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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장. 질투를 안고 살아간다는 것

감정의 수용과 인간다움의 회복

by 심리한스푼

1. 나는 여전히 밴댕이 소갈딱지다

책의 마지막 장까지 왔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여전히 밴댕이 소갈딱지다.


친구가 ‘요즘 우리 회사 상장 준비 중이야’라고 말할 때면,
내 안의 편도체가 가장 먼저 반응한다.
또 전 연인의 결혼 소식이 멀리서 들려올 때면,
왠지 모르게 날씨가 갑자기 흐려지는 기분이 든다.


seok2362_1391438163.jpg 밴댕이 사진(작가 아님)


나는 이 책을 쓰며 질투의 구조를 해부했고,
그 감정이 불안과 욕망의 언어라는 걸 수없이 설명했지만,
결국 인간이라는 존재는 이론으로만 살 수 없는 것 같다.


그래서 이제는 그냥 인정하려 한다.

나는 질투한다.
그리고 그게 나다.


다만 예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이제 그 마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20200521130943.1049686.jpg * 정신승리 맞습니다.



2. 감정은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변할 뿐이다

심리학적으로 감정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변하는 것’이다.
억눌린 감정은 사라지지 않고, 다른 형태로 돌아온다.
질투를 억누르면 냉소가 되고,
열등감을 무시하면 무기력이 된다.


그래서 감정의 목표는 ‘제거’가 아니라 ‘소화’다.
마치 위장이 음식을 완전히 없애는 게 아니라,
그걸 나의 일부로 바꾸는 것처럼 말이다.


나는 이제야 조금 알겠다.
감정의 성숙은 통제가 아니라 소화의 기술이라는 걸.
질투든 불안이든, 그것을 제대로 씹어 삼키지 않으면
그 감정은 소화불량처럼 마음을 아프게 만든다.



3. 감정을 품는다는 건, 나를 이해하는 일이다

우리는 종종 ‘감정을 잘 다스리는 사람’을 이상화한다.
늘 평정심 있고, 흔들리지 않고, 쿨한 사람.
하지만 그런 사람은 실은 ‘감정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
감정을 감추는 법을 배운 사람일지도 모른다.


진짜 성숙은 감정을 느끼지 않는 게 아니라,
감정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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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투는 여전히 불편하고,
불안은 여전히 나를 흔들지만,
그 감정들 덕분에 나는 여전히 ‘살아 있다’는 걸 느낀다.
감정이 있다는 건, 여전히 움직이고 있다는 뜻이니까.



4. 융의 말처럼, 그림자를 품을 때 비로소 온전해진다

융은 인간의 성장 과정을,

“자신의 빛과 그림자를 통합하는 일”이라 했다.
빛은 우리가 좋아하는 모습은 자신감, 따뜻함, 성취 같은 것들이다.
그림자는 질투, 두려움, 불안, 열등감, 그리고 인정받고 싶은 마음과 같은

그 반대에 있는 성질이다.


우리는 늘 빛만 보이려 한다.
하지만 융은 이렇게 말했다.

“자신의 그림자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그 그림자에 지배당한다.”


감정을 부정하는 순간, 그 감정은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무의식 속에서 형태를 바꿔 다시 올라온다.
질투를 부정하는 사람은, 결국 더 깊은 비교에 빠진다.


카를 융.jpg 카를 융


융이 말한 개성화(individuation)
이 빛과 그림자를 하나로 통합하는 과정이다.
좋은 나와 나쁜 나를 분리하지 않고,
그 모든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일이다.


그는 인간이 이렇게 자신의 무의식적 감정까지 끌어안아야
비로소 자아(ego)의 단계에서,

자기(Self)의 단계로 나아간다고 했다.


즉, 완벽해지려는 게 아니라

“불완전한 나를 통합하는 것”이 진짜 성숙이다.


결국 감정을 통제하려는 시도보다
감정을 이해하려는 용기가 더 큰 힘을 만든다.
우리가 질투를 포함한 불편한 감정을 숨기지 않고 바라볼 때,
그때 비로소 ‘전체적인 인간’으로 가까워진다.



5. 열등감과 질투: 나를 향한 감정의 순환

질투는 타인을 향하지만,
열등감은 나 자신을 향한다.
둘은 마치 한 강의 상류와 하류 같다.
질투가 “왜 저 사람은 저렇게 잘될까?”라면,
열등감은 “나는 왜 저렇게 하지 못할까?”다.


하지만 그 둘은 결국 같은 물줄기를 흘러간다.
질투가 나를 타인에게 잃게 만든다면,
열등감은 나를 나에게 되돌려놓는다.


이제 나는 안다.
열등감은 결함이 아니라 성장의 신호라는 걸.
질투가 불편하게 마음을 흔드는 순간,
그건 내 안의 가능성이 아직 살아 있다는 증거다.



6. 감정을 이해할 때, 인간다움이 회복된다

감정은 인간의 결함이 아니다.
감정이 있다는 건, 인간이라는 뜻이다.
우리가 질투하고 불안해하고 열등감을 느낄 때,
그건 잘못된 게 아니라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다.


나는 이제 더 이상 ‘쿨한 인간’이 되고 싶지 않다.
대신 ‘따뜻한 인간’으로 남고 싶다.

생각해보니, 애초에 쿨하지도 않았다 ㅎ

질투를 느끼면서도 타인의 행복을 축복할 수 있고,
열등감을 느끼면서도 나를 조금씩 믿어줄 수 있는 사람.


그게 아마 감정의 완성형 인간,
즉 융이 말한 “통합된 인간”의 모습일 것이다.



7. 나가아며: 인간다움이란 질투마저 품고 살아가는 것

질투는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그 모양이 변한다.


예전에는 친구의 성공을 볼 때마다
‘나보다 잘나서’ 화가 났다면,
이제는 ‘나도 저렇게 성장하고 싶다’로 바뀐다.


그건 감정이 사라진 게 아니라,
감정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한 것이다.


질투는 이제 더 이상 부끄러운 감정이 아니다.
그건 여전히 살아 있고, 여전히 사랑하고,
여전히 성장하고 싶은 마음의 또 다른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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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제 안다.
질투는 미성숙해서 느끼는 감정이 아니라,
인간이라서 느끼는 감정이다.


감정의 완성은 통제가 아니라 수용이다.
우리가 질투를 부끄러워하지 않고,
그 속에서 자신을 이해하려 할 때 —
비로소 인간다움이 완성된다.


우리는 모두 조금씩 불완전한 마음으로 살아간다.
그리고 그 불완전함에 대한 수용이야 말로

스스로를 이해하게 만드는,

나아가 나와 함께 살아가도록 만드는 삶의 지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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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줄 요약

“질투는 인간이 미성숙해서 느끼는 감정이 아니라,
인간이라서 느끼는 감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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