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향
다음 주면 아버님이 돌아가신 지 일 년이 되는 날이다.
남편이 미우면 시댁의 시자도 밉다더니만, 아버님이 돌아가셨을 때, 나는 슬프지도 않았고 눈물 한 방울도 나지 않았다.
남편과 지독히도 싸워가며 오만정이 다 떨어진 채 남편으로서도, 애들 아빠로서도 신뢰를 잃고 회복이 불가능한 상태에서 지내고 있는 상황에 아버님이 돌아가셨단 소식이 들렸다. 어머님과는 거의 대화를 단절한 채 연락을 끊고 살았다.
얼마나 속을 썩였는지 지난 일 년에 대한 그 어떤 것도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그때의 기억을 달고는 도저히 맨 정신으로 살아갈 수가 없었다. 그 기억은 시부모님의 원망으로 돌아갔고, 아버님이 돌아가시고 난 또 일 년을 , 마치 나로 인해 일어난 일인 듯, 아버지에 대한 서러움을 나에게 다 쏟아내고 있었던 것이다. 정상적인 사람이 아닌 영혼이 가출한 사람 같았다. 나는 어머님을 원망했다. 자식을 어떻게 키웠으면 저렇게 망가질까?
내가 한국을 나오려고 결심을 한 것도 너무 견디기 힘든 그 상황을 벗어나고 싶은 이유도 한 몫했다.
시댁 시구 누구와도 접촉하지 않고, 내 마음속으로부터 단절시켰다.
그런데 마침 내가 나가는 시기와 아버님의 기일이 맞물렸다. 남편은 나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 강요하지도 않았다.
어머님은 아들 넷과 함께 한국을 같이 나가길 원했다. 어머니는 남에게 보이는 것을 중요시하는 형식에 얽매이고 사는 사람이었다.
두 아들은 이미 리타이어를 한 상태라 자유로운 몸이었지만, 셋째 아들은 아직 일을 하고 있었고, 남편 역시 일 년을 놀다 겨우 일을 잡아 나가고 있을 때라 자리를 비우기가 난감했다. 기어코 남편의 비행기표를 끊어 줄 테니 아버지의 기일에 참석하기를 무언의 강요로 요구하였다. 나는 한국에 가도 아버님의 기일에는 참석하지 않겠다고 하고 한국으로 나와버렸다.
시댁식구들이 속속 들어오기 시작했다. 남편 역시 내가 들어오고 난지 얼마되지 않아 한국엘 들어왔다. 나의 동정심에도 끝은 있었는지, 예전처럼 쉽지 않게 감정이 돌아서 지지가 않았다. 남편이 친정집에 도착하자마자 인사차 들렀다. 엄마는 한국에 들어온 이후, 줄곧 진주에는 내려가야 한다고 나를 설득하고 있었고, 남편 역시 내가 참석해 주길 바랐지만 강요는 하지 못했다.
미국서도 서로 좋지 않았던 남편이 내 눈앞에 있는 것도 기가차고 어이가 없었다.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가야 한다는 아버지의 말에 서서히 내 마음이 움직이고 있었다. 당연히 며느리 된 도리로 참석하는 게 옳다! 그러나, 시댁식구 누구한 사람 강요하지는 못했다.
남편과 진주에 도착하니 먼저 내려와 있던 두 시숙이 우리를 반겼다. 둘째 시숙은 우리 사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남강이 보이는 뷰가 좋은 곳에 숙소를 잡아 놨다고 선심 쓰듯 그곳으로 우리를 데리고 갔다.
우리가 숙소를 잡아야 했던 이유는 돌아가시기 전에 시원하게 집 한 채를 사기당해 평생 보금자리였던 집을 넘겨주고, 짐도 들어갈 수 없는 비좁은 오파스텔에서 아버님 혼자 기거하고 계셨기 때문에 머무를 수 있는 곳이 없었다.
우리들의 감정은 숨기고 시댁식구들과의 조우가 시작되었다.
이틀 간격으로 어머님을 비롯해 큰 시숙이 한국에 도착했다. 어머님과 큰 시숙은 아버님이 살던 오피스텔에서 지내고, 우리 내외와 두 시숙이 호텔에 머무르고 있었다. 둘째 형님이 어머님과 함께 밤늦게 진주로 내려왔다는 소식에 나는 어안이 벙벙했다.
"아직도 현역에서 일하는 며느리를.."
"형님이 오셨다고? 어떻게?"
나는 놀란 마음으로 몇 번을 물어보았다.
12시가 넘은 시간이라 다음날 인사를 하기로 마음먹고 잠자리에 들려는 순간,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문을 열어보니 형님이었다. 동서가 왔다고 해서 얼굴 보러 왔다고 했다. 팬데믹 전 라스베이거스에서 가족모임을 하고 난 이후로 6년 만에 만남이었다. 자세한 얘기는 다음날 하기로 하고, 짧은 인사를 뒤로 형님이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날이 밝자, 아침을 먹고 난 후, 어머님이 있는 곳으로 출발했다.
"형님, 일은 어떻게 하고 오셨어요?"
"형님이 꼭 와야 하는 거예요?"
"어머님이 그래도 이것저것 준비하려면 여자가 필요하다고 같이 가자고 그러시데.."
어머님의 이기심에 말문이 막혔다.
둘째 형님은 심성이 고운 사람이었다. 아마도 어머니에게 제일 만만한 며느리였을 것이다. 살면서 형님만큼 시기와 질투 그런 감정이 없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 결혼 당시 남편이 남편 복은 없을지 몰라도 형님들 복은 있을 거라고 했었다.
살면서 그 말은 틀리지 않았지만, 웃어야 될지 울어야 될지.
오피스텔에 도착하자마자, 어머니는 연락 한번 없던 막내며느리를 보자마자 너무 반가워하셨다.
마음속으로 당황했지만, 나 또한 아무렇지도 않게 어머니를 대했다. 서로의 속내는 아무도 몰랐지만.
제사에 필요한 음식과 다기들을 챙기고, 어머님은 칠순의 큰아들을 앞세우고 흰머리가 힐끗힐끗 난 네 아들에 둘러싸여 아버님이 계시는 선산으로 출발했다.
눈앞에 남해 바다가 펼쳐지는 양지바른 곳에 아버님이 누워계셨다. 사람의 일생이 허무했다.
결국, 저렇게 한 줌의 흙이 되어 말없이 누워 계시는 걸 보니 만감이 교차했다. 아직도 아버님의 방에는 생전에 쓰시던 셀폰과 돋보기안경이 그대로 놓여있었다. 그래도 천수를 누리고 가신 죽음이라 아버님을 바라보는 가족들도 편안해 보였다.
다만, 작년 초상에 아버님을 이곳으로 모실 당시, 어머님은 다리가 불편해 남편이 묻히는 걸 볼 수가 없었다. 가파른 산 위에 위치해 있던 산소라 먼발치에서 남편을 보내야 했다.
그게 걸렸는지 둘째 시숙이, 산소 아래에 마을에 살고 있는 친척에게 부탁을 해 경운기를 타고 왔다.
어머니를 태우고 산속까지 올라갔다. 일 년 만에 남편을 만난 것이다.
같이 늙어가는 네 아들이 아버님을 향해 절을 올리자, 새삼 어머님이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로 다른 형편의, 각자 다른 곳에서 살고 있는 네 아들들을 불러 모아 한자리에 모이게 한 저 힘은 무엇일까?
새삼, 어머님의 힘이 느껴졌다. 잠시 내 부모님과 오버랩이 되면서 쓸쓸한 마음이 들었다.
모든 의식이 끝나고, 다시 돌아와 오피스텔에 식구들이 다 모였다. 어머니가 조용히 나를 방으로 불러들였다. 봉투 하나를 내밀며 , 둘째 시숙이 와 줘서 고맙다고 나에게 전해 주라고 하셨단다.
둘째 아주버님은 남편에게 한국에 들어올 때도 처가에 빈 손으로 가지 말라고 남편에게도 거금을 주었다고 한다.
받지 않을 수가 없었다.
세상은 참 요지경이다.
못된 며느리는 고맙고, 착한 며느리는 당연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