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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심리칼럼

시간이라는 발효의 기술

아직 덜 익은 우리에게: “성숙은 결심이 아니라, 숙성의 결과다.”

by 심리한스푼

1. 글쓰기를 미루던 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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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겐 오랫동안,

‘하고 싶지만 안 하는 일’이 있었다.
바로 글쓰기였다.


심리학을 배우던 대학원 시절부터,

‘언젠가는 나도 글을 써야지’라는 막연한 욕망이 있었지만

막상 앉으면 글 대신 커피만 썻다.


대신 나는 말로는 참 잘했다.

독서모임에서 토론을 하면,

누군가가 “00씨는 말을 정말 잘하는 것 같아요"라고 말하곤 했다.
그 말은 나를 으쓱하게 만들었지만

동시에 내 안의 글쓰고 싶은 마음은 살짝 움츠러들었다.


“나는 글보다 말에 강한 사람이야.”

돌이켜보면 그건 자기합리화였고,

동시에 내 안의 미숙함을 지키기 위한 방패였다.



2. 성숙에는 ‘시간의 발효’가 필요하다

나는 일을 시작하기까지 오래 걸린다.
결정을 내리는 데도 시간, 결심하는 데도 시간,

그리고 행동하기 전까지는 거의 한 계절이 지나간다.


한때는 그 느림이 나의 결함이라 생각했다.

세상은 “일단 저지르고 보라”고 외치는데,

나는 늘 마음속에서 ‘숙성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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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나이가 조금 들고 나서야 알게 됐다.

어떤 사람은 인스턴트커피처럼 바로 타서 마실 수 있지만,

어떤 사람은 드립커피처럼 천천히 내려야 제맛이 나는 존재라는 걸.


심리학자 한스 아이젠크(Eysenck)는 인간의 기질적 차이를 설명하며,

행동의 속도나 결단력 또한 ‘성격의 고유한 리듬’이라고 말했다.

즉, ‘빠름’이 능력이 아니라, ‘나에게 맞는 속도’가 있다는 뜻이다.


나의 속도는 느렸다.

그러나 그것은 게으름이 아니라 사유가 발효되는 속도였다.



3. 우리는 왜 ‘알면서도 행동하지 못할까?’

행동심리학에서는 이를 '의도-행동 간의 간극(intent-behavior gap)'이라고 부른다.
우리는 목표를 세우고도, 실행하지 못한다.
이를 설명하는 개념 중 하나가 앨버트 반두라의 ‘자기효능감(self-efficacy)’이다.

그는 자기효능감을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자신이 어떤 행동을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다는 믿음”


이를 나의 관점으로 재해석하자면,

이 믿음이 단순한 ‘자신감’이 아니라

내적 시간에 대한 신뢰이다.


“나는 아직 덜 익었지만, 언젠가 익을 거야.”

이 믿음이 있어야 비로소,

우리는 조급함 대신 기다림을 선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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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현대 사회가 이 기다림을 죄악시한다는 것이다.

“지금 당장 실천해라”,
“실행이 곧 답이다”

라는 구호가 넘쳐난다.


물론 맞는 말이다.

실천은 성장을 위한 필요조건이다.

하지만 내면의 사고가 아직 발효되지 않은 상태에서

억지로 행동하면 그 행동은 오래가지 않는다.
결심은 했는데,

다음 날이면 시들어버리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어쩌면 작심삼일이란,

경쟁하라는 사회의 끊임없는 압박속에서

충분한 숙성의 시간을 가지기 위한

우리 내면의 무의식적 저항일 수도 있다.


4. 나를 길러낸 것은, 생각보다 ‘시간’이었다

나는 글쓰기를 미뤘다.

하지만 그 미룸 속에서 생각이 자라고 있었다.
대학원에서, 독서모임에서, 삶의 대화 속에서

나는 조금씩 ‘말로 쓰는 글’을 연습하고 있었다.
다만 아직 잉크로 옮길 준비가 덜 됐을 뿐이다.


그러던 어느 날, 세 가지 사건이 겹쳤다.

브런치 공모전의 공지

공부하기 싫었던 날의 권태

유튜버 궤도의 강연에서 들은 “지금 당장 실천하라”는 말


이 세 가지가 절묘하게 한순간에 연결되며,

나는 드디어 키보드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그날은 마치 오랫동안 밀봉해둔 와인을 처음 개봉한 순간 같았다.

숙성된 나의 생각이,

‘이제 나갈 때가 됐다’며 스스로 문을 열고 나온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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융(C.G. Jung)은 이를 개성화(individuation)라고 불렀다.
그는 인간이 자기 자신이 되어가는 과정은 “의식이 무의식과 화해하는 시간”이라고 했다.
즉, 우리가 ‘행동으로 나아가는 순간’은 단순한 결심의 결과가 아니라,
의식이 무의식과 충분히 대화한 뒤 맺는 합의의 시점이다.

나는 바로 그 합의의 순간을 맞이한 것이다.



5. 느림은 결핍이 아니라, 나의 리듬이다

나는 결심이 느리지만, 한 번 시작하면 끝을 본다.
그건 내 안의 ‘발효적 추진력’ 때문이다.
숙성 기간이 길수록, 몰입은 깊어진다.


이건 단순한 성격이 아니라 기질의 리듬이다.
어떤 사람은 외부 자극에 빨리 반응하지만 쉽게 식고,
어떤 사람은 내부 리듬이 느리지만 한 번 불이 붙으면 오래 간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자극 민감도(activation level)라고 부른다.


즉, 나는 고온 발효형 인간이 아니라, 저온 숙성형 인간이었다.
시간이 걸리지만, 한번 익으면 오래 간다.


51678_8482_113.jpg 와인을 숙성하는 오크통


결국 한달이라는 기간을 몰입하여.

브런치 공모전에 글을 올렸고, 3권의 책을 완성했다.

물론 과정은 만만치 않았다.

일하면서 글을 쓰느라 구내염이 입안에서 불을 질렀고,
잠을 줄여가며 원고를 다듬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시간은 괴로우면서도 즐거웠다.
‘몰입’이라는 단어가 이런 것이구나 싶었다.
글을 완성했을 때 느꼈던 허무감은,

사실 새로운 세계가 닫히는 아쉬움이었다.
숙성이 끝나버린 발효통을 닫는 느낌이랄까.


그때 깨달았다.

우리는 완성의 순간을 좋아하지만,
사실 우리를 길러내는 건
숙성의 과정이라는 걸.



6. 성숙은 결단의 문제가 아니라, 시간과의 협업이다

결국 인생에서 ‘성숙’이란,

마음속의 생각과 현실의 행동이 서로의 속도를 맞춰가는 과정이다.
너무 빨라도, 너무 느려도 안 된다.
중요한 건 ‘지금 이 느림에도 이유가 있다’는 걸 아는 것이다.


시간이 나를 길러주고 있다는 믿음,
지금의 나도 진행형이라는 수용,
그것이 성숙의 첫걸음이다.


그러니 오늘도 행동하지 못한 자신을 너무 탓하지 말자.
당신은 게으른 게 아니라, 아직 덜 익었을 뿐이다.
그리고 어쩌면, 가장 좋은 순간에 완벽하게 익을 것이다.




한줄요약

"때로 느림은 게으름이 아닌,
아직 도착하지 않은 통찰의 속도를 의미한다."
"기다림을 아는 사람은,
결국 자기만의 리듬과 향으로 익어갈 것이다."










"추신(追伸): 작가는 성숙한 인간보다는,
게으른 '미룬이'에 가깝습니다."
maxresdefault.jpg 샤랏투 이제규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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