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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음감 Aug 26. 2021

청소기에 속았다

편리가 진짜 편리인가

얼마 전까지 장판이 깔린 집에 살았다. 무려 1985년 준공 당시 깔았던 노란 장판이 2020년에도 있었다. 장판끼리 겹쳐진 부분이 비쳐서 네모를 만드는 그 장판 아시나요. 아신다고요? 어맛! 당신도 젊은이는 아니군요.


각설하고,


그 집에서 일렉트로룩스 청소기를 썼다. 오래돼서 거의 흡수될 지경의 장판까지도 벌떡 일으킬 만큼 흡입력이 센 청소기다. 그래도 세월을 이길 수는 없는지 청소기 헤드 한쪽이 떨어져서 고정이 안됐다. 헤드만 따로 살래도 너무 오래된 모델이라 맞는 게 없단다.


헤드 없이 1년을 더 썼다. 힘은 그대로인데 부품이 없는 청소기는 힘센 치매노인처럼 사람을 진 빠지게 했다. 그래도 청소기가 사람처럼 예측불허 행동을 하진 않으니 그럭저럭 모시며 썼다.


얄쌍한 무선청소기가 갖고 싶었다. 그래도 이리 힘쎈 애를 버리면 벌 받을 거 같았다. 얄쌍한 무선 청소기의 가격이 결코 얄쌍하지 않다는 것도 망설임의 이유였다.


내가 손목을 다치고, 다리를 다치고 흡입력은 떨어지고 등등의 바꿀 수밖에 없는 전지구적 요청이 들어오는 바람에 그 얄쌍함을 영접했다. 그의 얄쌍함에 마음을 빼앗겼다. 뭘 이리 주책없이 콩닥거리는지.


내가 이리도 지조없는 여자였던가. 콩닥임이 꿍얼거림이 되기까진 1시간이면 충분했다. 분명 편리하나 치명적으로 불편하다. 먼지통을 쓸 때마다 비워야 한다?


생긴 것만큼 얄쌍하게 휙, 버리고 싶었으나 자잘한 먼지들이 우주적 성실함으로 촘촘히 박혀있다. 그냥 헹구는 건 귓등으로도 안 듣는다. 일렉트로룩스 먼지주머니는 두 달에 한 번만 통째로 버리면 되는데 너는 뭐니.


일렉트로룩스보다 힘은 절반인데 어쩐지 뒷수습은 두 배로 느껴지는 건 그냥 느낌일 뿐이라고 우기고 싶지만 느낌인 거 같지 않다. 실눈만 뜨고 먼지통 사이에 골골히 박힌 미세먼지는 못 본 걸로 한다.


그러니까... 사람이 달나라에 간 건 벌써 반세기가 지났고 알파고는 이세돌을 이겼는데 왜 흡입력도 좋고 가볍고 편리하면서 마지막 뒤처리도 좋은 청소기는 나오지 않는 건지. 일부러 안 만드는 건지 아님 청소 따위는 너무 사소한 일이라 우주선 발사만큼의 고민을 안 하는 건지.


똑똑한 분들이 고민하면 금방 만들 거 같은데 안 만드는 거 보면 우린 지금 문명의 시작에 서 있는 건지 아님 끝에 서 있는 건지 헷갈려진다. 물론 아무도 하지 않는 고민을 나 혼자 우주적으로 떠안은 것 같아서 외로워지는 건 덤이다.


이렇게 사고의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부직포 밀대 알라뷰가 되는 엉뚱한 결말이 온다. 그럴 땐 얼른 맥주캔을 딴다. 너는 그래도 내 편이겠지. 나를 아끼는(내가 아끼는?) 맥주에 기대 지나치게 좌절하지 않아보려 한다.


좋아 보이는 것과 실제 좋은 것에 대한 간극을 청소기로 본다. 한낱 청소기가 이럴진대 삶도 그러지 않을까. 밖에서 볼 때 좋아 보이는 삶이 실제로도 꼭 보이는 것만큼 좋지 않을 수도 있다. 다른 삶을 기웃거리며 나는 왜 저게 없을까 하며 신경질적으로 손톱을 뜯는 대신 손톱 영양제라도 한번 더 발라주는 삶, 그게 진짜 좋은 삶인지도 모르겠다.


마찬가지로 내 삶이 누구의 눈에 좋아 보이기 위해 애쓰기보다 내가 진짜 좋아하는 삶이 되기 위한 쪽으로 집중해야겠다. 남에게 좋아 보이느라 뒤에서 먼지통 실리콘을 끙끙대며 빼는 삶은 나를 위한 삶이 아닐 테니 말이다.


침묵하는 살림들이 시끄럽게 말을 거는 아침, 그들의 이야기에 글로 대답하며 오늘을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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