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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 사랑과 비교 사이, ‘가족’이라는 이름의 질투

가족이라는 거울

by 심리한스푼

1. 명절의 상 위에서 피어나는 조용한 비교

나는 외할머니 손에서 자랐다.
할머니는 나를 누구보다 아끼셨고,

세상 그 어떤 사람보다 내 편이었다.
그런데 사랑과 비교를 구분하지 못하는 세대였다.


“옆집 OO이는 공부 열심히 하더니 서울대 갔다더라.”
“OO이 형은 이번에 모의고사 1000등 안에 들었다네.”

그 말들은 꾸지람도, 질책도 아니었다.
그저 격려의 방언이었다.

다만, 할머니의 격려에 손자가 긁혔을 뿐이다.


악의가 없는걸 알아도 묘하게 속상하다.


할머니의 세대에게 ‘비교’는 사랑의 또 다른 언어였다.
“너도 잘됐으면 좋겠다”를 직접 말하지 못하던 시대의
우회적인 애정 표현 방식이었던 것이다.


나는 그걸 몰랐다.
어린 나는 그 말을 들을 때마다 괜히 수저를 뒤적였다.
“그래, 나도 열심히 해야지.”
입으로는 그렇게 말했지만,

밥 한 숟갈 삼킬 때마다 마음이 조금 작아졌다.



2. 사랑의 언어는 세대를 건너면서 변한다

돌이켜보면, 그건 악의가 아니었다.
할머니는 나를 사랑했기 때문에 비교했다.
그 세대는 사랑을 ‘성과를 통해 증명하는 시대’를 살아냈으니까.
공부를 잘해야 밥을 먹고, 일찍 자리 잡아야 존중받는 구조 속에서
사랑과 성공은 거의 같은 뜻이었다.


그래서 “옆집 손자는 서울대 갔다더라”는 말은
“너도 잘했으면 좋겠다”와 거의 동의어였다.


문제는, 나는 그 뜻을 몰랐다는 거다.
어린 나는 그 말이 사랑의 언어가 아니라
‘비교의 저울’로 들렸다.



나는 사랑받고 싶었는데,

늘 성취로 증명해야 할 것 같았다.

(심지어 증명을 잘 하지도 못했었다.)


사랑은 조건 없는 줄 알았는데,
할머니의 말은 늘 ‘조금 더 잘해야’ 닿는 것 같았다.



3. 사촌들의 반짝이는 근황, 그리고 내 안의 쓴웃음

외가 쪽 명절은 늘 북적였다.
큰 상 세 개를 붙여서 6~8명이 둘러앉아 밥을 먹으면
그건 거의 작은 축제였다.
문제는, 그 축제의 하이라이트가 늘 ‘근황 비교’였다는 점이다.


“OO이 형은 요즘 병원 다닌다더라.”
“OO이 누나는 이제 서울에서 유명한 연구소에 다닌다지.”
그 대화들이 오고 가는 동안,
나는 괜히 물컵을 들고 자리에 한 번씩 일어났다.
“물 좀 더 가져올게요.”
그게 내 생존 방식이었다.


사촌들의 잘남앞에 짜부된 작가양반


사촌들은 잘난 티를 내지 않았다.
오히려 늘 겸손했고, 먼저 안부를 물어왔다.
그게 더 곤란했다.
겸손은 최고의 잔인함일 때가 있다.

그들의 조심스러운 미소가 내 마음을 부드럽게 눌렀다.


그날 밤, 나는 스스로를 위로했다.
‘그래, 세상엔 각자 타이밍이 있는 거야.’
하지만 그 말은 늘 반 박자 늦었다.



4. 가족이라는 가장 가까운 거울

가족은 내게 사랑의 첫 교사이자, 비교의 첫 현장이었다.
우리는 그들과 DNA를 나눴지만,
동시에 서로를 끝없이 평가하는 존재로 살아간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가족 내 사회비교(familial social comparison)라고 부른다.

우리는 자신을 판단할 때,
사회 전체보다 오히려 가족을 무의식적 기준점(reference point)으로 삼는다.


사촌이 좋은 대학에 갔다면,
나는 그 성취를 축하하기보다
‘내가 그 자리에 있을 수도 있었던 가능성’을 떠올린다.
이건 질투라기보다, 존재의 재점검이다.


사람의 뇌는 본능적으로
‘나와 가까운 집단 내에서의 위치’를 감지하려는 습성을 가지고 있다.
즉, 가족의 성공은 나의 자리를 새로 계산하게 만든다.


“우린 같은 집안인데, 나는 지금 어디쯤일까.”
그 질문이, 명절의 따뜻한 소리들 사이에서
묘하게 떠다녔다.



5. 사랑과 비교가 충돌할 때

가족은 나를 사랑한다.
그러나 그 사랑은 종종 나의 불안을 건드린다.
사랑과 비교가 동시에 작동할 때,
인간의 마음은 복잡한 회로를 돌기 시작한다.


심리학적으로 보면,
이건 단순한 열등감이 아니라 ‘소속 내 위치 상실감(loss of place within belonging)’이다.

사랑의 울타리 안에서,
내가 차지한 자리가 살짝 흔들릴 때 생기는 불안이다.


가족의 성취는 내 일부가 성장한 것처럼 느껴져야 하는데,
현실의 나는 아직 거기 닿지 못했을 때
이상하게도 ‘내 몫의 빛’을 잃어버린 듯한 착각에 빠진다

.

이 감정은 미성숙의 산물이 아니다.
오히려 애정이 깊을수록, 이런 감정은 더 자주 찾아온다.
가족은 나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6. 애착의 관점에서 본 가족 질투의 정체

애착이론의 시선으로 보면,
가족에게 느끼는 질투는 결국 사랑을 잃을까 봐 느끼는 불안이다.
어릴 적 우리는 가족을 통해
“나는 사랑받을 자격이 있다”는 감각을 배운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 사랑의 초점이 나에서 다른 누군가로 옮겨간 것처럼 느껴질 때,
마음은 순간적으로 흔들린다.


“부모의 자랑은 내 몫이 아니구나.”
시무룩해진 작가


그 생각이 남긴 잔상은 꽤 오래 간다.
성인이 된 지금도,
명절 밥상 앞에서 그 감정이 아주 살짝 다시 깨어난다.



7. 어른이 된 나, 그리고 여전히 묘한 명절

지금의 나는 상담심리를 공부하고, 사람의 마음을 탐구하며 산다.
덕분에 이제 안다.
그때 느꼈던 감정은 유치하거나 부끄러운 게 아니었다.
그건 아주 인간적인 감정이었다.


질투는 사랑과 인정 욕구가 교차하는 지점에서 피어나는
가장 복잡하고 솔직한 감정이다.


그렇다고 명절이 완전히 편해진 건 아니다.
지금도 가끔은 외할머니의 “요즘은 어떤 일 하니?”라는 질문이
심박수를 살짝 높인다.
나는 웃으며 답한다.
“나도 나름 잘 살고 있어요, 할머니.”
그러면 할머니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씀하신다.
“그래, 그래. 옆집 손자도 요즘 잘 나가더라.”


나는 웃는다.
그 말이 이제는 미워 보이지 않는다.
(아니, 사실은 가끔 밉다 ㅋ)

그건 여전히 사랑의 또 다른 형태니까.



8. 여전히 조금 작아지는 순간들

이제는 예전처럼 나 자신을 몰아붙이지 않는다.
그래도 가끔은,

사촌의 소식이 들릴 때면 마음이 살짝 움찔한다.
“그 집은 여전히 잘나가네.”
그 한 장의 사진 속 웃음들 사이에,
왠지 모르게 나만 프레임 밖에 서 있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이젠 그 감정을 피하지 않는다.
그건 내가 아직 사랑받고 싶다는 신호일 뿐이다.
그리고 그 사랑이 여전히 나를 움직이게 한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나는 그 감정이 올라올 때면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한다.
“괜찮아, 그건 그냥 가족형 불안이야. 오래된 감정의 습관이지.”

그리고 피식 웃는다.


그 웃음은 완전한 이해도, 완전한 수용도 아니지만
그 감정의 이름을 붙일 만큼은 성장했다는 증거다.



9. 나아가며: 사랑이라는 이름의 불안

이제 나는 안다.
가족의 비교는 미움이 아니라 사랑의 언어였다.
그 언어가 낡은 시대의 문법을 담고 있었을 뿐이다.


우리는 모두 그런 언어 속에서 자라났다.
그 언어가 우리를 조금 작게 만들었지만,
동시에 우리를 더 섬세하게 만들었다.


그 감정의 끝에는,

사랑보다 더 오래 남는 감정이 있다.
불안.


사랑받고 싶은 불안, 인정받고 싶은 불안,
그리고 여전히 더 나은 내가 되고 싶은 불안.


다음 장에서 나는 그 불안을 들여다보려 한다.
비교의 그림자를 넘어,
질투의 본질 속에 숨어 있는
‘불안의 심리학’에 대하여.



✍️ 한줄요약

“가족의 비교는 사랑의 또 다른 형태지만,
그 속에서 우리는 스스로의 크기를 잃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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