쿰다⓵

순비기꽃에 피꽃이 피었다네

by 몽상가


KakaoTalk_20250902_141628366.jpg 광치기 해변


제주 성산 일출봉이 바로 눈앞에 펼쳐지는 광치기 해변, 터진목이라고도 불리는 바닷가는 썰물이면 거대한 암반이 드러나 황금빛을 발하며 너럭바위의 위용을 보여준다. 시야에 일출봉과 너럭바위와 보랏빛 꽃물결이 카메라의 한 컷처럼 잡힌다. 아름다움에 압도되어 얼어붙는다.

제주에 와 본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출봉을 알고 있다. 나 역시 일출봉에서 일출을 보기 위해 어두운 새벽길을 올라갔던 적이 있다. 일출봉을 정면으로 볼 수 있는 광치기 해변은 올레길 1코스 경유지이기도 해서 제주 올레길을 찾는 수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길이다. 이곳은 1948년 제주 4·3 사건 당시 성산읍 주민들이 집단학살당한 장소다.

그 길에 노벨상 수상자인 프랑스 작가 르 클레지오가 쓴 제주 4.3 기행문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르 클레지오는 “1948년 9월 25일 아침에 군인들이 성산포 사람들을 총살하기 위해 트럭에서 해변으로 내리게 했을 때 마을 사람들 눈앞에 보였던 게 이 바위(성산일출봉)다. 나는 그들이 이 순간에 느꼈을 것, 새벽의 노르스름한 빛이 하늘을 비추는 동안에 해안선에 우뚝 서 있는 바위의 친숙한 모습으로 향한 그들의 눈길을 상상할 수 있다”라고 썼다.


르 클레지오 기념비


르 클레지오가 2008년 9월 제주에서 4·3과 해녀, 돌하르방 등을 취재해 유럽 최대 잡지인 ‘GEO’ 창간 30주년 특별호(2009년 3월)에 게재한 기행문 중 4·3 관련 부분을 발췌해 불어와 한국어로 새겼다.

만약 르 클레지오가 유럽 유명 잡지에 제주 기행문을 게재하지 않았다면, 한국에서 벌어진 4.3에 대해서 알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국민 역시 일출봉과 아름다운 광치기 해변만 즐기다 올뿐, 일출봉을 바라보며 자신이 왜 죽는지 알지도 못한 채 피를 토하며 쓰러진 제주사람들이 집단 학살된 장소인지 몰랐을 것이다.

알아야 보이고 찾아가고 모색하게 될 터인데 모르고 있다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외국인이 4.3을 먼저 알아채고 그 흉흉한 학살의 터를 알렸다는 것에 부끄러움이 일지만 기념비로 인해 광치기 해변에서 벌어진 참극을 세상에 알릴 수 있음에 감사한 마음이 더 크다.




르 클레지오의 기념비가 없었을 때는 아무것도 없었다. 지금은 기념비와 30m 떨어진 곳에 제주 4.3 성산읍희생자위령비가 일출봉을 뒤로하고 세워져 있다. 1948년 9월 25일 , 성산면의 온평리, 난산리, 수산리, 고성리 등 4·3 당시 희생된 성산면 관내 주민 대부분이 이곳 터진목에서 희생됐다. 그들은 대부분 인근 지서에 끌려갔다가 성산포에 주둔하던 서청특별중대에 끌려오거나, 토벌대의 포위 습격에 걸려들어 서청특별중대에 끌려와서 고문 취조를 당하다 터진목에서 총살됐던 것이다.

그들은 왜 죽었나? 그들은 왜 죽였나?

서로 왜 죽는지 왜 죽이는지 모른 채 그렇게 무차별 학살이 이루어진 섬.

그 섬에 왔다. 그리고 외국인이 쓴 기념비를 통해 지독한 아픔을 느낀다. 동시에 미치도록 아름다운 풍경에 눈물이 난다. 어쩌라고 이렇게 아름다운 풍광이 펼쳐지는가! 어쩌자고 모래사장에 펼쳐진 보랏빛꽃은 황홀경에 이르게 하는가! 일출봉과 너럭바위의 황금빛에 어우러진 보라꽃의 군락은 아찔했다.


KakaoTalk_20250902_145342502.jpg 순비기꽃


보라꽃의 정체는 순비기꽃!

순비기나무를 제주에서는 '숨비기나무'라고도 하는데, 순비기나무의 뿌리가 모래땅속 깊이 뻗어나가는 특성이 해녀들의 숨비기와 비슷하다고 해서 그렇게 불린다고 한다.

'숨비 소리'는 해녀가 바닷속에 숨을 참고 들어갔다 나오면서 숨을 길게 내쉬는 소리를 뜻한다. 해녀들의 숨비 소리와 순비기나무, 나무라기보다는 모래사장에 뿌리를 내린 풀꽃 같은 느낌이 더 크지만, 보랏빛 꽃의 향연을 펼지는 순비기꽃에는 고아한 아름다움이 있다. 마치 제주사람을 닮은 듯 척박한 모래에 뿌리를 내리며 기어이 꽃대를 올리고 꽃을 피워낸다.

르 클레지오는 일출봉이 바라보이는 광치기 해변에서 무참한 학살의 장면을 새벽의 노르스름한 빛이 떠오르는 일출로 묘사했다. 그러나 집단 학살이 새벽에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일몰의 광치기 해변을 상상해 보라. 노을빛이 물든 일출봉과 펼쳐진 너럭바위의 황금빛은 더 강렬하게 꿈틀대며 모래사장을 잠식해 들어가 끝없이 펼쳐진 순비기꽃의 보랏빛과 만나 오묘한 빛으로 전환되었다. 그 순간 서청특별중대의 젊고 혈기왕성한 군인들의 총질이 시작되자 아비규환의 장이 되어버린 해변에 지천으로 피어있는 순비기꽃잎에, 꽃에, 피가 튀어 일몰에 비친 순비기꽃밭이 천상의 낙원과도 같은 황홀경을 보여주며 총질은 더욱 사나워지고 비명과 사방으로 튀긴 피는 일몰의 빛과 순비기꽃과 합일이 되어 군인들의 눈을 뒤집어놓았고 집단 광기에 이르렀다고 한다.

숨 막히는 아름다움과 황홀경 상태, 광치기 해변은 그런 곳이다. 그렇게 아름다운 풍광 속에서 4.3이 있었고 이제는 그 아름다운 풍광 속에 르 클레지오의 기념비와 제주 4.3 성산읍희생자위령비가 뿌리를 내리고 서있다.




순비기꽃이 펼쳐진 모래사장 뒤로 드러난 너럭바위 위를 젊은 서양여자가 걷고 있다. 그냥 어슬렁거리는 것이 아니라 한 걸음 한 걸음마다 바위를 눌러 밟으며 음미하듯 걷는 모습이다. 마치 의식을 치르는 사람처럼 보였다. 외국의 작가가 4.3에 대한 문장을 써놓은 기념비를 뒤로 하고 젊은 서양 여자가 집단 살육의 현장을 걷고 있는 모습이 순비기꽃과 겹쳐졌다. 분명 그녀는 4.3에 대해서 알고 직접 자신의 발로 현장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한여름 낮의 작열하는 태양 아래 타국의 아픈 역사를 직접 발로 밟으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작열하는 태양 아래 의식을 치르듯 한 걸음마다 너럭바위 위를 걷는 서양 여자처럼 우리도 4.3을 제대로 쿰어내어야 한다. 보랏빛 물결로 출렁이는 순비기꽃은 1948년 4.3을 지켜보며 천지에 피칠갑이 되었던 꽃대와 꽃을 쿰어내면서 2025년에도 군락을 이루었다. 뜨거운 태양 아래 모래 깊숙이 뿌리를 내리며 품어낸 시간만큼 꽃이 피었는가? 기억하고 품어낸 시간. 잊지 않고 기억하는 자와 기억하지 않는 자의 삶의 태도는 다를 것이다. 잊지 않고 기억하고 품어내는 것이 산자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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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쿰다'는 제주도 방언으로 '품다'는 뜻이다. 4.3을 견뎌내고 살아남은 제주 사람들은 '쿰의 정신'을 계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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