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을 보내며 2019. 5. 22.
언제부터를 할머니라 불러야 할까. 나는 흰머리가 좀 늦게 나는 것 같다. 그러니 머리가 하얗게 되면 할머니라고 불러도 되겠다.
할머니는 서울 외곽 주택단지 골목, 손글씨 입간판이 놓인 글쓰기 공방에 앉아 있으면 좋겠다. 벽을 돌아가며 빼곡히 채운 책, 하지만 레일 책장은 싫다. 그림책, 청소년 도서, 책 모임에서 수십 년간 읽은 책을 계절별로 두고 싶다. 누구나 맛있는 커피를 내려 마실 수 있는 따뜻한 공간이었으면. 가운데 큰 테이블을 놓고 일고여덟 명 둘러앉아 배우고 수다 떨고 갓 구운 빵을 나눠 먹을 수 있는 곳. 공방 가까이에 올리브 치아바타를 파는 맛있는 빵집도 있으면 좋겠다.
할머니는 그곳에서 무엇을 할까. 글쓰기 수업을 한다. 아이들이 나를 싫어하지 않고 흰머리 할머니가 부담스럽지 않다면 신나게 떠들면서 놀다 글을 쓸 것이다. 책으로 벽을 다 채우면 안 될 수도 있겠다. 드로잉한 그림을 차곡차곡 붙일 벽면도 필요하니까.
공방에는 나이 든 개도 있다. 창가에는 푹신한 방석이 깔려 있고, 털이 하얗게 센 개는 품 넓은 표정으로 자리를 지키며 오가는 사람들과 인사를 한다. 피곤해지면 쿨쿨 자겠지. 그 개가 소녀개가 아닌 게 마음에 걸리지만 소녀개를 닮은 개였으면 더없이 좋겠다.
할머니네 글쓰기 공방에는 또 누가 올까. 친구가 된 동네 할머니들, 조금 떨어진 동네서 놀러 온 할머니, 곧 할머니가 될 아주머니들이 책을 읽으러, 드로잉을 하러, 책 모임을 하러, 늙은 개를 만나러, 그냥 커피 한잔이나 빵을 먹으러 오면 좋겠다. 할머니는 아침저녁 늙은 개 산책 말고는 자리를 비우지도, 며칠씩 여행을 떠나지도 않고 늘 그곳에서 누군가를 기다리고 싶다.
언젠가 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시고 소녀가 제 삶을 세워 독립하고 소녀개가 강아지별로 이사 가 이 세상에 없을 때에도 나는 그 글쓰기 공방에서 나이 든 개와 함께 조용하지만 조용하지 않게, 수다스럽지만 시끄럽지 않게 카모메 식당이나 심야식당처럼 사람 냄새 가득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싶다. 할머니지만, 그때도 나는 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