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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 같은 첫 문장 쓰기

글쓰기 교실에 오세요 06

by 싱싱샘

컴퓨터의 커서가 깜박인다. 아이들에겐 네모 칸이 가득한 원고지 노트가 펼쳐져 있다. 나는 깜박이는 커서 앞에서 편안해지는 사람이지만, 백지가 공포스러운 아이도 있다는 것을 안다. 아무거나 써봐, 이것처럼 도움 안 되는 말이 있을까. 글감 연습을 하고 같이 쓰기의 힘을 보태면서 어려움을 겪는 아이는 대폭 줄지만 나는 가끔 특수 임무를 준다. ‘나는 요즘’으로 시작하는 첫 문장 쓰기.


나는 요즘


자, 이 뒤에 어떤 서술부를 채울 것인가. 임무를 주는 이유는 세 가지다. 한 일 중심에서 벗어나게 하기, 조금 더 깊어지는 이야기 써보기. 더불어 늘 고민되는 첫 문장을 제대로 고민해 보기. 아이들에게 ‘제대로’란 망망대해가 아니라 어쩌면 경계선을 주는 일일지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요즘 초조하다.

나는 요즘 재미있는 일이 하나도 없다.

나는 요즘 혼자 있고 싶다.

나는 요즘 동생 때문에 너무 힘들다.

나는 요즘 5학년이 될 준비를 하고 있다.



이처럼 단순한 두 단어로도 아이들은 내면을 곧장 꺼내 보인다. 글의 깊이로 이어지는 첫 문장도 있는 것이다. 물론 4,084일 2시간째 살아 있는 중이다, 라고 쓰겠다는 녀석도 있지만. 밑줄 안에 다양한 말이 들어간다면, 다시 말해 삶의 다양성이 확보된다면 대한민국에서 아이들이 제대로 살고 있다고 생각해도 좋을 텐데. 고학년이 될수록 힘든 이야기가 주르르 쏟아진다. 그래서 나의 특수 임무는 예고 없이 주어진다. 아이들이 자신 안에 들어있는 마음을 깊이 보았으면 좋겠고 나는 요즘, 너는 요즘 그렇구나! 서로 돌아보았으면 한다.



동생, 5학년


나는 요새 동생 때문에 너무 힘들다. 왜냐하면 요새 나는 동생과 부딪치는 일이 너무 많다. 예전에는 동생이랑 사이가 좋았었다. 하지만 요즘에는 장난도 많이 치지만 사이가 많이 나빠졌다.

내가 생각했을 때 나와 동생이 사이가 나빠진 첫 번째 이유는 서로가 약 올려서인 것 같다. 동생은 내가 엄마한테 혼날 때마다 “나는 안 그러는데.”라고 하고 내가 숙제하거나 물 먹으러 나올 때 동생이 날 발견하면 나한테 “오빠, 왜 숙제하다 말고 놀고 있어?”라고 해서 항상 나를 엄마한테 혼나게 만든다. (중략) 내 생각에는 내 동생이 나보다 더 얍삽한 것 같다. 왜냐하면 동생은 내가 놀리면 항상 소리를 지른다. 그래서 내가 더 많이 혼난다. 그래서 나는 동생을 볼 때마다 째려본다.

두 번째는 내가 고학년이 되어서 그런 것 같다. 옛날에는 동생의 유치한 장난이 나도 재밌었고 같이 놀았지만 요즘에는 재미가 없어졌다. 그래서 동생과 놀지 않고 그리고 내가 숙제하는 시간이 많아져서 동생과 많이 못 논 것 같기도 하다.

내가 동생과 사이가 가까워지기 위해서도 나는 동생이 약 올리는 것을 참아야 할 것 같다. 근데 나는 동생에게 고마운 것이 하나 있는데 내가 엄마한테 혼날 때 동생이 먼저 나서서 나를 용서받게 해준다. 그것은 정말 고맙다. 나는 빨리 동생과 사이가 가까워지고 더 이상을 멀어지고 싶지 않다.



나는, 요새, 두 단어를 붙였는데 동생과 사이가 안 좋아졌고 왜 그런 건지 고민했다. 약 올리는 것을 참아야 하겠다는 결심도 기특하고 고마운 동생의 모습을 찾아내고 멀어지고 싶지 않다고 썼으니 글은 스스로를 가르치는 게 분명하다. 첫 문장은 이렇게 떨구는 것이 가장 좋다. 처음 나오는 문장이니 길어지지 않게만 쓰라고만 이야기한다. 여기에 '읽는 사람이 무슨 이야기가 나오려나, 기대감을 갖게 하면 좋으려나.' 지나가는 말처럼 흘린다. 지나가는 말처럼 흘리는 말이 더 잘 들릴 때도 있다. 나는 밑줄 쫙, 별표 세 개는 스스로 찾도록(핵심 문장, 잘 쓴 문장), 들어주었으면 하는 말은 아이 곁에서 어깨를 토닥이며 슬쩍 흘린다.


기적의 첫 문장 쓰기 두 번째 방법은 첫 문장 쓰기가 놀이처럼 되게 하는 것이다. 글감을 정할 때 1, 2, 3 번호를 매겨가며 최근 내게 있었던 일, 나의 경험, 감정과 생각들 가운데 하고 싶은 말이 담긴 글감을 찾아낸 것처럼 그 아래 다시 번호를 (1), (2), (3) 매긴다. 글감에 임시 제목을 붙여보는 것이다(임세 제목은 글다듬기 과정에서 최종 제목으로 바꾼다. 그러므로 생각나는 대로 써둔다). 그리고 다시 그 아래 새로운 번호를 또 ➀ ➁ ➂ 적고 가장 마음에 들었던 제목을 가지고 첫 문장 세 가지를 만든다. 보통 두 개는 평범하게, 편안하게 쓰고 하나는 심사숙고, 온 정성을 기울이게 하는데 고민한 만큼 첫 문장 ➂번의 당첨 확률이 높아진다. 이제 글감, 제목, 첫 문장이 준비되었다. 다양한 시도를 통해 가능성을 열어두고, 한 문장에 집중해 고민하는 과정이 곧 글의 시작 훈련이 된다. 여기까지 함께 차근차근 만들어가면 아이들 입에서 “이제 글 써요?” 말이 나온다. 나는 인심 쓰듯 그래! 시작! 외쳐준다.



글감 1. 크리스마스 선물 V

2. 나쁜 뉴스

3. 날아가라, 종이비행기


제목 (1) 기대, 재가 되다 V

(2) 나쁜 크리스마스

(3) 이럴 수가, 선물이...


첫 문장 ⓵ 매일매일 하루 종일 기다리던 크리스마스가 나를 실망시켰다.

⓶ 크리스마스 선물이 내게 분노심을 만들었다.

⓷ 크리스마스 선물이 내가 해오던 기대를 부쉈다. V


글감 1. 크리스마스 선물 → 제목 (1) 기대, 재가 되다 → 첫 문장 ⓷ 크리스마스 선물이 내가 해오던 기대를 부쉈다.



기대, 재가 되다, 3학년


크리스마스 선물이 내가 해오던 기대를 부쉈다. 내가 엄청 기다리던 날 25일 아침 학교에 가지 않아도 돼서 늦잠을 잤다. 벌써 동생이 크리스마스 선물을 열었다. 나는 선물의 포장지가 그냥 평범한 비닐봉지인 것을 보고 생각했다. ‘겉은 초라하지만 선물은 좋은 것일 수도 있지.’ (후략)



글감 1. 신나는 방학식

2. 라면 파티와 선물 V

3. 크리스마스 선물


제목 (1) 라면 파티&무비

(2) 우리 반이 모은 황금알 80개의 힘 V

(3) 맛있는 라면과 영화


첫 문장 ⓵ 목요일에 우리들이 열심히 모은 황금알 80개를 모아 파티를 하였다.

⓶ 이번에 우리 반 열심히 공부해서 파티한다.

⓷ 우리 반이 모은 황금알 80개의 힘을 목요일에 쓰게 되었다. V



이 반은 모두가 열심히 공부하면 선생님이 스티커를 주시는데 80개를 모아 방학식에 라면 파티와 영화 보기를 했던 모양이다. 글감 2. 라면 파티와 선물 → 제목 (2) 우리 반이 모은 스티커 80개의 힘 → 첫 문장 ⓷ 우리 반이 모은 황금알 80개의 힘을 목요일에 쓰게 되었다, 를 차례차례 만들었다.



우리 반이 모은 황금알 80개의 힘, 4학년


우리 반이 모은 스티커 80개의 힘을 목요일에 쓰게 되었다. 우리가 2학기 동안 열심히 한 공부의 힘으로 황금알 80개를 모아 라면 파티를 하고 영화를 보기로 하였다. 나는 참깨라면을 사가지고 갔다. 참깨라면에 계란블록을 넣고 분말 가루를 넣었다. 그리고 물을 넣었다. 4분을 기다리며 영화를 보기 시작했다. (후략)



결국 크리스마스 선물이 5천 원짜리였다는 것을 알게 된 3학년 친구는, 기대감이 깨져 그 조각들이 심장에 콕콕 박혔으며 기대는 재가 되었다고 글을 마무리했다. 4학년 어린이는 라면도 맛있게 먹었고 우리 반의 힘, 우리 반 전체가 대단하다고 느꼈다고 적었다.


글쓰기는 백 퍼센트 자기주도학습이다. 혼자 가능한 작업이면서 친구들과 함께하는 것이 좋은 이유는 단체 게임할 때의 유쾌한 긴장감 같은 분위기가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글감을 세 개씩, 제목을 세 개씩, 첫 문장을 세 개씩 글을 이렇게 저렇게 바꾸어가며 써볼 수 있게 하는 건 그런 분위기 덕분이고 아, 글은 이렇게 정성을 기울여야 하는 일이구나 깨닫게 하는 건 나의 목표다. 이 과정을 통해 늘 내가 쓰던 표현 말고 다르게, 표현의 연습을 돕고 첫 문장을 준비시킨다. 사실 첫 문장이 준비되면 아이들 글은 이미 시작된 거나 다름이 없다. 작지만 확실한 시작을 연습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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