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화가 남긴 감정의 역설
나의 첫 작품인, 『심리학, 뒤집어 읽기』를 집필하며
나는 한 가지 질문에 오래 머물렀다.
“왜 불안이 깊어질수록 사람은 점점 우울해지는 걸까?”
해당 질문에 오래 머무른 이유는 단순 호기심이 아니었다.
나 역시 불안이 우울로 전이된 경험이 있었고,
이에 인생 경영에 꽤나 고생했기 때문이다.
위의 질문은 학문적 호기심이자,
작가 본인의 자기탐색이었던 것이다.
앞서 뇌과학적인 관점에서 그 이유를 탐색했다.
불안이란 뇌가 ‘경계 상태’에 들어가는 것이고,
우울은 그 경계의 에너지가 소진되며 나타나는 ‘기능 저하’ 상태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즉, 뇌의 과잉각성이 신경 피로를 초래하고, 결국 저활성 상태로 전환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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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글을 쓰고 난 후에도 의문은 남았다.
“그렇다면 왜 인간의 뇌는 이런 식으로 작동하도록 진화했을까?”
불안이 단지 ‘나쁜 감정’이라면, 왜 사라지지 않고 지금까지 이어져 왔을까?
이번 글에서는 그 질문의 실마리를,
뇌과학이 아닌 진화심리학적 관점에서 탐색해보려 한다.
불안은 처음엔 생존을 위한 반응이었다.
위험에 대비하기 위해 몸을 긴장시키고,
뇌를 각성 상태로 유지시킨다.
이때 활성화되는 것이 바로 HPA축(시상하부–뇌하수체–부신 축)이다.
이 축이 작동하면 코르티솔이 분비되어,
단기적으로는 집중력과 에너지를 높인다.
그러나 이 각성 상태가 오래 지속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코르티솔이 과다하게 분비되어 해마(Hippocampus)를 손상시키고,
기억력과 감정조절력이 떨어진다.
결국 뇌는 과열된 상태를 견디지 못해 스스로의 스위치를 내린다.
즉, 불안 → 과잉각성 → 신경 피로 → 우울의 순환이 완성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때 이렇게 말한다.
“요즘은 걱정할 힘조차 없어요.”
“이젠 그냥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아요.”
그것은 감정이 사라진 게 아니라,
뇌가 생존을 위해 ‘잠시 멈춤’을 선택한 상태다.
그렇다면 진화적으로 이런 회로가 왜 필요했을까?
인간의 조상에게 불안은 생존 그 자체였다.
포식자나 기근, 낯선 부족의 위협에 직면했을 때,
가장 먼저 반응한 감정이 바로 불안이었다.
불안은 단순한 ‘걱정’이 아니라 위험 탐지 시스템이었다.
조금이라도 이상한 소리가 들리면 긴장하고,
상황을 분석하며, 도망칠 준비를 하는 것.
이 반응은 생존에 유리했기 때문에,
자연선택을 통해 뇌의 구조 속에 각인되었다.
문제는 위협이 ‘끝나지 않을 때’였다.
포식자가 늘 근처에 있고, 기근이 몇 달씩 이어진다면
계속 각성 상태를 유지하는 것은 오히려 소모적이다.
이때 뇌는 다른 전략을 쓴다.
‘계속 싸우기보다, 잠시 멈추자.’
즉, 활동을 최소화하고 에너지를 보존하는 방향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울의 진화적 기원이다.
우울은 생존을 포기하는 감정이 아니라,
‘지속적 위협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절전 모드’였던 셈이다.
현대에선 ‘무기력’을 부정적으로 보지만,
진화의 관점에서 보면 그것은 ‘생존을 위한 회복기제’였다.
뇌는 과잉 자극 상태를 오래 유지하면 스스로 기능을 줄인다.
이로써 신체는 에너지를 아끼고, 손상을 최소화한다.
즉, 우울은 에너지 절약형 생존 전략이다.
만성 위협이 끝나지 않는 상황에서,
‘멈춤’은 도망보다 현명한 선택이었을 수 있다.
진화적으로 뇌는 ‘가변성’을 통해 생존해왔다.
위협이 사라지면 다시 평온한 상태로 복귀해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위협이 장기화되면 회로는 피로해지고,
결국 ‘저활성화 모드’로 고정된다.
즉, 과잉활동 → 손상 → 저활동 전환이라는 흐름은
단지 병리적 현상이 아니라, 진화적으로 학습된 패턴이다.
문제는 지금의 세상이 ‘지속적 위협’을 멈추지 않는다는 점이다.
우리는 더 이상 맹수에게 쫓기지 않지만,
그 대신 ‘평가’, ‘비교’, ‘성과’라는 이름의 포식자에 둘러싸여 있다.
뇌는 여전히 같은 방식으로 반응한다.
SNS의 알림, 상사의 한마디, 친구의 근황 게시물,
면접관의 표정 하나가 편도체에는 “생존의 위협”으로 해석된다.
우리의 뇌는 아직도 원시시대의 알람 시스템을 품고 있지만,
그 경보음은 이제 매일같이 울려댄다.
결국 우리는 늘 긴장 속에 산다.
자기 전에 이메일을 확인하고,
출근길에 비교되는 타인의 삶을 스크롤하며,
작은 실수에도 가슴이 쿵 내려앉는다.
그리고 어느 날, 뇌는 속삭인다.
“이제 그만하자.”
그 순간 찾아오는 것이 바로 우울이다.
과열된 엔진이 멈추듯, 뇌는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과부하를 차단하고 감정을 ‘끄는’ 방향으로 전환한다.
우울은 단순한 슬픔이 아니라,
지속된 경계 속에서 무너진 뇌의 ‘절전 모드’다.
불안과 우울은 사실 적의가 아닌, 같은 뿌리를 가진 형제다.
하나는 싸우기 위한 에너지이고,
다른 하나는 버티기 위한 휴식이다.
문제는 현대의 뇌가,
이 고대의 생존 알고리즘을
지속적으로 오작동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수백만 년 전, 불안은 생존을 보장했지만
지금의 불안은 존재의 방향을 잃은 생존 본능으로 남았다.
이 생존 회로가 멈추지 않을 때,
우리는 결국 ‘생명 유지 모드’로 들어가며,
그 결과로 우울이 찾아온다.
불안이 우울로 이어지는 것은,
결코 나약함이 아니라 진화의 흔적이다.
당신의 뇌는 여전히,
“살아남기 위해” 그렇게 반응하고 있을 뿐이다.
우울은 게으름이 아니다.
그건 감정의 감기다.
눈에 보이지 않을 뿐, 분명한 병이다.
당신이 불안과 우울 사이를 오가는 이유는
의지의 부족이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생리적 반응 때문이다.
그렇기에 스스로를 질책하기보다,
환자를 돌보듯 다정하게 대해야 한다.
이를 심리학적 용어로 자기자비라 한다.
자기자비란 고통스러운 상황에 대해
자신을 비난하는 대신, 너그럽게 이해하고 돌보는 태도를 의미한다.
스스로에게 관대한 태도가 우울을 치료하기 위한
가장 근본적인 전제조건인 것이다.
우리는 아픈 가족을 보면 우리는 연민을 느끼지만,
정작 아픈 ‘나’에게는 엄격하다.
우울이라는 마음의 병에 걸린 자신을 보고
'나는 왜이렇게 나약하지',
'나는 형편없는 인간이야'
와 같은 비난을 내뱉는 것이다.
그러나 마음이 병든 자신에게 필요한 것은
비판이 아니라 돌봄이다.
마음이 돌봄을 통해 충분히 회복하고 치유되어야,
비로소 상처가 아물고 건강한 마음이 자라날 수 있는 것이다.
우울을 병으로 인식하는 순간,
비로소 회복이 가능해진다.
그것은 나약함의 인정이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자연스러운 회복 반응을 받아들이는 일이다.
불안과 우울의 메커니즘을 이해한다는 것은
단순히 감정을 분석하는 일이 아니다.
그건 자기 삶의 ‘운영 체계’를 이해하는 일이다.
우리가 느끼는 모든 정서는 뇌의 반응이자, 삶의 신호다.
이 신호를 읽을 줄 아는 사람은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감정을 자원으로 바꾼다.
이해는 곧 통제력을 준다.
불안이 찾아올 때
‘내 뇌가 지금 생존 모드에 들어갔구나’를 인식하는 것만으로도,
삶의 생산성과 만족감은 전혀 다른 결을 가진다.
이것이 감정 이해의 진짜 효용이다.
하지만 잊지 말자.
이 모든 이해 이전에 필요한 것은 자기자비이다.
자신에 대한 적절한 관용적 태도는
마음의 병을 치유하고 회복한다.
마음은 다그친다고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면밀하게 들여다 봐주고 돌봐주어야 움직인다.
그리고 이러한 자신에 대한 돌봄 속에서
삶을 더욱 능동적이고 생산적으로 만드는 것이다.
불안과 우울은 게으름의 징후가 아니라,
너무 오래 깨어 있었던 마음이 잠시 쉬자는 신호일지도 모른다.
그럴 땐 스스로를 환자처럼 대해야 한다.
채찍이 아닌 이불을, 질책이 아닌 온기를 건네야 한다.
우리의 감정은 적이 아니다.
그것은 진화가 남긴 오래된 나침반이다.
때로 그 바늘이 흔들리더라도,
그 속을 들여다보는 일이야말로 인간으로 산다는 것의 의미다.
불안이 우울로 바뀌는 순간은,
뇌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불을 잠시 끄는 시간이다.
그것은 나약함이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오래된 생존의 기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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