다. 골목 구석구석을 다니다가 어딘가 낯익은 집 한 채가 스쳐 지나갔다. 나도 모르게 깜짝 놀랐다. 그 집이 대문색 하나 변하지 않은 채 옛날 그대로 있었다. 그 동네에서 가장 잘 살던 차씨 삼 형제 집이었는데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세 형제가 다 그 시대와는 어울리지 않게 이국적이고 환하게 생겼었다.
가운데 둘째만 빼놓고..
동네 여자아이들은 모두 그중 첫째한테 마음을 두고 남몰래 좋아하고 있었다. 나도 그중의 하나인 여자아이었는데, 하필이면 둘째가 나를 좋아했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저 웃을 수 있는 얘기지만, 그 당시엔 화가 났었다.
왜 하필이면 너냐!!!
저녁이 되기 전까지 그 집 골목에 모여 이 얘기 저 얘기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그러다 해가 저물어 날이 어둑어둑 해지고, 각자의 집에서 밥 먹으라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면 모래알 훑어지듯이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다. 놀이라고는 고무줄 하나와 다섯 개의 공기알이 다인 고무줄놀이와 공기놀이 정도로 초라했지만, 어린 시절 순수함이 그대로 남아있던 시절이었다.
그 동네도 이젠 서울에서 아주 핫한 곳으로 개발이 되어 빈집만 가득한 채, 유령화가 되어 수십억 짜리 고급 아파트가 들어서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 돌아와서 이곳에 정착하려고 해도 미국에 달랑 하나 있는 집 한 채 팔아 가지고는 어림도 없는 소리다. 조만간 서울에서 웬만해선 들어갈 수 없는 비싼 동네가 되어 있을 것이다.
한국을 방문할 때마다 거의 잊지 않고 서울 나들이를 할 때 나는 꼭 이 동네를 들린다.
지하철을 타고 아현역에 내려 천천히 추억을 더듬으며 열여섯 살 청춘으로 돌아간다.
중학교 짝꿍 금심이네 빵집 거북당과 분식집 디제이 오빠를 보기 위해 자율학습시간에 불이 나게 달려갔던 먹심, 그곳엔 이미 번접하기 힘든 고층 아파트가 들어서 있었다.
뒷돌이가 살던 경희네 집도 그 당시 한옥이었던 집이 4층 짜리 연립주택이 되어 있었다.
추억을 하나하나 곱씹으며, 이곳저곳을 기웃기웃하다 배가 고프면 근처 자그마한 분식집에 들어갔다. 그 시절에 즐겨 먹던 떡볶이와 당면만 들어가 있는 야끼만두가 들어간 밀떡볶이에, 어묵국물을 먹기 위해 어묵을 시켰다. 그땐 떡볶이를 시키면, 어묵국물에 삼각으로 썰어진 어묵 조각을 동동 띄워 후추를 퍽퍽 뿌려서 썰은 대파와 함께 덤으로 주곤 했는데, 그것까지 바라기엔 세월이 너무 많이 흘렀다. 맛도 달라진 것은 나의 입맛 탓일까?
내가 다녔던 중고등학교도 몰라보게 달라졌다. 우선 교문부터 확 달라졌다. 교정이 다른 여학교에 비해 아름다운 곳이었다. 본관 건물 뒷마당에는 물레방아가 돌아가는 연못이 있고 , 산책할 수 있는 뒷동산도 있었다. 그 연못에 청소 시간에
그 옆에 심어져 있는 사과나무에 올라 사과를 따려다가 연못에 빠진 똘끼충만했던 정화..
10월의 마지막 날에 흩날리는 은행나무 잎들. 너무나 아름다운 운치를 선사했지만, 그 은행잎을 쓸어 담는 청소 담당이 되는 날엔, 은행나무 열매에서 나오는 악취로 인해 청소당번인 우리는 서로 도망가기 일쑤였다. 모두들 교문 밖 문방구로 몰래 빠져나와 못난이 만두와 꼬마김밥을 사 먹던 일도 생각이 났다.
한겨울에 석탄이 한가득 들어있는 난로 위에 도시락을 올려놓고 수업을 듣고 있는 순간, 펑 소리와 함께 난로 위의 뚜껑이 교실 위로 날아올랐다. 교실이 온통 김치찌개 냄새로 진동을 했다. 수정이의 도시락 반찬 통 안의 뚜껑이 김치찌개가 뜨거운 온도를 못 이기고 폭발해 버린 것이다.
선생님은 자신의 수업이 엉망이 된 것에 심기가 불편했고, 수정인 무안함과 당황함에 얼굴이 빨개졌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막을 수가 없었다. 수정이 엄마의 오이무침은 지금 생각해도 기가 막힌 맛이었다.
너무 많이 변해 버린 학교를 벗어나 이대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우리 시대 때 미팅이나 핫한 곳을 찾아다닐 때 이대는 가깝고도 신기한 곳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첫 미팅을 했을 당시, 이대 정문에서 멀지 않은 언덕길에 티티카카라는 카페가 있었다.
주선자인 보분이가 지각을 하는 바람에 기분이 상했지만, 그곳의 분위기는 그 언짢음을 잊고도 남을만했다.
추운 겨울 눈 오는 날, 남자친구와 랜덤으로 들어갔던 이대 정문 바로 옆에 있던 카페.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따뜻한 온기가 그날의 설렘과 함께 포근하게 아직까지도 기억에 남는 추억이 되었다.
지금은 너무나 아쉽게도 이대상권이 눈에 띄게 죽었지만, 그 당시엔 이대를 돌아다니는 사람 중에 이대학생만 없다고 했을 정도로 핫한 곳이었다. 이대학생들은 공부하느라고 정작 모두 도서관에 있다는 우스갯소리도 있었다.
우리는 버스로 두 정거장만 가면 되는 거리이기도 하고, 얼마든지 걸어갈 수 있는 거리라서 웬만한 유흥은 이곳에서 즐겼다. 성인이 된 후에는 그린 하우스 위층에 스잔나라는 곳에서 머리를 하고, 샤갈의 눈 내리는 밤 같은 카페 겸 경양식 집에서 돈가스 정식을 먹는 게 우리들의 루틴이었다.
돈가스 정식에 딸려 나오는 비엔나소시지 한 개와 김밥 한 조각도 특별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아파트 상가 안으로 들어갔다.
그 안은 상상도 못 했던 없는 것이 없는 그야말로 보물상자 같았다. 다양한 종류의 병원과 식당, 그리고 빵집과 카페 유명한 미용실까지 그냥 그런 동네의 수준이 아니었다.
그 안에 정말 세상이 필요한 모든 것이 다 들어가 있었다.
무엇보다도 상가 안 깊숙이 위치해 있는 마트에서는 청량리 시장보다 싼 가격에 신선한 모든 것이 있었다. 늘 장을 보던 청량리 시장을 가지 않고, 이곳에서 장을 보았다.
나를 더욱 놀라게 했던 것은 아파트와 바로 연결된 지하철 역이었다. 상가 안에 바로 연결된 통로를 지나니 바로 지하철 개찰구가 나왔다. 신세계였다.
그 아파트에서 자유롭게 지나가는 젊은 엄마들이 새삼 부러웠다. 시대가 다른, 같은 공간에서 느끼는 엄청난 변화에 격세지감을 느꼈다.
세상 너무 좋다!!
세상 편한 건 다 있는 내 나라.
이젠 오고 싶어도 , 다시 살고 싶어도 살기 힘든 동네가 되어 버렸다. 무거운 장바구니를 들고 바로 지하철을 타고 집에 갈 수 있는 거에 만족해야 했다.
내 나라 너무 좋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